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는 시간
이관염을 앓고 있다. 귀와 코를 연결하는 관에 염증이 생긴건데 꽤 불편하다. 이비인후과에서 처방한 약이 있지만 별 소용이 없다. 의사샘은 신경쓰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한다. 시간이 흘러야 낫는다고, 예민하게 신경쓰면 빨리 회복되지 않을거라고. 신경쓰지 않기로 했지만 일상의 습관들이 작은 충돌을 일으켜 이관염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이관염 증세가 있는 왼쪽 귀를 포함한 신체 왼쪽 부위가 말썽이다. 멍 때리는 증상이 심해졌고 단어도 퍼뜩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혹 치매 초기 증상인가 싶어 검색도 해봤다.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야호, 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메아리라고 하질않나... 커피를 마시러 전기포트 근처에 갔다가 보리차 한잔만 마시고 오는가하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 반납연기 신청을 하러 노트북을 켰는데 그것만 빼고! 엉뚱한 놀음만 하고 나오기 일쑤. 일주일째 나는 고장난 못난이 인형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서머싯 몸이 쓴 작가들의 이야기다. 제인 오스틴, 허먼 멜빌, 발자크, 스탕달, 브론테, 오스카 와일드.... 그들의 짤막한 전기와 함께 작품이야기를 썼는데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조미료 없어도 맛있는 진국을 먹는 기분이다. 서머싯 몸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작가가 어떤 인물인지 알면 독자들이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31쪽
오래 전 멋진 이야기를 쓴 작가들이어서 왠지 그들이 보통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보다는 그 자체로 위대한, 뛰어난, 불멸의 투사 같은 인상이 있었다. 작가들은 자기의 생을 열심히 살아간 보통의 사람들이었다고, 서머싯 몸은 말한다. 뮤지컬 극작가인 오은희씨는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5시? )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글을 쓴다고 했다. 98년쯤... 오은희씨의 뮤지컬이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작가이기전에 일상을 꾸려가는 생활인이라는 걸 강조하는 소박한 인터뷰가 간혹 떠오르는데 이 책에서도 작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자기의 삶을 다해 사랑한다. 만약 그들이 미지의 독자들을 위해,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쓴 글이라면 지금까지 명작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 당대의 이야기에 충실한 생활인의 자세에서 명작은 탄생한다.
제인 오스틴은 평생 독신이었는데 정신적 지주였던 언니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날에는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았다.
입에서 나오는 말을 종이에 그대로 옮겨 표현하는 게 편지 쓰기의 참된 기술이라고 늘 들어왔지만, 나는 이제야 겨우 그것을 습득했어. 이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언니에게 직접 말하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써내려왔어 - 80쪽
제인 오스틴과 그녀의 언니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한 장 한 장 페이지 넘기는 게 아까웠다. 스탕달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사다리까지 타고 밀담한 이야기나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의 아이들을 귀찮아하고 이모에게 키우게 한 이기적인 심성도 엿볼 수 있다.
지난달 (아! 벌써 5월이 갔다) 엔 40여통의 손편지를 썼다. 오래 교우한 이들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였는데 손편지를 받은 그들이 무척 좋아해주었다. 감동을 주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은 그것 밖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뜻밖에 고마워하고 좋아라해주었던 그들이 참 고맙다. 6월에도 틈틈이 손편지를 쓰는 달이 될 것 같다. 미국에 사는 선배 역시 손편지에 대한 감동을 밝혔는데 너무 흥분되어 간단한 메일을 보내왔다. 선배와는 종종 메일을 주고 받는데 그에게서 받은 메일 중 가장 짧은 메일이었다. 그의 감동이 고스란히 느껴져 내가 더 위안을 받았다.
아껴읽고 있는 책이다. 아껴 먹는 것만큼 빨리 읽게 될까봐 조바심이 나는데 다행이 이 책은 아껴 읽으려 하지 않아도 느리게 읽게 된다. 지은이의 섬세한 관찰과 스케치, 책에서 만나는 아주 작은 폰트까지 뭐 하나 버릴 게 없다. 서울을 샅샅이 뒤져가며 쓰고 그린 책이다. 경복궁, 종로, 광화문등 서울을 누빈다. 서울. 서울을 떠나기 전엔 정말 몰랐는데 서울을 떠나온 뒤로 나는 아주 많이 그리워하는 도시가 서울이 되었다. 요즘에도 한 달에 서너번 이상은 가지만 갈 때마다 가슴이 찡하다. 나의 모든 걸 여기 다 두고 왔다는 생각에 화창한 서울의 날씨에서도 울적할 때가 더러 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라는 얘기를 지치지 않게 하는 친구들에게 요즘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움도 사랑이야. 꽤 멋부린 것 같지만 은연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서울을 떠나면서 내게 생긴 버릇 중에 하나는 비가 올 것 같은 날엔 꼭 우산을 챙긴다는 거다. 강우 확률 10% 라 할지라도 서울 가는 날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가방에 우산부터 챙긴다. 집을 멀리 떠나온 것도 서러운데 비까지 맞으면 더 처량할 것 같아서다.
