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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 36 : 회화 - 우리 문화와 역사를 담은 옛 그림의 아름다움
백인산 지음 / 컬처그라퍼 / 2014년 12월
평점 :
2014년부터 2016년까지 간송미술관의 작품들이 DDP 나들이를 했다. 사실 간송미술관의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1년에 봄,가을 2주씩 두번만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이곳에 다녀온 이마다 작품 뿐만 아니라 주변환경을 들어 추천하였지만 실제 발검음을 한번도 하지 못했다.
간송미술관이 바깥 나들이를 하면서 같이 나온 책이다. 간송미술관의 회화 작품 36편이 책으로 소개되었다. 조선의 그림을 주로 소개하는데, 소개된 그림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그림도 소개된다. 그림아래 소개되어 있는 화가(문인화가도 화가로 보자면)들의 연대를 보면 1500년대에서 부터 1800년대 후반까지의 그림의 흐름을 볼 수 있다.
간송미술관의 많은 유물중에서 이들 그림을 선정한 이유는, 이것이 조선시대의 문화와 예술,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이야기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래서 간혹 이 그림은 별론데 왜 넣었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소위 잘 알려진 명작 뿐 아니라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한 작품일지라도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넣은 겁니다. 즉,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그림을 통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부분이 가장 컸습니다. (17)
간송 전형필은 일제시대 옛 문화재를 소장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돈을 사용했다. 그런데 단순히 수장가들 처럼 유명 작품 중심으로 구매하지 않고, 우리 문화를 잘 알려줄 수 있는(시대가 불화하여 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작품들을 선별하여 구매하였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싶었던 것이다. (간송 전형필이 단순 수집가가 아니었던 것은 해방후에는 더 이상 작품 소장을 하지 않은 것인데, 더 이상 일제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간송미술관은 단순히 옛 문화재를 소장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존과 연구에도 힘썼다. 겸재나 겸재시대 연구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연구성과를 낸 것이 그렇다. <간송미술36 : 회화>는 그 연구결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귀중한 작업이다.
<간송미술36:회화>는 조선의 그림 36점을 설명한다.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조선미술에 대한 다양한 가이드를 제공한다.
'삼원 삼재'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을 일컬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기원은 명확치 않지만 대체로 삼원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을 지칭하고, 삼재는 ‘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을 꼽는다. 다들 조선시대 회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대가들인데, 공교롭게도 삼원은 모두 화원화가이고 삼재는 모두 사대부화가이다. ...
조선시대의 허다한 문인화가들 가운데 이들을 유독 '사인삼재'라 통칭하며 중시하는 이유는 단지 기량이나 명성 때문만은 아니다. 삼재라는 호칭은 각기 조선 후기 회화의 세 축이라 할 수 있는 진경산수화, 조선남종화, 풍속화를 창안하여 조선 후기 회화 발전의 기틀을 다지고 절정에 올려놓은 업적에 대 한 역사적 평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마땅히 진경산수화는 겸재, 조선남종화는 현재의 자리이다. 문제는 풍속화다. 연배로 보아서는 공재 윤두서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하지만 공재의 풍속화를 보면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다. 풍속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의 의관과 풍물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선구적이나 한계가 보인다. 바로 기법의 문제이다. 공재의 풍속화는 여전히 중국의 영향이 강했던 조선 중기 이전의 인물화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
후배 문인 이규상은 "우리나라의 그림이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독립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 ... 관아재는 동문 선배인 겸재와 더불어 진경시대 인물 풍속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냈고, 그것은 곧 조선 후기 풍속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했다.(144-147)
몇 해 전 조선화공을 소재로 한 드라마(물론 픽션이지만)를 계기로 혜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단순히 드라마 때문은 아니다. 그 전 부터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일제 시대 문화재를 거래하던 일본인들은 단원이나 겸재 못지 않게 혜원의 그림을 모았다. 당시만 해도 풍속화에 한정된 혜원의 작품에 대한 평이 높지 않을 때 였다. (물론 그럼에도 간송은 혜원의 그림을 꾸준히 모았다.)
혜원의 그림에 우리보다 일본인들이 먼저 반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우리 것의 소중함을 몰랐다는 일반적인 말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겸재나 단원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유독 혜원이 홀대받은 것은 조선시대에 혜원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의 심미안이 탁월했던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온전히 기호와 취향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혜원의 그림이 지닌 화려한 색감과 감각적인 필치, 그리고 은밀한 선정성 등이 우리보다는 일본인들에게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듯하다. 그러나 누가 먼저 혜원의 가치를 발견하고 세상에 알렸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미술 작품은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혜원도 그렇다 2백여 년간 홀대받던 혜원과 그의 작품이 근대 이후 재조명 받은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혜원의 평판과 인기가 겸재는 물론 단원까지 압도하는 현상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이 같은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혜원은 특이한 그림을 그린 일탈적 화가가 아닌, 우리 미술사의 한 복판에 우뚝 선 거목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근대성이나 현대적 감각을 운운하며 혜원을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지만, 혜원이 이전의 어떤 화가도 보여 주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고, 그 수준 또한 탁월했음은 분명하다. (258-259)
얼마전 인문학 대중화의 선두에 있던 이가 방송에서 오원 장승업을 극찬했다. 그런데 극찬한 작품이 오원의 작품이 아니었다. 과연 오원은 어떤 인물일까? 물론 오원에 대한 잘못된 설명은 2016년에 책은 2014년에 나왔으니 그런 일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원의 그림은 왕실과 사대부, 혹은 부유한 중인층의 기호와 수요에 맞춰 그린 주문작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만의 개성이나 감흥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의 화풍은 중국의 자취가 매우 강하게 묻어나며, 심지어 중국 그림을 그대로 모방한 작품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독자성과 창의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분명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는 오원 개인의 역량 탓으로 돌릴 문제는 아니다. 대개의 예술작품이 그렇듯이 오원의 그림도 시대적 산물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성리학은 물론 추사 김정희가 수용해 들인 청나라 고증학까지 외래 이념에 의해 압도당한 이념의 공백기이자 혼란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불학무식한 화공 오원에게 치열한 시대 정신이나 선구적 독창성 등을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 그는 탁월한 기량으로 별다른 의식 없이 시대적 기호와 수요에 적절히 부응했을 뿐이다. (290쪽)
이런 조선미술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닐 각 그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설명은 옛 그림을 보는 법을 기를 수 있는 아주 좋은 가이드를 제시한다. 꾸준히 이 책을 보면 우리 옛 그림을 보는 안목은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한번 보고 덮을 책이 아니다.) 우리 그림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 관심의 폭을 확대하는데,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궁금했다면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