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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래도 상황이 약간 나아진 편이에요. 이번 주에는 아이들 29명만 잃었어요". 이게 무슨 말인가? 1985년 1월 에티오피아의 아고르다드 난민캠프.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민캠프를 찾은 난민들은 간호사 앞에서 선별작업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선별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죽어야 했다. 이게 무슨 난민캠프란 말인가?
또 다른 난민캠프, 손목의 비닐밴드를 차고 있는 난민들은 식량을 배급받고 있지만 밴드가 없는 살마들, 주로 약한 어린아이들은 그대로 죽음만이 드리운 곳으로 돌아서야 했다. 난민들을 구하러 간 간호사들, 그들은 왜 사람들을 구별해야 도운 것일까? 왜 나머지 아이들을 죽음의 구덩이로 돌려보낸 것일까?
난민캠프에 있는 식량과 의약품은 난민 모두의 생명을 구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 더 살 가망이 큰 사람들을 위주로 구호활동을 펼쳤다. 왜 현실은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던 칠레는 1970년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그는 곧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제공하기로 한다. 남미 다른 나라들의 영향을 두려워 한 네슬레는 네슬레(칠레의 농장을 장악한)가 협력을 거부하고 곧이어 미국 정부와 네슬레를 축으로 한 다국적기업에 의해 고립된다. 그리고 아옌데는 CIA와 결탁한 군부에 의해 사살되고 칠레의 어린이들은 다시금 영양실조와 배고픔에 빠져들었다.
책에서 보여준 아옌데와 아프리카의 상카라의 사례는 스스로 배고픔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세계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광고의 모습과는 다른 다국적기업과 선진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힘들다면 유엔 등 국제기구는 무엇을 하고 있나? 앞에서 보여준 예와 같이 기아를 벗어날수 있는 식량은 제한되어 있다. 그나마 획복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그 혜택을 볼 수 있다.
농업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인해 생산되는 식량은 비약적으로 증대하였다. 120억의 인구가 먹고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왜 한쪽에서는 기아에 허덕이며 하루에 10만 명이 죽어가는 것일까? 한쪽에서는 안정적인 농산물의 가격을 위해 폐기한다. 다른 한쪽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연간 50만톤의 곡물이 소의 사료로 쓰인다. 그리고 미국의 시카고에서는 곡물이 거래되는데 그들에게 곡물은 금융상품의 하나일 뿐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의 구매능력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많은 어린아이들이 기아에 죽어가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가축의 사료로 사용된다.
이런 가슴 아픈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지은이는 바로 사회구조를 지적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이 살인적인 사회구조.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기에 결국 우리 자신의 손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 경제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153쪽)
책을 읽으면서 북한 문제가 언급되어 있어 보다 친숙하게 다가왔다. 이는 나와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비록 휴전선이지만 우리와 땅을 맞대고 살고 있는 같은 민족이 처한 현실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세계11대 경제대국이다. 그러나 기아를 해결하는 노력을 하는 나라에 우리나라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책을 읽고 하나의 질문이 나의 양심을 괴롭힌다. 나는? 지은이가 지적한바와 같이 기아의 현실을 아는 지식위에 침묵의 외투를 입을 것인가?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작은 돈이나마 후원을 하며 도울 있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그런 삶의 모습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가진 죄스러움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고 싶다. 지은이가 아들에게 들려주었던 것 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