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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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시대 화두 중의 하나는 바로 '88만원 세대'이다. 대선 등 여타 이슈들이 넘쳐나는 2007년의 후반기이지만 '88만원 세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을 보면 현재 20대의 취업의 문제와 비정규직의 문제는 곧 사회기반을 흔들 문제라고 모두들 인식하고 있다.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란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의 10대들은 교육 장치에 의해서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고, 마케팅 장치에 의해 극단적으로 착취 당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70쪽 1318마케팅 : 인질경제의 등장) 이는 비단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 외고 입시문제와 관련되 드러난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입시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교육장치에 의해 부정의 경제학까지 그대로 답습하는 우리 교육의 현실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흥미롭게 책에 다가서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인질 경제(hostage economics)' 우리나라 10대에게 어른들이 행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사실 '88만원 세대'와 관련된 방송 및 기사들을 읽으면서 그 세대에 대해서 솔직히 '당해도 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주의화된 사회, 아무런 비판없이 보수층을 지지하는 20대, 더 이상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없는 대학생들, 주식투자와 부동산에 관심있는 이십대, 도서관에서는 공무원공부만 하는 미래없는 학생들. 그들 스스로 만들어놓은 무덤 속에 빠져버린 세대라 생각하여 솔직히 무지비한 감성을 비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한다. 바로 세대간 갈등. 앞선 세대들은 지금의 88만원세대와 어떤 바리케이트도 공유하지 않고 있었다.

사회의 의사결정력을 가지고 있는 유신세대는 사회적 협의나 대화의 방식보다는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 그러한 유신세대는 '88만원 세대'에게 경쟁을 강요하는 역할을 한다. 갈등관계가 형성이 된다고 하더라도 의사결정력을 가지고 있고 인적 네트워크와 지식 그리고 기술을 가지고 있는 유신세대와의 갈등은 이미 결정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유신세대는 20대가 누려야 할 경제적 몫을 가장 많이 노리는 약탈자이면서도 가정에서는 부모 관계로 협력할 수 밖에 없지만 결국은 부모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경쟁을 강요한다.

유신세대를 대체할 만한 세력으로는 '386세대'이다. 이미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들은 이제 곧 사회의 결정권을 가질 세력으로 등장할 것이다. 정치적인 이슈를 통해 사회적인 해결을 갈구했던 이들의 결집력과 영향력은 프랑스의 68 세대 보다도 더 강력하다. 그러나 프랑스의 68세대가 대학교육의 사회화를 통해 세대간 소통의 길을 열었던 것과 달리 우리의 '386세대'는 세대간 소통을 위한 아무런 비전이 없었다. 오히려 학벌주의와 경제엘리트주의를 낳았다. 게다가 사회구조의 변동으로 인해 다음세대에 대한 의무가 없는 '386세대'는 정치적 무관심과 개인주의를 이유로 지금의 20대를 경멸하고 있다.

'88만원 세대'와 가장 경쟁할 세대는 바로 그들의 이전 세대인 2이다. 'X세대'는 90년대 초반 대학에 들어와 IMF라는 경제위기를 겪어냈던 바로 그 세대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등 정치적 변화기와가장 힘들었던 취업의 시기를 보냈던 세대이다. 그러나 'X세대'는 그런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러 기제들 벤처투자 붐 등의 혜택을 받았던 시대이다. 나름의 경력과 실패라는 자기 경험이 자산이 되어 지금은 회사의 기본중추가 되는 자리를 잡고 있다. 교육의 혜택이라는 면에서 '88만원 세대'에 뒤지지 않고 사회적 안정성으로 소비구매력의 차이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지금의 '88만원 세대'가 'X세대'와의 갈등을 버텨낼 여력은 없어 보인다.

문제는 바로 '88만원 세대'내 갈등이다. 이미 이들 사이에서는 배틀로얄, 적자생존의 원칙이 기본적인 삶의 원리가 되어 버렸다. 상호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이기는 이런 승자독식의 사회의 원리가 자리잡아 버렸다. 이는 굉장히 불공정하고 불행한 게임이다. 특히 이런 게임에서 고졸이나 여성과 같이 아직은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계층은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의 해법은 이런 문제 지적에 나와있다. 즉 세대간 갈등에서 세대 협력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유럽의 여러나라들이 사회적 협의를 통해 미래세대들과의 공존의 길을 모색했듯이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문제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20대를 바라보는 꼰대의 눈길을 벗어던져야 한다. 각 세대마다 사회구조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들과 소통의 길을 열어내야 한다.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사회문제를 풀어내야 할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20대 스스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바리케이드와 한 발이라도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짱돌이 필요하다.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당당하게 스스로의 일자리를 강하게 요구할 필요가 있다. 개별화된 입사준비와 경쟁력은 '88만원 세대'를 파편화시킬 뿐이다.

