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에는 세계석학들의 책 출간소식이 돋보인다.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를 비롯하여 엔트로피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 노벨상 출신의 세계적 경제학자 스티글리츠 그리고 프레임이론을 정치에 접목시킨 조지레이코프의 책이 출간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들의 저작을 테마로 삼아 읽어보려고 미루고 있던 터라 이번 신간출간으로 이제는 읽어야 할 때를 잡아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중이다. 물론 조지레이코프의 책은 이미 3권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논외로 하고.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불온서적으로 지정이 되면서 유명세를 탄 장하준 교수는 경제학상인 뮈르달상과 레온티에프 상을 수상한 세계적으로 저명한 경제학자이다. 불온서적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진보 경제학자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라는 포장을 한 비정상적인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런 비판에 발끈하고 있는 대한민국 군대는 비정상적인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집단인지 한번 되돌아봐야 한다.
장하준교수의 신작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대한 소개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비금융 기업이 소유한 금융자산은 비금융자산의 40% 정도였으나 2000년대 이후 미국을 대표하는 제조업체조차 금융수익에 의존하는 사실상의 금융업체로 변신했다. 2003년 지이그룹 이윤의 45%가 지이캐피털에서 창출됐고, 2004년 지엠그룹은 이윤의 80%를 금융자회사 지맥(GMAC)에서 올렸으며, 2001~2003년 포드그룹의 모든 이윤은 포드파이낸스가 벌어들인 것이었다. 월스트리트를 부정한 투기수익에 취한 광란 상태로 몰아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파생금융상품을 “대량금융살상무기” (Weapons of Financial Mass Destruction)라 불렀던 투자가 워런 버핏의 예언은 2008년 금융위기로 실현됐다. 금융 허브를 꿈꾸던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라트비아 등이 직격탄을 맞았다.
장 교수가 보기엔 신자유주의 강자들이 부르짖는 재정안정 등을 통한 인플레 억제와 자유로운 자본이동, 노동 유연성(고용 불안정을 가리는 미사여구)도 결국은 금융자산가들의 투기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인플레이션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라는 장 교수는 인플레 억제정책을 “장기적 안정과 경제성장,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희생해서 금융자산 보유자들에게나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려는 사람들이 대중을 겁주기 위해 사용해온 ‘무서운 망태 할아범’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더 많은 교육이 더 나은 삶을 보장한다는 것도 허구라고 논박한다. 신자유주의가 유발한 고용불안으로 성적 높은 학생들이 직업적 안정성이 높은 의대나 법대 쪽으로 쏠리고, 학력 인플레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의 예를 들면서 그는 대학교육의 절반 정도는 생산성과는 별 상관 없는 일로 낭비되고 있다며 학력 인플레의 폐해를 이기적 영화 보기에 비유했다. “(앞쪽 관람석에서) 한 사람이 서기 시작하면 그 뒷사람도 따라 서게 되고, 그러다가 일정 비율 이상의 사람들이 서면 결국 모두가 서서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말이다. 영화관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화면을 더 잘 볼 수도 없으면서 앉아서 보지도 못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46260.html
또 다른 경제학자 스티글리츠의 신작 역시 출간되었다. 스티글리츠의 전작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Making Globalization work)를 원서로 산 덕에 읽지 않고 있는 시점에 <이단의 경제학> 에 이어 <끝없는 추락>까지 출간되었다. 사실 <스티글리츠 보고서>라는 책도 바로 얼마전에 출간되었다. 미국중심의 그것도 금융중심의 자본주의가 장악하고 있는 한국경제학에서 스티글리츠는 그 이름값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덜 알려져 있다. 스티글리츠 역시 자본주의경제학자인데 금융자본주의(신자유주의) 일색인 우리나라에서는 그 만큼 소개될 자리가 적기 때문일것이다.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 끝은 아직 멀리 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느린 기차의 난파와 같은 것이었다. … 구조가 제대로 이뤄졌다는 말이 나오는 이때 분명한 건 임박한 참사를 피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글로벌 경제는 벼랑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역사가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경제의 회복이 굳건한 기반 위에서 이뤄지고 있는 게 아니며 글로벌 경제는 불안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새로운 비전을 담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임기응변식 정책”에 매달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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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추락>이 시종일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금융규제 완화정책과 그 사상적 이론적 배경인 시카고학파류의 시장근본주의다. 스티글리츠는 공화당 조지 부시 정권이 촉발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확연해진 미국 경제 실패의 주범을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부실화에 집약돼 있는 시장근본주의와 금융규제 완화, 그것을 극단적인 사익 추구에 활용한 금융계의 도덕적 해이라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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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자들의 시장만능을 비판해온 스티글리츠는 신자유주의 금융시스템 자체를 바꾸고 사람과 이념도 바꾸자고 말한다. 실패를 부른 정치 세력을 문제삼고 정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말도 했다. 적절한 정부 개입과 확고한 금융규제를 통한 공정한 게임 룰을 새로 만들자는 얘기다.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45153.html
<엔트로피>, <육식의 종말>, <소유의 종말>, <노동의 종말>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해 온 제레미 리프킨의 전작 <유러피안 드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까지 손에 잡은 책으로 유명하다.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민과 공정이라는 잣대를 국민에게만 강요하는 2MB는 수준차이가 너무 난다. 꾸준히 현실사회를 비판했던 제레미 리프킨이 전작부터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고민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신작 <공감의 시대>가 인간은 공감능력의 확장을 통해 문명을 진전시켜왔다고 한다는 것을 보면.
