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작, 시스터를 보았다. 레아 세이두를 보려고....힛.

 

12세 소년 시몽은 스키장에서 스키와 스키 악세사리등을 훔치는 능숙한 도둑이다. 시몽은 훔친 물건을 동네 아이들과 리조트에 잠시 일하러 온 제 3세계의 노동자들에게 판다.시몽의 고객들은 물건의 출처를 알면서도 모른체 넘어간다. 시몽의 누나 루이는 시몽에게 용돈을 받아 쓰고 내키는대로 일을 관두고 남자를 만나고 가출했다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시몽은 루이에게 외려 용돈을 주고 그저 돌아와주기만을 바란다. 누나 루이는 시몽의 고객들처럼 시몽이 도둑질을 한다는 걸 알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만, 씁쓸하게 웃거나 웃지 않을 뿐이다. 시몽의 도둑질은 과감하고 리조트의 관리는 허술하다. 시몽과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은 시몽을 방관할 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몽의 세상은 더 쓸쓸하다. 누군가 나의 잘못을 크게 꾸짖어주지 않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나를 더 슬프게 하고 외롭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몽이 훔치고 팔고를 반복하던 끝에 겨울이 끝나가고 스키 시즌은 끝이 난다. 파장이다. 그제야 시몽의 외로움이 드러난다.

 

스키장에서 일하던 사람들, 휴가 온 사람들이 모두 떠났을 때 시몽은 외로움을 느낀다. 12세 소년이 지나치게 늙어 보인다. 인생을 본의아니게 오래 살아버린 노인처럼, 폐허가 된 도시에 나타난 리플리처럼, 종말의 끝에 혼자 살아남은 지구인처럼 시몽은 외롭고 혼자다. 그동안 시몽이 저지른 범죄들이 이해될 것만 같다. 시몽에게 도둑질이란 또래의 소년들처럼 친구와 가족과 놀이를 즐기는 시간이었던 것만 같은 것이다. 시몽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면 시간을 때울 수 없었고, 그것은 곧 가족이 있지만 없는 것과 같은 자신의 처지를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들켰을 테니까. 남의 물건을 훔치는 시몽에게는 거짓말도 자연스럽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스키장에 온 영국 부인에게 시몽은 자신의 부모가 아주 큰 호텔을 경영하고 있다며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고 그들의 식사 값을 치루려 선뜻 지폐를 꺼내는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그순간의 시몽은 소년이면서 부인의 가정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빈 옆자리를 차지하려는 성인 남자같다. 시몽은 왜, 열두살 소년의 보통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

 

시몽의 물건을 구입하는 어린아이들은 시몽이 스키도 무척 잘 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몽은 일(=훔치기)하는데만 열중하며 스키는 탈 줄 모른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시몽이 할 줄 모르는 것은 그뿐이 아니다. 시몽은 물건 훔치기에만 능숙하지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데 서툴다. 누나 루이에게 큰소리 치며 청바지 하나 사입으라고 베풀지만 누나는 시몽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늘 씁쓸하게, 불편하게만 바라본다. 거기에 두 사람의 비밀이 있다. 루이는 시몽의 진짜 누나일까? 시몽은 루이의 진짜 동생일까?

 

사람의 마음은 무척 정직하다. 사랑이나 정은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초 단위로, 분 단위로 차곡차곡 쌓이고 오고 가고 주고 받으며 학습되며 자라난다. 그런 과정은 가족이라는 단위에 속해있을때 배울 수 있다는 건 자명한 일. 시몽이 영국부인에게 진심으로 대하지만 그 진심은 나이에 맞지 않은 행동이고, 시몽 또한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단, 훔친 물건을 판 돈으로 누나의 환심을 샀던 것처럼 돈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에 시몽은 영국 부인에게 진심을 베풀었지만 영국부인에겐 그저 자신의 가족을 잠시 도와준, 그러나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소년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시몽의 도둑질이 발각되어 스키장 출입이 금지되었을 때, 시몽은 고속도로 히치하이커로 변신하여 최선을 다해 또 훔친 물건을 판다. 어린 시몽은 왜 그토록 최선을 다해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차라리 보통의 소년 도둑처럼 물건을 판 돈으로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쓴다면 속이라도 시원했을까. 시몽에게 루이는 그리운 모성, 그리운 가족이다. 시몽은 자신이 보통의 아이들이 부모의 축복아래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사랑을 얻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소년은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과 바꿔서라도 괜찮은 가족의 구성원이고 싶었을 것이다. 심지어 시몽의 고객들은 자신의 가족에게 선물하기 위해 시몽의 훔친 물건을 기꺼이 산다. 그때의 시몽의 마음은 어땠을까. 시몽이 누나 루이에게 같이 자게 해달라며 돈을 지불하는 장면에서 그 마음은 들통난다. 누나의 배에 머리를 대고 누운 시몽은 그제야 어린 열두살 소년의 표정으로, 따뜻한 가족이 있는 소년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에 기꺼이 다가가고 마음을 사려했던 시몽에게 <빌리 엘리어트>의 가족이 있었다면, 또 하나의 빌리 엘리어트가 탄생했으리라. 열 두살 소년에게도 고독은 고독이고 외로움은 외로움인 것이다. 아마 어른의 고독보다 더 무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나태한 어른들보단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고독과 처지를 헤쳐나가려 하는 면면은 가히 서럽고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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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이가 은사님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나도 은사님께 느꼈던 바를 어떤이는 정갈하게 다정하게 적었다. 어떤이의 글에 비친 은사님은 청년이다. 오늘은 꼭 안부 전화를 먼저 드려야겠다.

