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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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불편하다.

5명 모두 먹고 살만한 집에서 태어났다. 사회에 대한 고민이 없어도 삶을 사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래서 관계에 대한 고민이 그를 16년이나 붙잡고 있을 수 있다.

우연이라고 할까, 다섯명은 모두 대도시 교외의 '중상류'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는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로, 아버지는 전문직이거나 대기업 사원이었다. 자식 교육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계층이었다. 가정 또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평온하고 이혼한 부모도 없었으며 어머니는 거의 집에 있었다. 학교는 대학 진학률이 높은 명문고에 성적 수준도 꽤 높았다. 생활 환경으로 볼 때 그들 다섯은 차이점 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다.(13쪽)

 

이 책의 소재는 '색채 가득한 네 명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24쪽)이다. 다섯명은 캠프에 참여했다가 '나는 지금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친구를 만났다'(12쪽)는 느낌으로 한 그룹이 되었다. 쓰쿠루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름에 색깔이 있다.

남자 둘은 성이 아카마쓰(赤松)와 오우미(靑海)이고 여자 둘은 성이 시라네(白根)와 구로노(黑埜)였다. 다자키만이 색깔과 인연이 없었다. ... 다른 넷은 당연한 것 처럼 곧바로 서로를 색깔로 부르게 되었다. '아카(赤)','아오(靑)','시로(白)','구로(黑)'라고. 그는 그냥 그대로 '쓰쿠루'라 불렸다. (14쪽)

그러나 쓰쿠루는 무언가를 짓는 다는 뜻의 '作'을 가지고 있다. 다자키 쓰쿠루(多崎作).

 

이들 5명이 모이면 하나와 다름없었다. 나고야에서 만난 그들은 쓰쿠루가 도쿄의 대학으로 입학하고 1년 후 5명 그룹이 깨진다. 어느 순간 쓰쿠루는 그 모임에서 추방을 당하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다. 그의 안에 있는 무거운 짐을 새로운 여자친구 사라가 눈치채고 그들의 연락처를 알아낸다. 그리고 쓰쿠루는 16년만에 그들을 하나씩 찾아다닌다. 그가 자신의 추방이유를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상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그 짐을 해결해야만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서 '그가 시로를 강간해' 모임에서 그를 배제시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듣게 된다. 물론 그들은 쓰쿠루가 시로를 강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핀란드에서 만난 구로(에리)의 설명처럼 모임을 지키기 위해 쓰쿠루를 떨쳐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초 그들은 다섯일 때 완벽한 존재였다. 네 색깔의 균형을 잡아준것이 바로 색채가 없는 쓰쿠루였다.  

 

쓰쿠루는 어릴 때 부터 역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역과 관련된 업무를 하게 된다. 이는 그의 이름과도 관련되고, 5명의 그룹과도 연관된다. 다른 네명이 각각의 기차라면 쓰쿠루는 역이었다. 다섯명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쓰쿠루라는 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소설적 완성도에서는 글쎄다.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고 독자는 가만히 읽고, 동화되기만 한다. 독자가 생각해야 할 것은 없다. 초반부에는 3인칭 소설이라고 하기에 지나칠 정도로 사전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이 잘 짜여진 스토리가 되어 서로 잘 엮여진다. 그러나 핀란드에서 구로(에리)는 너무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한다. 필요없는 설명이 너무 많다. 핀란드 부분부터는 책을 읽는 속도가 떨어진다. 다섯명의 모임에 있어서 쓰쿠루의 역할이 너무 자세하게 설명이 된다. 굳이 그렇게 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색채가 없는 쓰쿠루의 역할과 역을 좋아하던 쓰쿠루, 그리고 쓰쿠루의 이름속에서 그의 역할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핀란드의 뒷부분에 가서는 중언부언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생뚱맞은 부분도 나온다. 프란츠 리스트의 Le Mal Du Pays 순례의 해. 소설의 제목으로 생각한 그리고 16년만에 과거를 찾아 떠나는 순례의 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억지로 끌어다 맞춘 느낌이다. 클래식에 문외한이 아닌데도 라자르 베르만이 생소한데, 핀란드에서 라자르 베르만과 알프레드 브렌델은 비교하는 장면이란. (혹시 본인의 음악에 대한 자랑을 소설속에서 이딴식으로)

 

읽고나니 이 소설이 리얼리즘 소설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장정일의 독서평처럼 시로는 쓰쿠루에게 강간당했다고 했는데 왜 그녀가 교살당했을 때 쓰쿠루는 조사를 받지 않았을까? 여기저기 빈틈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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