그는 그간 왕성하게 과학기술 발전이 인류문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때론 그 폐해를 비판하며 에너지 대안을 탐색해왔는데 <공감의 시대>(The Empathic Civilization)는 기왕의 저작들을 아울러 인류문명의 과거와 미래의 진로에 대한 견해를 집대성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때로 그의 견해는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그는 육십대 중반, 노년의 길목에서 집필한 이 책에서 인간과 인류 문명의 ‘결말’에 대한 낙관을 부여잡고, 절멸의 위기에 처한 문명의 현재상태를 조망하고 그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자고 역설한다.
그의 낙관은 문명의 행위자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천착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은 공감능력이 있으며 공감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1차적 특성이라는 게 리프킨의 기본 생각이다. <공감의 시대>는 그 원제목이 드러내는 대로 인류 문명을 ‘공감의 문명’으로 파악한다. 리프킨은 인류 문명사를 공감이란 열쇳말로 새로이 직조할 뿐 아니라, 문명의 진전은 공감의 확장 과정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인간은 공감하는 존재, 곧 ‘호모 엠파티쿠스’다. 리프킨은 고대 이래 1700년 동안 인간을 본질적으로 타락한 존재라 못박았던 기독교 문명, 18~19세기 유럽과 미국의 사상가들의 견해를 차례차례 반박하면서 공감하는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를 정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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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킨은 “지금 세계적으로 만연한 폭력은 인류사에서 흔한 일이 아니”며 “예외적 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2차대전의 홀로코스트를 겪은 뒤 지난 반세기에 걸쳐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는 ‘공감’이 보편화됐으며, 지금 이 시기 우리는 세계적 차원의 공감 의식에 바짝 다가섰다고 주장한다.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유색인종, 소수민족, 소수 종교 신봉자 등 종전엔 동료로 생각지 않았던 다른 인간에게까지 공감의 범위를 확대했다. 심지어 동물보호법이라는 형태로 우리의 공감적 감성을 확산시켰다. “우리는 ‘다른 사람’, ‘외부인’을 몰아내는 게임의 막바지에 와 있다.”
그러면 인류문명의 미래는 낙관적인가. 요컨대 리프킨은 지금 우리가 공감의 보편화, 세계화에 바짝 다가선 만큼이나 우리 자신의 멸종도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역설에 놓여 있다고 답한다. 이는 ‘공감?엔트로피의 역설’이다. 역사를 통틀어 새 에너지 제도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을 통해 훨씬 복잡한 사회를 만들어내고 이 기술 진보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공감적 감수성을 고조시켰다. 그런데 그럴수록 에너지 사용은 급증하고 지구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다. 리프킨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손실, 곧 엔트로피의 증가라는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인류 미래가 놓여 있다고 말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44053.html
<코끼리는 생각하지마>,<프레임전쟁>이라는 책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과 다른 투표행위를 설명했던 조지 레이코프의 책이 출간되었다. 소개기사에서는 이번에 처음 출간된 것 처럼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 이책은 <도덕의 정치>라는 책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프레임 전쟁>이 출간될 당시 세권의 책을 함께 읽었는데 <도덕의 정치>라는 책을 읽으면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와 <프레임전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어 지루하다는 단점도 있다.