책을 읽고나니 한편으로는 뜨끔하고 한편으로는 강한 아쉬움이 남았다. 결국 결론으로 내세우는 것이 보다 인간적인 자본주의를 형성하는데 모두가 힘쓰자 식의 구호같아서이다. 게다가 세대간의 협력의 길이 열린다 할지라도 20대 스스로 바리케이드와 짱돌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반대로 '88만원 세대'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자신들의 행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기성 세대가 그들을 여전히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볼 경우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힘들다.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성립되어야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그 두가지는 해결하기 힘든 공염불에 지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구호성 해결책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바로 '88만원 세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해냈다는 점이다. 특히나 '세대간 갈등'을 지적해 낸 부분은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대안성 1세대' 같은 해결책이 달성하기 힘든 구호같지만 이런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보다 현실적으로 대안을 찾아낼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해결의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희망마저 저버려서는 안된다. 이제 '88만원 세대'가 갖는 문제가 보였으니 문제를 해결할 '희망'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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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정치를 만나다 - 위대한 예술가 8인의 정치코드 읽기
박홍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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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박홍규 교수의 책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예술의 사회적 관계에 주목하고 글을 쓰는 그의 책은 분명 여타 예술관련 책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흔히 예술과 관련된 책들은 예술을 전공한 학자 혹은 예술가들에 의해 씌여지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진다. 그런 영향인지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예술에 관련된 글을 쓸 때는 무게감이 떨어져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시각은 이미 정치에 종속되어 버린 우리 예술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정치라는 주제로 8명의 예술가의 삶을 살펴본다. 물론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사고에서 괴테는 소설가, 사르트르는 철학자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예술이라는 단어가 정치와 결합하면서 예술은 미술과 음악으로만 한정지어버리는 결과의 소산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 루벤스는 예술과 정치의 조화를 이룬 행복한 인물이고 삶 또한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고단하지 않았다. 그의 조화로운 삶의 기본은 정치에 종속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에둘러 정치를 멀리하지 않았다. 스스로 외교관이 되기도 하고 사교의 중심인물이 되기도 했던 그는 정치와 예술을 함께 이룬 흔치 않은 예술가이다.

괴테 또한 루벤스와 같이 예술과 정치를 조화롭게 이룬 예술가이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예술가들이 시대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괴테가 비 정치적이라고 주장할지라도 괴테는 공직의 역할을 충실히 했음을 보면 예술가의 정치가의 경계를 무색케한다. 그러나 그는 국수주의와 민족주의의 매도되는 것을 극복하고, 시민적인 생활형태를 사회의 몽매주의와 비합리주의로부터 보호하려고 한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그러나 바그너의 경우는 정치에 경도된 한 예술가의 삶을 보여준다. 몇 해 전 '니벨룽겐의 반지'라는 거대한 오페라로 우리나라를 찾은 바그너가 새로운 유행이 되었지만 우리사회에서는 그 예술뒤의 정치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의 작품이 심하게 중세와 신화에 몰입했던 것은 바그너 스스로가 철저한 반유대주의이자 국가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오페라의 정치성은 결국 나치와 결탁한다.

오페라하면 빼놓을 수 없는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연계했다는 점에서 바그너와 비교될 수 있고, 그의 오페라에서 보이는 모습들이 민중들의 실패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내 보이지만, 베르디는 그의 오페라를 통해 이탈리아의 자유와 정치적 실패를 인간적 고뇌로 승화시키는 예술가다운 면모를 보였다.

천재화가 피카소는 예술의 상업성을 간파해 살아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몇 안되는 예술가이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이나 정신보다는 외적인 부분이 많이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천재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덮혀지기도 한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을 다룬 '게르니카'는 작품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강조한다. 피카소의 기행이 아니라 그의 정신 즉, 시대정신에 투철한 반항적 예술정신을 보여준다.

이 시대의 최후의 광대로 남을 채플린은 그 우수꽝스러움 뒤에 냉철한 사회비판 의식이 스며있다. '모던타임즈'를 통해 인간성을 말살해버린 미국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으며 '독재자'를 통해 히틀러를 비판한다. 그가 사회주의자라는 의견이 있지만 중요한것은 그가 빈부 갈등을 반대하며 자유와 평등을 믿는 민주주의자였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속에서 그런 그의 정신을 만날 수 있다.

