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멈추고




그 나무를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 년 후의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서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은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 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나희덕 詩



john clang - surface,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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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4-12-21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 여자는 저기서 자는건가요?

누가 오는걸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나....?

mira95 2004-12-21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희덕 시 좋아요.. 저 그림도 마음에 들고요.. 퍼가요^^

잉크냄새 2004-12-2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자세가 왜 저리도 편안해보일까요...^^

플레져 2004-12-22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날 나무 위를 향해 베개 들고 가는 여인을 보신다면...저 인줄 아셔요 ^^;;

비로그인 2004-12-22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플레져 2004-12-22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님, 놀라셨어요? ㅎㅎ
 

 

탈수 오 분간

 

세탁기가 아귀 맞지 않은 구석으로
가늘게 떨며 부딪쳐 왔다
자폐증 환자처럼 벽에 머리를 찧는 것은
내 안 엉킨 것들이 한없이 원심력을 얻기 때문,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편지는 보풀이 되어
온 빨래에 들러붙었을 것이다 번진 마스카라,
흐느끼는 그녀를 안고 있을 때도 그랬다
어깨며 등 떨리는 오 분간, 상처는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인지
세탁기는 중심에서 울음을 비워내고서야
멈췄다, 멈출 수가 있었다
티셔츠 끝에 바지가, 남방이 엉켜 나왔다
탁탁탁! 풀어내며 언젠가 가졌던 집착도
이 빨래와 같았을까
건조대에 빨래를 가지런히 널다가
조금씩 헤져 가거나 바래가는 게
너이거나 나이거나 세상 오 분간이라는 것
햇살 아래 서서 나는, 한참동안
젖어 있는 것을 생각했다

詩 : 윤성택  美 : LauriBlank -  Wi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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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95 2004-12-17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림이 마음에 들어요^^ 이거 퍼가요~~

날개 2004-12-1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별로 안즐기는데... 이 시는 뭔가 확 와닿는군요..^^*

플레져 2004-12-17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라님, 저주 저 쥐어짜는 듯한 그림이 좋아요 ^^

날개님, 저런 시를 쓰는 사람... 부러워요 ^^

sooninara 2004-12-17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줌마에게 팍팍 느낌을 주는 시로군요..탈수 끝나고 엉킨 빨래 털려면..

정말 힘든데..그것이 집착이었구나..

플레져 2004-12-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엉킨 빨래 털때 집착도 털어져버렸으면 좋겠어요... 님, 말씀 들으니 저두 고개가 끄덕끄덕...^^

로드무비 2004-12-17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좀 사람이 삐딱해서 콩나물을 다듬으며 깨닫는 시, 그리고 이런 것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데 조금 좋군요.(무슨 말이댜?)^^

잉크냄새 2004-12-17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어려운 싯구보다는 이 시처럼 소소한 일상에서 건져올린 글귀들이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플레져 2004-12-17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전 그냥 제 맘에 드는 걸 좋아하나봐요. 흠흠...^^
 

가을비 - 가을철에 지적지적 내리는 비

가을장마 - 가을철에 여러 날 쉬지 않고 내리는 비

건들장마 - 초가을에 비가 오다 말다 하는 장마

궂은비 - 끄느름하게(날이 흐리고 어둠침침) 오랫동안 내리는 비

그믐치 - 음력 그믐께에 비나 눈이 옴, 또는 그때의 비나 눈

낙종물 - 못자리를 만들 무렵에 맞추어 오는 비

는개 -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늦장마 - 제철이 지나서 지는 장마

단비 - 꼭 필요한 때 알맞게 내리는 비

먼지잼 - 겨우 먼지가 날리지 않은 정도로 비가 조금 오는 것.

모종비 - 모종하기에 알맞게 내리는 비

목비 - 모낼 무렵에 한목 오는 비

못비 - 모를 낼 만큼 흡족하게오는 비

보름치 - 음력 보름께에 비나 눈이 오는 날씨

보슬비 - 바람없이 조용하게 내리는 가랑비 (큰) 부슬비

복물 - 복날 또는 그 무렵에 내리는 비

봄비 - 봄에 내리는 비

봄장마 - 봄철에 여러 날 계속해서 오는 비

비꽃 -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성기게 떨어지는 빗방울

비안개 - 비가 쏟아질 때 안개처럼 부옇게 흐려보이는 현상

산돌림 - 산기슭으로 내리는 소나기,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한 줄기씩 쏟아지는 소나기

약비 - 약기 되는 비라는 뜻. 꼭 필요한 때에; 내리는 비를 일컫는 말

양성 장미 - 집중 호우와 같은 소나기성의 장마.

억수 -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억수 장미 - 여러날 동안 억수로 내리는 장마.

웃비 - 우기는 가시지 않았으나, 좍좍 내리다가 그친 비

음성장마 - 궂은비가 오랫동안 계속되는 장마.