그럼에도 선거에 대해서 생각해 볼 만한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강추하는 책이다.
"<코끼리…>에서 그는 2003년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공화당 후보로 주지사 선거에 나와 승리한 일을 둘러싼 모순적 상황을 보여준다. 당시 캘리포니아 노조원들은 민주당 후보이자 현 주지사인 그레이 데이비스가 내건 공약이 자신들에게 유리한데도 슈워제네거에게 기꺼이 표를 던졌다. 여기서 저자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슈워제네거가 보여준 ‘엄한 아버지’ 모델이 당시 유권자들에게 호소력이 더 컸던 것이다.
그는 이어 현실정치의 복잡성을 ‘프레임’이란 용어로 설명한다. 프레임이란 생각의 틀로 그 틀 안에 들어오는 이야기 외에는 귀담아듣지 않는다. 아무리 진실을 말하더라도 프레임 밖으로 벗어나면 전달되지 못한다. 따라서 정치적 승리를 위해서는 프레임을 선점하는 게 중요하며, 프레임을 만드는 건 언어라는 주장을 <프레임 전쟁>에서 펼치고 있다.
이번에 나온 <도덕, 정치를 말하다>는 국내 출간 순서는 가장 늦지만 원서로는 가장 먼저 나온 책(1996년작)이다. 그런 만큼 ‘엄한 아버지’ ‘자애로운 부모’ 모델을 정립해가는 이론적 성격이 강하다. 미국 의원 선거에서 보수주의자가 승리를 거둔 94년쯤, 도덕의 비유를 연구하던 저자는 선거유세를 지켜보다가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완전히 다른 도덕관을 가졌고, 양 진영의 정치담론은 상당 부분 그들의 도덕관에서 비롯된다는 걸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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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는 ‘엄한 아버지’로서 세상을 바라본다. 이들에게 세상은 위험한 곳이며 인생살이 또한 어렵다. 또 세상은 선과 악으로 나뉘어 있으므로 악에 대항해 선을 유지하려면 자제와 극기를 통해 도덕적으로 강해져야만 한다. 이들이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비판하고 누진세에 반발하는 데는 이런 도덕관이 작용한다. 사회복지는 사람들을 공공의 도움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존재로 만들 수 있으며 부자는 절제와 노력을 통해 꿈을 이뤘기 때문에 누진세와 같은 경제적 불이익을 주는 것은 ‘보상과 징벌의 도덕’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반면 ‘자애로운 부모’ 모델에 기반한 진보주의자들에게 세상이란 충만하고 공정하며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다. 사회적 약자의 경우 사회적 지위나 건강 문제 등으로 공정한 경쟁을 제한받았기 때문에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따라서 이처럼 불리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돕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10152128175&code=900308
장하준교수의 책은 서너권 정도 서가에 꽂혀있다. 책 내용은 그 때 그 때 파악했지만 실제로 읽어본 것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유일하다. 이번 신작과 더불어 올 겨울 네 명의 저자들을 책을 만나볼 생각을 해 본다. 조지 레이코프의 책은 진작에 읽었던 터라..
올해 노벨문학상은 페루출신 스페인작가 바르가스 요사에게 돌아갔다. 고은 시인이 유력한 후보였던 만큼 아쉬움이 있는 노벨문학상이지만 여전히 한국문학이 세계로 번역되어 나가는 통로와 기회가 적다는 점에서 이를 계기로 세계문학과 소통할 수 있는 번역에 대한 인식과 지원이 달라져야 겠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페루 출신 스페인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74)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대가의 한 사람이지만 이라크전쟁을 지지하는 등의 보수적인 정치 행보로 구설에도 오른 인물이다. 청년 시절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는 그 뒤 자유시장주의자로 ‘전향’했으며, 199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중도우파 후보로 나섰다가 일본계인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게 패한 독특한 전력도 있다.