실존주의자로 알려진 사르트르의 삶은 성찰적 예술가의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어떤 권력도 부정하고 노벨상과 같은 권위도 부정하는 그의 철학은 그의 작품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유행지난 작가라고 치부되던 시절에도 굿건히 그의 삶과 예술을 일치시켰으며 이념이 개인의 개체성을 희생하거나 헌신을 요구해서는 안된다며 자유로운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틀즈의 멤버로 잘 알려진 존 레논의 '이매진'은 분명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자들의 노래이다. 전쟁과 권력을 거부하고 평화와 공존을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노랫말이 아니다. 자본의 힘에 지배된 물신주의와 냉전이라는 사회적 구도속에서 가해지는 사회적 압박에 대해 그의 정치성을 그는 노래에 담아 실천한 예술가였다.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논쟁중의 하나가 바로 '참여문학' 논쟁이다. 정치적이지 않은 문학은 예술성이 높다라는 정치적 의도가 짙은 명제를 굳게 걸어 놓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예술에서 정치성을 찾는 행위는 일종의 저급한 일이었다. 예술 그 자쳬만을 최고로 놓는 예술계의 모습은 예술이라는 개념자체가 형성된 우리의 역사를 애써 무시하고 있다. 애초부터 권력에 의해 주도된 예술, 때로는 정치에 봉사하고 때로는 현실을 무시하면서 현실정치에 면죄부를 주고자 했던 예술은 과연 정치와 예술의 분리를 증명하는 것일까?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라는 말은 사실은 예술에 대한 모든 의미를 담고 있다. 현실이라는 사회에 발 딛고 서있는 예술가들은 현실정치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현실을 인간적인 고뇌로 승화시키거나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거나, 현실에 순응하는 것 모두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제 예술성이라는 가면뒤로 정치를 반영하는 예술가보다는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삶과 고뇌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홍규의 '예술, 정치를 만나다'는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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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1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1
EBS 지식채널ⓔ 엮음 / 북하우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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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bs에서 재미있는 광고하네'

처음 지식채널e를 보던 순간 공익광고인 줄 알았다.

'어라, ...'

그리고 다음 잠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전드라마와 같은 구성에서 나는 잠시 지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떠 올릴 수 밖에 없었다. 지식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가 너무 넓은 의미를 갖는 현대사회에 성찰하는 지식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져 버리지 않았나. 쏜살같이 빠른 지식의 흐름을 쫓기에도 힘든 지식사회. 그러나 한번도 성찰해보지 않았던 쌓여있는 지식들.

지식이란 잠시 휴지(休止), 숨을 멈 추고 긴 호흡으로 돌아보는 것. 누구나 쉽게 알고 있었던 지식에 대한 정의를 현대사회라는 이름속에서 우리는 가슴속에서 그 정의를 잃어버렸다. 머리로 알던 지식에서 더 나아가 현대사회는 눈 속에 각인된 지식을 강요하기에 흔히 말하는 지식은 이제 눈 언저리에만 머물게 된 현실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맛있게 보이는 햄버거 하나. 잠시 후 한장을 넘기면 몰디브의 해일이 다가온다. 아무런 생각없이 한끼의 행복을 위해 소비했던 햄버거 하나. 지식e는 그런 햄버거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소고기 100g을 얻기위해 우리는 1.5평의 숲을 내놓아야 했다. 내가 햄버거를 하나 먹는 동안 이상기후, 기후변화협약, 육식과 환경이라는 우리의 삶과 관련된 지식들은 햄버거와 함께 의미없이 소화된다. 성찰하지 않는 한. 그리고 열대림파괴 → 육우사육 → 햄버거 생산이라는 햄버거 커넥션의 고리는 끊이지 않는다.

모든 국민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가진다. 헌법 14조

안정된 월급 제대로 받는 나의 삶에선 전세금이 문제일 뿐 전세금만 맞는다면 어느 곳이나 이사갈 수 있다. 나는 그 모든 국민에 속하니까. 2003년 청계천 일대의 노점상 900여명은 8,000여명의 경찰, 용역직원, 서울시직원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리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출간 28년만에 200쇄를 기록했다. "억압의 시대를 기록한 이 소설이 아직도 이 땅에서 읽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30여 년 전의 불행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개발독재사회가 아닌 2003년에도 청계천 노점상들은 헌번 14조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국민에 속하지 않으니까