서울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긴 하지만 딱히 서울로 한정짓지 않아도 될, 도시가 배경인 소설들이 묶여있다. <서울 시간을 기억하는 공간>은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가 정서적 시선의 서울을 그렸다면, 서울의 역사를 훑는 책이다. 딱딱한 인상은 있지만 서울이라는 땅에 세워졌던 무수한 공간, 건물 탐사가 인상적이다.
서울이 고향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고향의 흥취를 느끼지 못한다는 친구가 있었다. 그의 말에 수긍한다. 서울은 고향의 느낌 보다는 수락과 거절이 선명한 도시다. 오는 사람 안 막고 떠나는 사람 안 막는 도시. 톨스토이는 불행한 사람이 살기에는 도시가 낫다고 말했다. 끄덕끄덕... 하지만! 하고 외치고 싶지만 달리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이 살기에는 도시가 낫습니다.
도시에서는 이웃 사람이 사망한지 오래되어서 부패해도 아무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마다 공무, 대인관계, 건강, 예술, 아이들 교육에 신경쓰느라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고 항상 바쁘지요. 가끔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맞이해야 하고 이런 저런 사람을 방문해야 합니다. 또 이런 저런 것을 보고 들어야만 합니다. 사실 도시에는 어떤 상황에서든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두 세명의 저명인사가 있기 마련이지요. 자기 자신도 돌보기 바쁜 마당에 선생, 가정교사, 여자 가정교사 등 이런 저런 사람에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생활 자체가 공허해질 수밖에요.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아가면서 같이 사는데서 오는 고통을 덜 느꼈습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살고 있는 주인공의 말이다.
오전에 이비인후과에 다녀온 후 <제5도살장>을 읽었다. 독서를 눈과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귀로도 한다는 걸 알았다. 오른쪽 귀가 읽은 것을 왼쪽 귀가 흡수하지 못해 수많은 활자들이 왼쪽 귀 달팽이관에 고여있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꽤 슬프다. 커트 보네거트의 글이 블랙 유머로 정평이 나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진짜 까만 웃음만 주는 역설이랄까. 웃긴데 슬프다. 글도 내 귀도. 귀에 염증이 생기면 독서도 힘들다.
파트릭 모디아노 읽는 여자! 라고 말하는 게 난 참 좋았다. <신원 미상의 여자>를 비롯한 크라상 처럼 뭔지 모르게 후딱~ 지나간 혹은 사라진 세련된 맛의 소설이니까. <슬픈 빌라>는 현재, 과거, 환상과 현실이 겹쳐져 있다. 염증을 앓고 있는 내 귀처럼 시간의 치유가 필요한 인물들이 우후죽순 떨어진다. 모디아노의 인물들이 내 왼쪽 귀 달팽이관에 우산 쓰고 서 있다. 처량맞게스리.
<택시>는 내 좋은 친구에게도 선물하고 나도 한 권 샀다. 상을 받아도 될 만큼 택시를 많이 타는 택시광 작가 할레드 알하미시. 그가 만난 이집트 카이로 택시 운전기사와 나눈 이야기들이 콩트처럼 엮여있다. 짧고 담백하고 깊다. 사회, 정치적 비판자인 택시 운전기사들의 시선은 유쾌하고 슬프다. (또! 슬프다. 오늘 참 많이 슬프고 계속 슬프다 ㅠㅠ)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짧게 읽고 깊이 생각하게 하는 참 좋은 소설.
동네에 여름꽃들이 활짝 피었다. 쪽빛 보라색 붓꽃 천지였다가 노란 금계국이 진을 치기 시작했다. 한쪽에선 개망초꽃밭도 예쁜 아가씨 아사 원피스처럼 피어나고 있다. 바야흐로 6월이 왔다. 여름을 많이 타는 내게 6월은 선물같다. 아주 맑은 아침의 시간같은 6월을 부지런히 산책해야겠다.
움직이는 여름
우리 동네 수변공원에 핀 금계국-
붓꽃 (창포)
풀꽃반지 장만! 어디서?
<잔디당> 이라고... 우리 동네 들판에서 ^^;;
모든 봉오리 진 꽃은 아름답다. 여름이다. 여름을 한번도 치유하는 시간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덥고 짜증나는 계절, 빨리 빨리 가버렸으면 좋을 계절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맞이한 6월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고여있는 물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뜬금없는 다짐을 하고 싶어졌다. 계속 흐를 수 있도록, 야금야금... 움직이는 여름이 되기를. 모두에게,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