1936년 페루 아레키파에서 태어난 바르가스 요사는 어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콜롬비아에서 성장하다가 1946년 페루로 돌아왔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문단에 데뷔한 그는 대학에서 법학과 문학을 전공하면서 공산주의 계열의 지하 조직에 몸담기도 했다.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아에프페>(AFP) 통신 기자와 텔레비전 방송 캐스터 등으로 일했다. 그의 언론 활동은 그 뒤에도 이어져 그는 여러 매체에 이런저런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글을 기고했다. 지금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강의하면서 스페인의 권위있는 일간지 <엘파이스>에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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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주제와 라틴아메리카의 복잡한 역사, 그리고 개인의 은밀한 성적 욕망을 두루 다루는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국내에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어 있다. 열네 살 연상의 친척 아주머니와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금지된 사랑의 유혹을 그린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새엄마를 상대로 한 소년의 에로틱한 욕망과 그것을 지켜보는 새엄마 쪽의 ‘길티 플레저’를 다룬 <새엄마 찬양>, 그리고 페루 국경 아마존 지역에 병사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 창설한 ‘특별봉사대’를 소재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페루 군부 및 사회의 모순된 행태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등이 대표적이다. 이밖에도 <녹색의 집>을 비롯한 몇 작품이 번역 출간되었으나 지금은 절판된 상태다.
이런 작품들 덕분에 바르가스 요사는 1994년 스페인어권 최고 문학상인 세르반테스상을 수상하는 등 유수의 문학상을 받았으며 노벨상 후보로 줄곧 거론돼 왔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올해 수상 결정 사실을 접한 뒤 “후보에 올랐으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자신의 수상이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스페인어문학에 대한 인정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우리 모두가 행복해할 만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42794.html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민족을 생각하면서 몇가지 의문이 들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과연 한민족이라는 틀로 묶어둘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그 시발점이다. 고등학교 시절 잠시 신화, 설화를 통해 역사를 공부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결국은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고등학교 시절엔 문학이나 사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나의 의문점 중에 하나는 신라의 독특한 건국설화 때문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난생신화(주몽이 알에서 태어나는)를 가지고 있는 반면 신라는 여러 신화가 엮여있다. 석탈해의 경우는 바다에서 흘러온 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신라가 복잡하게 민족이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즉, 옥저,동예처럼 한반도 토착민과 만주에서 내려온 민족 그리고 동남아,인도 등의 외부민족이 얽힌 나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백제가 멸망했을 때 신라는 적으로 여기고 일본은 형제의 나라로 여긴것도 민족의 흐름이 고구려, 백제, 일본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신라는 다른 민족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사실 한국의 성씨 중 절반이 중국에서 넘어온 성씨인데... 이런 나의 관심을 만족시켜줄 만한 책이 하나 소개되었다.
독서가들을 실망시키지 않은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가 이번에 출간되었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씨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이 시대의 ‘진보 논객’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 같은 책을 통해 한국 사회의 허위의식을 가차없이 통박해온 박노자씨의 본디 전공은 ‘한반도 고대사’다.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는 박노자씨가 처음 펴내는 고대사 대중서다. ‘우리의 위대했던 고대사’ 담론에 열광한다거나 그 고대사에 일말의 자부심을 품고 있는 이들이라면 박노자씨의 논지가 도발적이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는 국경으로 장벽을 친 땅덩이 안에 국민국가의 일원으로 사는 ‘우리’들에게 ‘우리 고대사’를 보는 시각에 오늘의 민족?국가의식을 투영시키지 말 것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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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을 초월한 이런 합의’의 밑바닥에는 구한말과 식민지시대 민족사학이 놓여 있다고 책은 말한다. 민족사의 틀이 확립된 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적 시기다. 나라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신채호를 위시한 민족주의자들이 민족 수호 정신으로 고조선과 고구려?발해의 강성함과 만주 벌판 지배를 부각시키는 민족사 쓰기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수난의 현대사’가 ‘위대했던 고대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백제를 없앤 김춘추”를 “역사의 죄인”으로 단죄했고, 손진태는 “민족적으로 최대의 죄악”이라고 비판했다. 두 거두의 시각은 물론 일제강점기 친일파 비판과 궤를 같이한다. 박노자씨 역시 “우리가 현재적 이상들을 소급 적용해 과거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책망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삼국의 싸움을 동족상잔으로, 당나라와 손잡은 신라의 행동을 배신으로 보는 태도는 “오늘날 동질화된 한인(韓人)이라는 종족적 집단의 모습을 1500년 전 과거에 투영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한?중?일 간 ‘(민족주의적)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바, 이 역사전쟁의 극복은 어느 한쪽의 독선적 민족주의나 다른 쪽의 자아중심적 논리가 아니라, 근대적 민족주의를 더는 고대사에 투영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41939.html
여전히 천안함 사건은 논란중이다. 요즘은 스크루에서 발견된 조개가 이슈가 되고 있는데 정부의 주장은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있는 모양새다. 게다가 천안함 관련자들에 군대 사기를 문제로 법적징계를 하지 않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가만히 있는 천안함에 북한이 몰래 어뢰를 쐈다'는 논리인데 그럼 군대는 뭐하러 있는가? 천안함이 북한이 저지른 일이라면 군대가 자신의 본분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관련자들은 모두 처벌받아야 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다음은 <봉인된 천안함의 진실>에 대한 소개이다.