200년 전 서양에서는 '유인원 비너스'라는 한 아프리카 여성의 전시회가 열렸다. 사라 바트만, 그녀의 이름 사끼 바트만은 한 유럽인의 손에 이끌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왔다. 벌거벗긴 구경꺼리가 된 그녀의 인생은 야생동물흥행사의 손에 넘겨졌다가 질병과 매춘, 알코올 중독속에서 숨져갔다. 숨이 멈췄다고 그녀의 고통이 끝난 것은 아니다. 죽음의 그 순간 부터 "인간이 멈추고 동물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몸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2002년에야 고향을 받은 그녀의 시신. 이 일은 과연 200여년전의 일일까? 우스꽝스럽다면서 보여지는 문명화되지 않은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200여년 전 사라 바트만을 보는 그런 시선과 무엇이 다를까?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던 많은 역사와 뉴스, 그리고 현재. 그와 관련된 진실들은 햄버거속의 양파, 양배추처럼 의미없이 소화되어 버린 현대의 지식사회. 우리는 그 성찰하는 힘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성찰이라는 것은 한낱 유행이 떨어진 구시대적 지식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참 지식이라는 것. 앎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지식e는 조용히 보여준다. 이제 다시금 성찰하는 그래서 참 지식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오늘 또 지식e는 가만히 사진 한장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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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빠 2008-06-09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e>에 관한 설문조사로 도움을 받고 싶은데요
http://blog.naver.com/image2two 에 오셔서
내용을 확인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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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상황이 약간 나아진 편이에요. 이번 주에는 아이들 29명만 잃었어요". 이게 무슨 말인가? 1985년 1월 에티오피아의 아고르다드 난민캠프.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민캠프를 찾은 난민들은 간호사 앞에서 선별작업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선별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죽어야 했다. 이게 무슨 난민캠프란 말인가?

또 다른 난민캠프, 손목의 비닐밴드를 차고 있는 난민들은 식량을 배급받고 있지만 밴드가 없는 살마들, 주로 약한 어린아이들은 그대로 죽음만이 드리운 곳으로 돌아서야 했다. 난민들을 구하러 간 간호사들, 그들은 왜 사람들을 구별해야 도운 것일까? 왜 나머지 아이들을 죽음의 구덩이로 돌려보낸 것일까?

난민캠프에 있는 식량과 의약품은 난민 모두의 생명을 구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 더 살 가망이 큰 사람들을 위주로 구호활동을 펼쳤다. 왜 현실은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던 칠레는 1970년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그는 곧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제공하기로 한다. 남미 다른 나라들의 영향을 두려워 한 네슬레는 네슬레(칠레의 농장을 장악한)가 협력을 거부하고 곧이어 미국 정부와 네슬레를 축으로 한 다국적기업에 의해 고립된다. 그리고 아옌데는 CIA와 결탁한 군부에 의해 사살되고 칠레의 어린이들은 다시금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빠져들었다.

책에서 보여준 아옌데와 아프리카의 상카라의 사례는 스스로 배고픔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세계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광고의 모습과는 다른 다국적기업과 선진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힘들다면 유엔 등 국제기구는 무엇을 하고 있나? 앞에서 보여준 예와 같이 기아를 벗어날수 있는 식량은 제한되어 있다. 그나마 획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그 혜택을 볼 수 있다.

농업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인해 생산되는 식량은 비약적으로 증대하였다. 120억의 인구가 먹고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왜 한쪽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며 하루에 10만 명이  죽어가는 것일까? 한쪽에서는 안정적인 농산물의 가격을 위해 폐기한다. 다른 한쪽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연간 50만톤의 곡물이 소의 사료로 쓰인다. 그리고 미국의 시카고에서는 곡물이 거래되는데 그들에게 곡물은 금융상품의 하나일 뿐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의 구매능력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많은 어린아이들이 기아에 죽어가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가축의 사료로 사용된다.  

이런 가슴 아픈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지은이는 바로 사회구조를 지적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이 살인적인 사회구조.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기에 결국 우리 자신의 손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 경제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153쪽)

책을 읽으면서 북한 문제가 언급되어 있어 보다 친숙하게 다가왔다. 이는 나와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비록 휴전선이지만 우리와 땅을 맞대고 살고 있는 같은 민족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세계11대 경제대국이다. 그러나 기아를 해결하는 노력을 하는 나라에 우리나라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책을 읽고 하나의 질문이 나의 양심을 괴롭힌다. 나는? 지은이가 지적한바와 같이 기아의 현실을 아는 지식위에 침묵의 외투를 입을 것인가?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작은 돈이나마 후원을 하며 도울 있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그런 삶의 모습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가진 죄스러움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고 싶다. 지은이가 아들에게 들려주었던 것 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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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29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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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강렬한 호랑이 한마리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책 꽂이에 꽂혀있던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손길을 주기가 쉽지 않았다. 이유는 바로 그 안에 들어있는 비결들을 내가 너무 값없이 받아들이게 될 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한국미의 성찬을 단순히 결혼식 부페 음식 먹듯 만족할까봐 염려스러웠다. 그러던 중 오주석 선생의 별세소식을 들었다. 물론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통해 그 분의 가르침을 받았었지만 이제는 죄스러움이 그를 대신했다.