지난 여름, 은사님은 여행을 하시던 중 내게 문자를 보냈다. 제자의 안부를 묻는 은사님의 바다가 그 깊은 연륜이 평화로워서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윗사람에 대한 공경심과 어려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공경심보다 어려움이 몇 배는 더 크다. 윗사람과 친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되도록이면 그분들과 거리를 두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은사님과 먼 곳에 앉아야 편하고, 은사님과 두 번 정도 눈을 마주치는 정도가 편하다. 그 후로 은사님의 문자를 두어번 더 받았다. 나는 먼저 문자하는 것조차 은사님을 방해하게 될까봐 꺼려하고 있었다. 좋은 뜻으로 말하자면 은사님의 시간에 나의 문자가 모난 조약돌이 될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말씀드려야 할 일은 메일을 보냈고, 간혹 전화를 드려야 할 상황에서는 바른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다보니 은사님과 전화 통화를 끊고 난 후엔 진땀이 나곤 했다. 지난 봄엔 은사님과 홍대앞 술집 노천에서 맥주를 마셨다. 은사님이 농담을 즐기고 (때로는 썰렁한 농담이었는데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제자들의 기를 세워주셨다. 그건 진짜 애정한다는 뜻이었다.  

문득, 은사님에게 혹은 윗사람들에게 나의 태도가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껏 마음을 열고 있는 사람에게, 두 팔을 벌린 사람에게 긴장하고 있는 태도는 예의 바름이 아니라 과잉 방어로 읽힐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시 어떤이가 쓴 은사님의 글을 읽는다. 은사님의 글도 읽는다. 거기에는 맑은 가을이 들어있다. 모카 브라운 느낌의 맑은 가을.
 



부디 - 심규선 (with 에피톤프로젝트)

오 부디 다시 한번나를 깨워
오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다시 나의 손을 잡아줘
이제 잡은 두 손을 다신 놓지마
제발


심규선에게 이런 고음이... 높고 화려한 계단이 있었다니. <선인장><꽃처럼 한철만 사랑해줄껀가요> 에서 들리던 음색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나는 파워 워킹을 하면서도 이 노래만 들었다. 아파트 로비를 통과할 때 오오- 부디-- 다시 한 번 나를 안고-- 오오- 제발- 지친 나를 일으켜줘 우리 사랑했었던 날들... 노랫말이 가슴에 팍 꽂혀 도미노처럼 손에 힘이 풀렸다. 엘리베이터를 놓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뉴욕, 홍대 카페를 탐험한 <카페 탐험가>는 자유롭다. 뉴욕에서 짧은 기간 체류하며 카페를 순례했던 저자는 카페에서 글을 쓰고 각자의 일을 돌보는 뉴요커들이 왜 카페에 모여드는지는 예측한다. 좁은 공동주택에서 룸메이트와 공간을 나눠 쓰는 불편함이 그 이유다. 소음과 불편함 때문에 그들은 카페에서 자신의 일을 돌본다. 미드 <드롭데드디바> 에서 로펌의 변호사 킴이 해고를 당한 후 노트북을 펼친 곳은 카페다. 킴의 주위에는 킴처럼 홀로 테이블에 앉아 작업하는 이들이 비쳤다. 그런 풍경은 우리 동네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담소하는 테이블과 일인 테이블이 공존하고 있다. 카페에 노트북 가방을 들고 들어가면 주인들은 '노트북 하기 좋은 자리'로 안내하니까. 소음 속에서 떠나는 나만의 시간은 묘미가 있다. 담소 테이블과 일인 테이블 사이에도 확실한 경계가 있다. 서로에게 방해되지도 방해하지도 않음. 우린 아주 개별적임.  

   
  커피가 단지 기호품 이상이 되면서, 카페에 가는 일도 일상이 되었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 카페에 간다는 건 옛말이 되어버렸다. 아픈 다리를 쉬기 위해 혹은 책을 읽기 위해 그리고 당연히 커피를 마시기 위해 우리는 카페로 간다. 카페는 단지 커피를 파는 곳이 아니다. 커피를 매개로 하여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공간이며 문화를 누리는 곳이다.