"천안함 최종보고서는 이밖에도 갖가지 모순으로 가득하다. 천안함을 두쪽 낼 정도의 어뢰가 터졌다면, 승조원들이 “총알처럼 튕겨나간다”는 민군 합동조사단 자문위원의 증언이 있는데도 최종보고서는 ‘뫼르쇠’다. 폭발은 천안함의 왼쪽에서 일어났는데, 스크루는 왼쪽이 아닌 오른쪽이 휜 데 대해 제대로 설명을 못한다. 선체에 붙은 흡착물은 폭발물질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은 국방부가 주장하는 사고시각보다 짧게는 4분 가까이 일찍 끊겼다. 사건 발생 장소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국방부가 ‘북한 어뢰설’의 결정적 증거라고 내놓은 녹슨 어뢰추진체는 더욱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듯하다. 합조단이 이 어뢰 추진체의 것이라며 5월20일 발표한 실물 설계도가 가짜임이 밝혀져 국민들을 놀라게 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한겨레>가 특종보도한 러시아 천안함보고서 요약본에 따르면, 러시아 조사단은 이 추진체가 “6개월 이상 수중에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2개월 물속에 있었다고 판단한 국방부와는 차이가 너무 크다.
다시 살펴봐도 국방부가 펴낸 천안함 최종보고서엔 “북한이 했다”는 주장은 있는데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은 지극히 빈약하다. 달리 표현하면, 국방부는 천안함이 북한에 의해 공격당해 침몰했다는 가설을 내놓았으나 최종보고서에서도 이를 제대로 증명하지 못한 셈이다. 한마디로 천안함과 관련한 진실은 여전히 ‘봉인’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가설 단계의 ‘북한 어뢰설’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대내외 정책들을 펴나가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북풍몰이’를 해 6?2 지방선거에서 승리하고자 했고, 북한에 대해서는 개성공단 이외의 경협을 전면 중단시켰다. 또 미국과 서해에서 대규모 군사 훈련을 하는 등 확연한 미국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펴나간다. 이런 모습에 중국은 경계심을 표시하면서, 산둥반도에서 대규모 맞대응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중국에 진출해 있는 남한 대기업들은 중국 정부가 각종 인허가를 늦추고 있는 현상이 천안함 사건 이후 우리 정부의 이런 편향된 외교정책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현재의 상황이라면 천안함이 한반도의 안정을 급격하게 흔들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놓고 한반도 주변국들이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는 탓이 크다. 심지어 지난 9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소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한 국민들도 32.5%만이 정부의 ‘북한 어뢰설’을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날 정도로 이 사건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크다.
이런 인식 차이를 보여주는 한 예가 지난 9월29일 유엔 총회에 참석중인 박길연 북한 외무성 부상의 발언이다. 그는 “천안함 사건을 이용해 미국과 남한이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 대규모 무력을 이용한 군사적 위협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 부상은 또 “남조선 당국은 사건 진상에 대한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확인을 위하여 피해 당사자인 우리가 제기한 검열단의 현지 파견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고 천안함 사건에 대한 검열단 수용을 재차 촉구했다. 하지만 남한은 “북한이 천안함을 격침시켰다”는 주장을 공식화하고 있고, 북한에 대한 대규모 지원 등 정책 변화를 ‘북한의 천안함 공격 사과’와 연계시키고 있다. 천안함과 관련해서 둘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인식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 무엇보다도 갈등이 심화됐을 때 중재에 이르기가 어렵다. 한반도 정세가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립구도로 짜이고 있는 속에서 남북한과 미국?일본?중국?러시아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행동을 하면서, 이를 자신들의 천안함 해석에 빚대어 정당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천안함 사건의 최대 수혜자로 지목하고 있는 미국의 행보를 이런 시각에서 설명하고 있다. 중국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서로가 이익을 바라는 마음들을 천안함의 봉인에 기대어 숨기는 이런 구조에서 분쟁과 갈등은 필연적이다.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447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