영국의 현실을 <차브>는 잘 보여준다. 우리가 보는 영국은 만들어진 영국일 수 있다. 게다가 노동계층을 대변한다는 노동당조차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그런부분을 중심으로 페이퍼를 작성중이다. <차브>중에 특정 주제에 해당부분 발췌식으로...
실제 <차브>에서는 노동당 조차 중간계층을 대변하려 하지 노동계층을 대변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노동계층이 골수 우익집단을 선택하기도 한다.(이는 다음 글에 발췌하는 것으로)
앞서 대처는 가난을 사회 구조의 문제가 아닌 개인이 열심히 살지 않은 탓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보수당과 언론을 그렇게 만들어냈다. 이후 노동당 역시 가난은 빈곤계층의 잘못으로 몰고 갔다. 어찌보면 영국에서 빈곤계층을 그 누구도 대변해주지도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노동당 정치인들은 형편없는 학교 성적이나 가난이 대물림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노동계급 내 '열망의 빈곤'을 분석하기도 한다. 가령, 신노동당 전 교육담당 비서 앨런 존슨(Alan Johnson)은 “특히 오늘날 노동계급 아이들 세대에 팽배한 열망의 빈곤"을 비난했다. 산업의 파괴에 따른 일자리와 직업연수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계급 아이들의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008년 출간된 정부 보고서는 옛 산업지대에 거주하는 노동계급의 이른바 '부족한 열망'을 강조했다.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이런 지역에서 열망을 가지기 위해 아이들에게 무엇이 필요 한지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식의 접근은 대처주의 시대에 극히 전형적인 것이었다 노동계급이 직면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책임은 정확히 그들 자신의 것이라는 말이다.
'열망있음', 대 '열망없음'의 대립구도는 대처리즘 시대에 드러난 노동계급의 균열을 이용하려는 신노동당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노동당 정치인들이 '열심히 일하는 가족'이라고 부르면서 부정하게 복지금이나 타내는 수많은 게으른 사람들의 반대편에 세워놓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복지 식객을 때리는 것이 백만장자가 아닌 저임금 노동자의 지지를 끌어내기에 더 매력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적은 임금을 받으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돈으로 흥청망청 사는 부자들에게 분노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실 산업의 붕괴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노동계급 공동체에게 복지에 대한 공격이 돌아갔다. 옛 산업지대는 실업자와 복지기금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가장 많았다. 사라진 일자리를 대체할 만한 안정된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신노동당의 접근방식은 그들을 연약한 노동계급이라 낙인 찍었고 악마로 만들고 말았다. (130-131)
신노동당의 복지정책은 무능하고 열망이 없으며 얻어먹기만 하고 비정상적인 데다 무질서하다는 일련의 차브이미지를 노동계급에 부여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보수당이 아 닌 노동당에서 나옴으로써 노동계급 사회와 개인을 향한 중간계급이 가진 수많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런 공 격은 직접적인 공격보다 더욱 교묘하다. 신노동당의 기반이 된 많은 철학들은 중간계급 승리주의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 철학들 은 넝마를 걸친 채 남아 있는 노동계급은 역사의 잘못된 편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같은 '중산층 영국'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136)
노동계급 아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부족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정치인과 논평가들은 종종 핵심을 놓치고 있다. 대체 무엇을 희망하란 말인가? 예전에 그렇게 많이 존재하던, 좋은 급여를 제공하는 양질의 노동계급 일자리들이 전국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소멸해 버렸다는 것은,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 슈퍼마켓이나 콜센터 같은 곳을 제외하면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259)
공공부문 삭감이 진행됨에 따라 상황은 한층 암울해 보인다. 공공부문은 수년 동안 졸업식을 갓 마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선택지였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것이다. 만약 여러 해의 학업 기간을 거친 뒤에도 안정되고 벌이도 좋은 일자리를 얻을 개연성이 낮다면, 대체 왜 그런 과정을 밟아야 하나? 결국 하게 되는 일이 가게 점원이라면, 수년 동안 뼈빠지게 학교 다니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은 시간낭비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아이들이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기를 바란다면, 기대할 만한 무엇 을, 그 아이들에게 줄 필요가 있다. (261)
노동계급을 악마화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잔인하도록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들을 악마화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그리고 극도로 불평등하게 이뤄지는 부와 권력의 분배를 사람들이 지닌 가치와 능력을 공정하게 반영한 결과라고 합리화하는 것. 그러나 이런 악마화는 훨씬 더 치명적인 의제를 갖는다. 오직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교의는 특정한 노동계급 공동체들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문제 전반에 적용된다. 그것이 빈곤이든 실업이든, 혹은 범죄이든 관계없이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부서진 영국(Broken Britain)에서 희생자들은 자기 자신들 말고는 탓할 사람이 없다. (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