카페는 내가 누리고픈 공간인 동시에, 일상의 남루함이 파고들 여지가 없는 환상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일상'을 찾아 카페의 문을 여는 것이다.

<카페탐험가>
 
   

 

<생각의 일요일들>은 일과가 끝난 후 침대에 누워 읽었다. 스탠드 불빛과 라디오가 동행했다. <타인에게 말걸기> 라는 소설집을 갖고 있는 은희경은 이제서야 타인들에게, 독자들에게 육성으로 말을 걸어왔다. 커피, 이야기는 이 책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소품이다. 커피콩을 갈다...라는 행위로 작가는 하루를 열고 소설 작업을 시작한다. 어느날의 커피는 노동 후의 마무리로 일단락된다. 최근에 본 장면은 명절이었다. 며느리들은 온갖 일들을 다 끝낸 후 달달한 커피 믹스를 마셨다. 환경을 생각하며 아크릴 수세미와 천연 세제를 사용하지만, 커피를 마실 때만큼은 일회용컵을 사용한다. 그 순간만은 설거지에 대한 해방을 만끽해야 한다는 뜻으로.  

시애틀에서 쓴 작가의 글을 읽다가 <카페 탐험가>에서 읽은 구절을 떠올렸다. 시애틀은 흐린 날씨와 높은 강수량 덕분에 커피 소비가 많은 도시라고 한다. 그곳에서 커피 문화, 커피 전문점이 발생한 건 괜한 우연은 아닌 것이다.  

   
 

비가 많이 오는 도시. 
자살률도 가장 높지만 독서율도 최고랍니다.
삶의 양쪽 날을 생각해보게 되는 흐린 날이네요.  

<생각의 일요일들>

 
   

시애틀, 커피...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탕웨이, 현빈의 <만추> 마지막 장면. 여자의 앞에는 유리 머그잔에 가득 채운 커피가 있다. 유리 머그잔은 두툼하고 꽤 크다. 커피는 가득 찼다. 엔딩 크레딧에 그 커피의 존재를 올려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했던 건 그 커피의 존재감이 무지 컸기 때문이다. 아직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 에는 긴 기다림이 스며있다. 그가 올 것인지 오지 않을 것인지는 커피만이 알고 있다는 듯이.   

 

 
 좋아해  - 요조, 김진표.
 정말 좋아해 차가운 녹차맛 아이스크림  
 문득 떠나는 하루짜리 짧은 여행
 햇살 좋은 날 무심코 들어선 미술관
 그리고 너의 곁
 어떻게 지낼까 정신없이 살다가도
 거짓말처럼 보고싶고 그래
 너의 곁에선 하루가 참 짧았었는데
 기억하니  

요조의 음색은 가을 초입과 잘 어울린다. 이렇게 귀여운 노래를 부르며 가을로 들어간다. 가끔은 흥얼거린다. 오랜만에 노래 가사를 다 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우연치않게 들른 노래방에서, 아무도 작정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기어들어간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   

 

 저 잔에 담긴 물처럼 - 박솔

 저 잔에 담긴 물처럼 나 그렇게 내 안에 담겨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저 잔에 담긴 물처럼 나 그렇게 너의 안에 담겨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심규선의 노래처럼 멋진 고음이 있다. 한동안은 조용하고 나긋한, 읊조리는 노래가 참 좋았다. 목청껏 내질러주는 노래, 매미처럼 사력을 다해 부르는 노래, 마음껏 높고 화려한 계단을 올라가는 노래가 귀에 쏙 들어온다. 그래서 박솔의 노래는 깔끔하고 듣고 있으면 동작을 멈추고 어딘가를 멀리 바라보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가을이 깊어간다는 뜻이다.    

9월 19일 월요일 새벽 5시 55분,우리 동네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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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9-22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플레져님. 플레져님도 심규선을, 부디라고 말하는 그 음성을 들으셨군요!

플레져 2011-09-22 11:18   좋아요 0 | URL
들었어요!
음 이탈이 아닐까,
연극 배우의 진지한 방백처럼 들렸어요- ㅠㅠ

stella.K 2011-09-22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나도 윗사람을 어려워하긴 하는데
그분으로선 그게 또 부담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은 영이 있어서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안다잖아요.
플레져님은 저를
.
.
.
.
.
.
.
좋아하는 거 다 알아요.ㅋㅋ

플레져 2011-09-22 11:31   좋아요 0 | URL
오오- 들.켰.구나-ㅎㅎ

서툴러도, 실수해도 어려워하는 기색을 탈피해야겠어요.
또, 부담은 늘어만가고..:)

프레이야 2011-09-22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새벽하늘!!!
가을은 깊어갈 것이고 은사님에 대한 플레져님의 긴장은 조금씩 풀어지길 바래요.
(저도 사람에 대한 긴장을 잘 못 푸는 편이지만 그러다 느낌 받으면 난데없이 풀어져
속 다 보여버리는 헛똑똑이라지요.ㅎㅎ)

플레져 2011-09-22 20:10   좋아요 0 | URL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셔서..내일 다시 해야겠어요 ㅎㅎ 여전히 긴장은 바짝 조인 벨트처럼 풀어지질 않으니 어쩜 좋을까요.