문화예술을 즐기기 위해 발품을 팔던 나에게 어느 때 부터인지 한가지 물음표가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우리문화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나는 과연 우리나라의 미가 중국, 일본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대목에서 나는 꽉 막혀버렸다. 물론 이것은 나의 잘못만은 아니다. 일제시대를 거쳐 우리문화는 난도질 당했고, 선생이 지적하던 바와 같이 조선의 그림이 일본식 표구에 달려 그 참 맛을 잃어버리듯 의미를 잃어버렸다. 또한 12년 그리고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누구하나 나에게 우리문화의 참맛을 전해준 사람은 없었다. 단순히 '우리 것이 좋은것이여' 라는 구호 하나면 그만이다.  

화려한 신라의 금관이나 씩씩한 고구려의 사신도, 신비로운 고려청자의 빛과는 달리 어딘가 모잘라 보이는 조선의 문화들. 자랑스럽게 문화를 생각하던 나는 항상 조선의 백자 등을 보면 잠시 쉴 곳을 찾았다. 단순히 소박미라고 에둘러 생각해보았지만 소박미라는 게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은 바로 그 머뭇거림의 올가미를 벗겨준 책 이다. 한국의 미에 대한 눈을 틔워주는 바로 그런 책이다. 왜 그동안 우리는 조상들의 문화를 줄을 늘어서 돌아보곤 곧 '어 별로 볼 것 없어'라고 말해던 것일까? 우리 조상들의 문화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고, 보는 눈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의를 옮긴 이 책은 그래서인지 쉽게 우리문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작품 대각선의 1 내지 1.5배 거리를 두고 둘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또 오른편 위에서 왼편 아래로 쓸어내리듯이 셋째, 마음을 열고 찬찬히 바라보는 것이다. 작품과의 거리가 작품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은 직접 작품앞에서 해야 겠지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내리는 것은 쉽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서양식이 익숙해져버려 무의식중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림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주석 선생의 설명을 통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 읽으니 경이로운 조상의 멋스러움이 얼추 느껴졌다. 씨름도와 같은 풍속화 뿐만 아니라 기로세련계도와 같은 그림에서 왠지 모를 안정감과 여유와 미의 맛깔스러움을 얼핏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주상관매도와 마상청매도는 책에 담겨있는 그림만을 볼 뿐인데도 자연스레 시선이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가며 여백이 빈 공간이 아니라 여백으로 채워진 공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우리그림의 맛은 여백을 넘어 송하맹호도의 표현에 까지 이르런다. 실바늘 같은 선들로 이루어진 세부적인 호랑이이의 얼굴, 그림 앞에서 쉽게 넘어갔던 예전의 발걸음이 죄스러워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보이지 않는 곳까지 펼쳐진 이 세심함이 그림의 참 맛을 전해준 원동력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문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재, 체제공, 강세황의 초상화 역시 그 세심한 표현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모나리자나 렘브란트의 초상화로만 가로새겨진 우리의 인식을 깨뜨린다. 눈가의 작은 검버섯까지도 표현했던 조상들의 표현력은 극사실주의의 극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조상들의 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상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저자는 역설한다. 천지인 등 조상들의 사상, 주역이 바탕이 된 사상으로 하늘로 뻗은 탑의 층은 홀수, 땅과 연결된 부분의 면은 짝수 면을 갖췄던 것은 탑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할 것이다.

물론 이런 미를 제대로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문화의 상당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일제시대에 빼앗겼고, 일제시대와 격동의 현대사를 보내며 우리조상의 멋은 일제와 서양의 것에 씌워 볼 것 없고, 촌스러움이 되어 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이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선생은 우리에게 숙제를 던져준다. 이제 곧 박물관에 가서 작품의 1내지 1.5배 거리에서 마음을 열고 작품을 보는 것을 해 보라고.

유홍준은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명쾌한 지적을 하였다. 맞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리고 선생의 말처럼 마음을 열어야 작품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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