작달비 - 굵고 거세게 내리는 비

장맛비 - 장마 때 내리는 비 (장마비가 아님)

진눈깨비 - 비가 섞여 내리는 눈

찬비 - 차가운 비

칠석물 - 칠석날에 오는 비 (예:칠석물이 지다)

큰비 - 여러날 동안 계속해서 내리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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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2-13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옷, 정말 멋지군요. 퍼갑니다.

어룸 2004-12-1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두 퍼갈래요^ㅂ^

2004-12-1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지잼의 어원이 무얼까 궁금하군요...이렇게 많은 종류의 비 이름이..있었다니 아이들에게도 보여 주어야 겠네요.^^

진/우맘 2004-12-13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지잼이라니....ㅎㅎㅎ 먼지로 만든 잼을 떠올렸잖아요.^^;;

플레져 2004-12-13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 님들께 사랑 많이 받는 페이퍼, 너무 좋아요! ^^ 감사합니다, 조선인님, 투풀님, 참나님, 진/우맘님, 새벽별님...ㅋㅋ

로드무비 2004-12-13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빠질 수 없죠.^^

ㅊㅊ

플레져 2004-12-13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로드무비님~ ^^

urblue 2004-12-13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마의 유래랍니다.

함경도 갑산의 처녀들은 장마가 짧으면 마(麻, 삼)의 대를 잡고 흔들면서 눈물을 지었답니다. 장마가 짧으면 마가 덜 자라서 흉마(凶麻)가 되기 때문에, 삼베 몇 필에 오랑캐에게 팔려갈 우려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처녀들은 울면서, "마야, 어서 자라다오"라고 울부짖었는데, 여기서 장마(長麻)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답니다.

숨은아이 2004-12-13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댓글까지 같이 퍼가요. ^^

플레져 2004-12-1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블루님~ 몰라서 그냥 지나친 걸 어찌 아시공...ㅋㅋ 고마워요, 추천하고 싶당 ^^

숨은아이님... 잘 하셨어요~ ^^

날개 2004-12-13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거 처음 알았습니다..

건들장마라니.. 건들건들 하는 건달같은 장마란 뜻일까요..?ㅋㅋ

는개.. 이것도 이름 예쁘네요..^^* 저도 추천할께요..

잉크냄새 2004-12-13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꽃, 비안개, 산돌림....참 멋진 비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얀마녀 2004-12-13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말들이 있다는걸 왜 모르고 살았을까 싶네요.

플레져 2004-12-13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건달같은 장마~~ 아, 멋진 표현이어요! 뒀다 써먹을까부당...^^;;

잉크냄새님, 비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요. 소리와 모양과 시기에 따른... 그 말을 이제부터라도 잘 외우자구요, 하얀마녀님 ^^

내가없는 이 안 2004-12-14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저도 뒤늦게 퍼가요! 추천도 하고. ^^

플레져 2004-12-15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안님~ ^^
 



선천성 그리움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 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詩 : 함민복

美 : 멸치장수 할머니 - 김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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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2-10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내 심장을 포갤수 없어서 그토록 그리워하는군요.

2004-12-1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4-12-10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장을 포갤 수 없는 그리움....

후...~

hanicare 2004-12-10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의 마티에르가 할머니의 주름살처럼 인상적이네요. 그리움이 늙으면 멸치장수할머니의 담배연기처럼 달고도 구수한 휴식이 되려나.

플레져 2004-12-1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가만히 저 시를 읊조리던 어젯밤, 심장을 포갤 수 없다는 것이 무지 서글퍼졌습니다. 그런데 왜 심장은 포개려고 그러는건가 싶었죠...체셔고양이님도 그 부분에 반하셨군요? ㅎㅎ 하니님, 너무 거친 그림같아서 올리지 않을까 했는데, 볼수록 또 당기더군요. 심장을 포갤 수 없는 그리움 처럼....

비연 2004-12-1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시군요...퍼감다..

플레져 2004-12-10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눼, 비연님 ^^

2004-12-10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유 Liberte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각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 위에
일상의 흰 빵 위에
약혼 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하늘빛 옷자락 위에
태양이 녹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풍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멋없는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살포시 깨어난 오솔길 위에
곧게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켜진 램프 위에
불꺼진 램프 위에
모여 앉은 나의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나의 방 위에
빈 조개 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나의 강아지 위에
그의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의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된 불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균형잡힌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窓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초월한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대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自由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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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2-0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르니카 보구서 엘뤼아르 시집 사려고 보관함에 담았답니다.

2004-12-07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2-07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2-07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추천하고 퍼갑니다.

이 시 너무 좋죠?

저 사진도요.^^

플레져 2004-12-07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블루님 따라해야쥐~ ^^

로드무비님, 저두요 저두요~~ 헤...제가 올려놓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