2011-09-22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2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9-22 22:21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ㅎㅎㅎ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 플레져님^^

2011-09-22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3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1-09-2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가을이 깊어지는데....여름에 날뛰셔야 할 모기님들이 참 가을까지 부지런하게 극성인 요즘입니다. 더불어 참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일들이 첩첩산중이라 그런지 계절이 오던지 말던지한 요즘이네요...ㅋㅋ

플레져 2011-09-23 22:25   좋아요 0 | URL
잘 될거에요 메피님.
걱정 뚝! 하시고 건강 관리 잘 하셔요 ^^

2012-02-01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유하는 시간  

 

이관염을 앓고 있다. 귀와 코를 연결하는 관에 염증이 생긴건데 꽤 불편하다. 이비인후과에서 처방한 약이 있지만 별 소용이 없다. 의사샘은 신경쓰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한다. 시간이 흘러야 낫는다고, 예민하게 신경쓰면 빨리 회복되지 않을거라고. 신경쓰지 않기로 했지만 일상의 습관들이 작은 충돌을 일으켜 이관염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이관염 증세가 있는 왼쪽 귀를 포함한 신체 왼쪽 부위가 말썽이다. 멍 때리는 증상이 심해졌고 단어도 퍼뜩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혹 치매 초기 증상인가 싶어 검색도 해봤다.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야호, 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메아리라고 하질않나... 커피를 마시러 전기포트 근처에 갔다가 보리차 한잔만 마시고 오는가하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 반납연기 신청을 하러 노트북을 켰는데 그것만 빼고! 엉뚱한 놀음만 하고 나오기 일쑤. 일주일째 나는 고장난 못난이 인형처럼 살고 있는 것 같다.  

     

 서머싯 몸이 쓴 작가들의 이야기다. 제인 오스틴, 허먼 멜빌, 발자크, 스탕달, 브론테, 오스카 와일드.... 그들의 짤막한 전기와 함께 작품이야기를 썼는데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조미료 없어도 맛있는 진국을 먹는 기분이다. 서머싯 몸이 이 책을 쓴 이유는,  

작가가 어떤 인물인지 알면 독자들이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31쪽  

오래 전 멋진 이야기를 쓴 작가들이어서 왠지 그들이 보통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보다는 그 자체로 위대한, 뛰어난, 불멸의 투사 같은 인상이 있었다. 작가들은 자기의 생을 열심히 살아간 보통의 사람들이었다고, 서머싯 몸은 말한다. 뮤지컬 극작가인 오은희씨는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5시? )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글을 쓴다고 했다. 98년쯤... 오은희씨의 뮤지컬이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작가이기전에 일상을 꾸려가는 생활인이라는 걸 강조하는 소박한 인터뷰가 간혹 떠오르는데 이 책에서도 작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자기의 삶을 다해 사랑한다. 만약 그들이 미지의 독자들을 위해,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쓴 글이라면 지금까지 명작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 당대의 이야기에 충실한 생활인의 자세에서 명작은 탄생한다.  

제인 오스틴은 평생 독신이었는데 정신적 지주였던 언니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날에는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았다.  

입에서 나오는 말을 종이에 그대로 옮겨 표현하는 게 편지 쓰기의 참된 기술이라고 늘 들어왔지만, 나는 이제야 겨우 그것을 습득했어. 이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언니에게 직접 말하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써내려왔어 - 80쪽  

제인 오스틴과 그녀의 언니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한 장 한 장 페이지 넘기는 게 아까웠다. 스탕달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사다리까지 타고 밀담한 이야기나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의 아이들을 귀찮아하고 이모에게 키우게 한 이기적인 심성도 엿볼 수 있다.  

지난달 (아! 벌써 5월이 갔다) 엔 40여통의 손편지를 썼다. 오래 교우한 이들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였는데 손편지를 받은 그들이 무척 좋아해주었다. 감동을 주기 위해, 잘 보이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일은 그것 밖엔 없었기 때문이었다. 뜻밖에 고마워하고 좋아라해주었던 그들이 참 고맙다. 6월에도 틈틈이 손편지를 쓰는 달이 될 것 같다. 미국에 사는 선배 역시 손편지에 대한 감동을 밝혔는데 너무 흥분되어 간단한 메일을 보내왔다. 선배와는 종종 메일을 주고 받는데 그에게서 받은 메일 중 가장 짧은 메일이었다. 그의 감동이 고스란히 느껴져 내가 더 위안을 받았다.  

