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함부로 읽지 못했다. 그냥 가볍게 읽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책 앞 뒤를 살피니 2002년에 구매했는데, 정작 읽기는 2004년 1월1일이었다. 책 앞에는 '가슴설레며 책 꽂이에 꽂아두었다'는 말이 있다. 너무 묵혀두지 않나 싶어 갑신년 새해 서둘러 손에 들었던 것 같다. 선생님 타계 소식에 병신년에 손에 다시 들었으니 12년 만이다.

 

<사색>은 감옥에서 외부로 보낸 편지, 엽서글이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급수가 바뀌어서 한달에 네번까지 편지를 보낼 수 있다고 표현이 된다. 다른 책을 보면 편지의 내용을 며칠동안 생각하고, 머리속에서 퇴고까지 거친 글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만큼 생각에 생각을 통해 다듬은 글이 편지가 된 것이다.

 

전에는 독서, 책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눈에 들어왔다. 피상적인 독서가 빠질 수 있는 실천없는 지식을 경계하는 부분이다.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을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함은 사침(思沈)하여야 사무사(思無邪) 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85쪽)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188쪽)

 

징역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맨 처음 시작하는 일이 책을 읽는 일입니다. 그러나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역시 한 발 걸음이었습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 발 걸음이라 더디다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279쪽) 

 

12년만에 읽은 책에서는 선생님의 글씨에 대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글씨에 선생님의 생각이 담겨있다. 이후 <강의>의 주제였던 '관계'가 이미 글씨 속에 담겨 있던 것이다. 나무가 더불어 숲이 되는 것과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연대체, 어깨동무체라 불리는 글씨체가 담긴 의미를 볼 수 있다.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인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개칠(改漆)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자'(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하지는 못하는 '반쪽'인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 한 '행'(行)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연'(聯)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101쪽)

 

그뿐만 아니라 어머님께서 전에 써보내 주시던 모필서간문(毛筆書簡文)의 서체는 지금도 제가 쓰고 있는 한글서체의 모법(母法)이 되어, 궁체와는 사뭇 다른, 서민들의 훈훈한 체취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붓글씨에 있어서도 저의 스승인 셈입니다.(262쪽)

 

<사색>은 선생님이 쓴 책은 아니지만 선생님의 생각이 한권에 잘 어울려 있다. 짧게 말한 부분이 다른 편지에서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되고, 다른 사례에서는 획을 뒷받침하듯 생각을 연결하여 만든다. 모자이크 같은 편지 하나하나가 모여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여 한권의 책을 만든다.

 

<사색>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입장의 동일함'이다. 그래서 이번에 책을 손에 들고서도 이 부분을 먼저 찾아 읽었다. 역지사지라는 말 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입장의 동일함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대를 대상화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함게 하는 것이 아닐까. 격언, 잠언 등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부분은 두고 두고 생각하고 싶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313쪽)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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