 아껴읽고 있는 책이다. 아껴 먹는 것만큼 빨리 읽게 될까봐 조바심이 나는데 다행이 이 책은 아껴 읽으려 하지 않아도 느리게 읽게 된다. 지은이의 섬세한 관찰과 스케치, 책에서 만나는 아주 작은 폰트까지 뭐 하나 버릴 게 없다. 서울을 샅샅이 뒤져가며 쓰고 그린 책이다. 경복궁, 종로, 광화문등 서울을 누빈다. 서울. 서울을 떠나기 전엔 정말 몰랐는데 서울을 떠나온 뒤로 나는 아주 많이 그리워하는 도시가 서울이 되었다. 요즘에도 한 달에 서너번 이상은 가지만 갈 때마다 가슴이 찡하다. 나의 모든 걸 여기 다 두고 왔다는 생각에 화창한 서울의 날씨에서도 울적할 때가 더러 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라는 얘기를 지치지 않게 하는 친구들에게 요즘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움도 사랑이야. 꽤 멋부린 것 같지만 은연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서울을 떠나면서 내게 생긴 버릇 중에 하나는 비가 올 것 같은 날엔 꼭 우산을 챙긴다는 거다. 강우 확률 10% 라 할지라도 서울 가는 날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가방에 우산부터 챙긴다. 집을 멀리 떠나온 것도 서러운데 비까지 맞으면 더 처량할 것 같아서다.  

 

 

 

 

 

 

 

 

 

서울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긴 하지만 딱히 서울로 한정짓지 않아도 될, 도시가 배경인 소설들이 묶여있다. <서울 시간을 기억하는 공간>은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가 정서적 시선의 서울을 그렸다면, 서울의 역사를 훑는 책이다. 딱딱한 인상은 있지만 서울이라는 땅에 세워졌던 무수한 공간, 건물 탐사가 인상적이다.  

서울이 고향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고향의 흥취를 느끼지 못한다는 친구가 있었다. 그의 말에 수긍한다. 서울은 고향의 느낌 보다는 수락과 거절이 선명한 도시다. 오는 사람 안 막고 떠나는 사람 안 막는 도시. 톨스토이는 불행한 사람이 살기에는 도시가 낫다고 말했다. 끄덕끄덕... 하지만! 하고 외치고 싶지만 달리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이 살기에는 도시가 낫습니다.
도시에서는 이웃 사람이 사망한지 오래되어서 부패해도 아무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마다 공무, 대인관계, 건강, 예술, 아이들 교육에 신경쓰느라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고 항상 바쁘지요. 가끔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맞이해야 하고 이런 저런 사람을 방문해야 합니다. 또 이런 저런 것을 보고 들어야만 합니다. 사실 도시에는 어떤 상황에서든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두 세명의 저명인사가 있기 마련이지요. 자기 자신도 돌보기 바쁜 마당에 선생, 가정교사, 여자 가정교사 등 이런 저런 사람에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생활 자체가 공허해질 수밖에요.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아가면서 같이 사는데서 오는 고통을 덜 느꼈습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살고 있는 주인공의 말이다.

 

  

 

 

 

 

 

 


오전에 이비인후과에 다녀온 후 <제5도살장>을 읽었다. 독서를 눈과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귀로도 한다는 걸 알았다. 오른쪽 귀가 읽은 것을 왼쪽 귀가 흡수하지 못해 수많은 활자들이 왼쪽 귀 달팽이관에 고여있는 느낌이다. 이 느낌은 꽤 슬프다. 커트 보네거트의 글이 블랙 유머로 정평이 나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진짜 까만 웃음만 주는 역설이랄까. 웃긴데 슬프다. 글도 내 귀도. 귀에 염증이 생기면 독서도 힘들다.  

파트릭 모디아노 읽는 여자! 라고 말하는 게 난 참 좋았다. <신원 미상의 여자>를 비롯한 크라상 처럼 뭔지 모르게 후딱~ 지나간 혹은 사라진 세련된 맛의 소설이니까. <슬픈 빌라>는 현재, 과거, 환상과 현실이 겹쳐져 있다. 염증을 앓고 있는 내 귀처럼 시간의 치유가 필요한 인물들이 우후죽순 떨어진다. 모디아노의 인물들이 내 왼쪽 귀 달팽이관에 우산 쓰고 서 있다. 처량맞게스리.  

<택시>는 내 좋은 친구에게도 선물하고 나도 한 권 샀다. 상을 받아도 될 만큼 택시를 많이 타는 택시광 작가 할레드 알하미시. 그가 만난 이집트 카이로 택시 운전기사와 나눈 이야기들이 콩트처럼 엮여있다. 짧고 담백하고 깊다. 사회, 정치적 비판자인 택시 운전기사들의 시선은 유쾌하고 슬프다. (또! 슬프다. 오늘 참 많이 슬프고 계속 슬프다 ㅠㅠ)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짧게 읽고 깊이 생각하게 하는 참 좋은 소설.  

동네에 여름꽃들이 활짝 피었다. 쪽빛 보라색 붓꽃 천지였다가 노란 금계국이 진을 치기 시작했다. 한쪽에선 개망초꽃밭도 예쁜 아가씨 아사 원피스처럼 피어나고 있다. 바야흐로 6월이 왔다. 여름을 많이 타는 내게 6월은 선물같다. 아주 맑은 아침의 시간같은 6월을 부지런히 산책해야겠다. 

  

움직이는 여름

우리 동네 수변공원에 핀 금계국-  

 

붓꽃 (창포)  

 

풀꽃반지 장만! 어디서?  

 

<잔디당> 이라고... 우리 동네 들판에서 ^^;;  

 

모든 봉오리 진 꽃은 아름답다. 여름이다. 여름을 한번도 치유하는 시간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덥고 짜증나는 계절, 빨리 빨리 가버렸으면 좋을 계절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맞이한 6월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고여있는 물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뜬금없는 다짐을 하고 싶어졌다. 계속 흐를 수 있도록, 야금야금... 움직이는 여름이 되기를. 모두에게,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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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17: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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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1 19: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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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6-01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제가 스맛폰으로 읽은 소설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사랑하는냐도 중요하지만 어떡해 사랑하는지가 더 중요한거야.'

이건 꼭 사람과 사람사이에만 통용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게 식물이건 동물이건 아니면 인간들이 창조한 공간이건 도시이건...^^

플레져 2011-06-01 19:11   좋아요 0 | URL
스맛폰이라고 하시니까 아주 맛있는 폰 같아요 ㅎㅎ

인용하신 구절에 형광펜 칠할게요.
무엇을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도 중요하다, 라는
어떤 작가의 말이 떠오르는 말입니다 :)

프레이야 2011-06-01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앓고 계시군요. 몸도 마음도 서서히 나으시기 바래요.
손톱이 너무 귀엽게 생겼어요. 풀꽃반지랑 잘 어울려요.ㅎㅎ
네, 저도 계속 야곰야곰 흘러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어요.
변해야 아름답다는 생각이 부쩍 들어요, 요즘.^^
6월의 첫날! 힘내요!

플레져 2011-06-01 23:10   좋아요 0 | URL
확성기에 귀를 대고 있는 이 느낌을 즐기려고...애쓰고 있어요. 하지만 언제나 즐긴다는 말은 제게 참 어려운 거 같아요 ^^;;
긴 손톱을 가져본지 너무 오래전이라서요, 조금만 길어도 싹둑- 잘라버려요.
매니큐어 칠한 예쁜 손들이 부러운 여름이에요.
프레이야님의 여름이 봄처럼 예쁘기를 기대합니다 ^^!

blanca 2011-06-01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꽃이 금계국이군요. 토끼풀반지(맞나요?) 낀 손이 참 이쁘네요. <택시>에 관심이 갑니다. 소설이군요. 어서 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플레져 2011-06-01 23:14   좋아요 0 | URL
노란 것이 참 이쁘지요? ^^
토끼풀 맞는 것 같아요... 고백하자면...저도 이름을 잘 몰라서 그냥 풀꽃반지로. 흑 ㅠㅠ 쾌유 빌어주셔서 감사해요. 내일이면 휙~ 나을것만 같아요 :)

야클 2011-06-0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증상만으로 보면 저도 때때로 이관염을 앓고 있었군요.
그런데 쭉 그림들 넘기다 꽃반지 낀 손사진에서 잠시 멈춰 한 3초쯤 바라봤다면 약간 느끼해 하시려나? ㅎㅎ

플레져 2011-06-01 23:15   좋아요 0 | URL
마침 제가 오이피클을 먹어서 느끼함이 덜했어요 ㅎㅎㅎ
이관염일땐 무심한 게 약이래요. 증상을 또 느끼시거든 쭉-무심하세요~~

Mephistopheles 2011-06-02 00:37   좋아요 0 | URL
아니 야클님....그건 바로...페.티.쉬.즘...? =3=3=3=3=3=3

다락방 2011-06-02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 예뻐요, 플레져님.
꽃반지 낀 손이 예쁘지만, 꽃반지 안껴도 참 예쁜 손이에요. 깔끔하고 청결해요. 군더더기 없는 손, 이라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꽃반지와 아주 잘 어울려요.

플레져 2011-06-02 12:32   좋아요 0 | URL
군더더기 없는 손, 와. 그렇게 말해주는 다락방님이 더 예뻐요. 좋아라~ :) 손이 예쁘게 보이는건 날씨 덕도 본 거 같아요.
약간 흐린 듯한 날에 사진 찍으면 잘 나오잖아요 ^^

2011-06-02 1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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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2 13: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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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2 13: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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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6-0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디당이라, 어디죠, 어디죠? 플레져님 동네라면 우리 동네에서도 멀지 않을텐데...
이관염, 처음 들어봐요. 신체 중에 불편한 곳이 있는데 신경 안쓰고 있기란 쉽지 않지요. 여름 오기 전에 나으셨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사진의 저 꽃 (제 맘대로 엉겅퀴라고 부르고 있는) 저도 어제 차 타고 가다가 무리로 피어 있는 것을 봤어요. 갑천 강변 따라 가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바로 어제인데도 그게 어디 가던 길이었더라 금방 생각이 안났습니다. 저도 이래요 ^^)

플레져 2011-06-02 16:50   좋아요 0 | URL
귀와 코를 연결하는 관이 있는데요, 거기에 바람이 통하지 않는거래요.
아침엔 반짝 괜찮았는데 지금은 또다시 웅성웅성...ㅠㅠ
어디 먼 곳으로 교신하는 것만 같아요. 도대체 내 귀는 어느 곳의 소리를 듣고 싶은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2011-06-10 08: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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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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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16: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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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16: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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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2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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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5: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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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3 2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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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좋은 친구가 어떤 소설 한 편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실화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는 부분은 소설같고, 허구의 대목은 현실 같다고. 이따금씩 친구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말은 어처구니 없는 현실과 맞닥뜨린 내게 위로가 된다. 이 순간은 소설일지도 몰라. 나는 지금 어떤 작가의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거야. 언제나 그 순간만, 고비만 넘기면 살 만하다. 그렇게 잠깐을 보내면 지독한 소설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시간이 흐른 다음엔 침 튀기며 내가 말이야 이런 일이 있었는데...하며 수다를 떨게 되면, 내 몸이 담겨져있던 그 소설의 시간은 더이상 지독한 기억은 아니었다고 말하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떤 소설의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걸까.   

 

                                        

 

 

 

 

 

 

 

어떤 책들은 표지로 말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책들은 작가의 이름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은유하기도 한다. 책 한 권은 온전히 작가의 몸이면서 손이고, 눈이고, 발이다. 신체의 한 부분만 스며들어있는 책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시간들이 표지에, 책등에, 목차에 실려있다.  

<나쁜피>의 화숙은 소설의 인물 같지 않고 현실의 인물 같다. 곧 철거될 건물, 후미진 오락실에 가면 화숙을 만날 것만 같다. 화숙이라는 인물도 매력적이지만 이 소설의 미덕은 진순, 혜주, 화숙이 이룬 가정의 형태다. 핏줄로 생성되는 자연발생적 가정이 아니라 사연과 상황이 맺어준 특별한 가족. 이 소설에서 놓치면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의 소설들은 중독성이 강하다. 조금 전에 마신 사과맛 사이다를 자꾸 홀짝이게 되는 것처럼 이 소설도 그런 맛이 있다. 그런데 그게 녹록하지 않다. 곱씹을수록 우리가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으나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환상통>의 도입은에선 젊은 여자가 냉장고 성에를 그악스럽게 제거하고 있다. 여자의 볼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겠지. 성에를 긁어내는 손목에는 그녀의 체중이 다 실려있을 것이다.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여자가, 그러고 있다. 그토록 어린 여자가, 그 밤중에.  

문득,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어릴땐 정기적으로 엄마가 냉장고 성에를 제거했던 기억이 있는데 요즘 냉장고들은 성에가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얼마전 엄마는 실수로 냉장고 문을 닫지 않고 잠을 잤다. 다음날 냉장고에 성에가 끼었고 엄마는 폭설이 얼어붙은 냉장고를 보며 전자제품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냉장고 수리 기사는 엄마의 깨끗한 냉장고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양문형 냉장고가 나오기 직전에 산 냉장고인데 어디 하나 생채기가 나지도 않았으며 선반, 실리콘 등등이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하루>의 여자는 이웃집 여자의 자살 소식을 남편에게 전한다. 당신이랑 친했어? 라고 남편이 묻자 여자는 아니라고 얼버무린다. 그러자 남편은 그럼 됐어, 하고는 서재로 들어간다. 끔찍한 사건 보다 더 소름이 돋는 장면이었다. 차라리 <나쁜피>의 화숙처럼 드러내놓고 자신을 아프게 한 상대를 미워하는 게 더 아름다워 보일 지경이다. 이웃에서 누군가, 나와 어떤 친분을 쌓았던 이웃이 죽었는데도 그저 멀거니 서서 하루가 끝났다고 말하는 여자 보다는 화숙이 더 낫다. 누군가 우스개소리처럼 말했다. 나만 아니면 되지 뭐. 이 말의 공포는 이 작품 <하루>에 스며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조차 숨기면서.

김이설의 인물들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실루엣으로는 절대로 부족하다. 또렷한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내장기관까지 또렷하게 그려줘야 할 것처럼 혹독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김이설은 혹독하고 아픈 사람들을 이야기하지만 그것만 할 줄 안다고 말하는 작가는 아니다. 끈질기게 소리를 추격하여 청각을 시각화 시키고 시각의 통로에서 나와 대면하게 되는 <손>의 놀라운 관찰력과 주의 깊음에서 작가의 깊은 시선을 감지한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컴퓨터 세상과 독대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작가의 역량, 넓은 시선을 보여준다. 김이설의 문장은 스타카토를 치듯 빠르고 간결하며 정확하다. 딱 그 문장이어야만 할 것 같다. 딱 그 여자, 그 이름이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문장에선 활자들이 펄펄 튀어올라 뺨을 철썩- 때린다. 아야- :)

책을 선물해준 내 좋은 친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그리고 내가 힘이 되고 싶다는 고백도 전한다-   

  
     

 

 

 

 

 

 

 

지난해 초여름에 읽은 <여덟번째 방>은 자주 떠오르는 소설이다. 김미월은 담백하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다. 캐릭터들은 문장에, 행간에 스며있지 결코 혼자 떠오르지 않는다. 문장이 살면 나도 살고 문장이 죽으면 나도 죽어, 라는 슬로건이라도 새기고 있는지 그들은 같이 움직인다. 우리는 모두 치렁치렁하지 않기로 했어, 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욕심 부린 문장, 서사가 없다. 힘을 빼고도 힘있는 소설인 셈이다. 힘을 빼면 힘이 생기는걸까.  

<사랑하기 위한 일곱번의 시도> 는 엽편 소설, 콩트의 느낌이다. 허수경 시인의 번역이어서 집어들었다. 순간이라고 하는 아주 짧은 포착의 시간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갑자기 시작하고 불쑥 끝나버린다. 여운이 남는 어떤 소설도 있고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 소설도 있다. 물론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소설도 있지만. 분위기를 타고 이국의 세계로 흘러가고 싶을때 읽으면 좋을 소설.   

<작가의 집>은 작가의 삶과 작품이 들어있는 작가의 집에 관한 이야기다. 뒤라스는 자신의 집에서 고독을 발명하는 사람처럼 살았고 마크 트웨인의 작업실 바닥은 항상 어질러져 있었으며 카렌 블릭센의 초록의자, 초록 테이블이 있는 초록 거실은 꼭 한번 가고 싶어진다. 불만이라면, 여성 작가들에게는 굳이, 여류 작가라고 달아놓았다는 것이다. 사진만으로도 여성 남성인지는 식별 가능한데 왜 그랬을까. 유행인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컬러링이 에피톤 프로젝트의 <선인장>이었다. 혹여 누군가에 대해 함부로 말하게 될까봐, 누군가에게 폐가 될까봐 조심스러워하는 친구와 잘 어울리는 BGM이다. 또 한친구는 지금 멋진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손편지>가 참 좋다며 블로그에 동영상을 올려놓았다. 동영상에선 그녀가 손으로 빚어 퍼 올린 것처럼 깨끗한 흙냄새가 풍겼다. 이토록 청아한 5월, 오늘처럼 습기도 없는 5월엔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가 딱이다.  

 

동네 산책로에는 벌써 보라색 창포가 피었다. 식물의 규칙적인 리듬은 존경스럽다. 내가 정말 울어야할 때 울고, 웃어야 할 때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누군가에게 무엇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의 에너자이저, 파워레인저다. 그런 착각 조차 아름다운 5월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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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5-1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이설은 다들 좋다고 하더군요.
'사랑하기 위한 일곱번의 시도'랑 '작가의 집'이 좋을 것 같군요.^^

플레져 2011-05-14 22:46   좋아요 0 | URL
작가의 집 재밌어요!
작가들의 공간과 삶의 이야기.
단편적이어서 좀 아쉬움이 남지만...그들의 공간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ㅎㅎ

2011-05-14 10: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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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4 2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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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4 1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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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4 2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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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4 16: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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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4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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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5 1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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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14: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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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5 21: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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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14: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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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7 2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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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2 2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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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을수도 있어요, 조심하려 애쓰겠지만 1그램의 스포일러는 어쩔 수 없어요*

 

 

 

  

 

 

  


그가 마침내 다시 세상에 나왔다. 하얗게 쏟아지는 빛, 노랗고 너른 건강한 땅에 그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몹시 조용하다. 그가 그 곳에 다시 서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다는 듯 세상은 과묵하고 적막하다. 원래 세상은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것이다. 언제나 소란스럽고 시끌벅적 다투고 있는 건 나 혼자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본디 고요한 곳이었다.     

 

  

오호라, 요 긴 머리 아가씨가 스스로 자기의 길을 찾아버렸다. 힌트는 처음 구경한 세상에서였다. 그곳에서 보았던 어떤 심볼이 나의 먼 기억을 깨우고 퍼즐을 맞춰 완성시켰다. 순전히 자신의 눈썰미로 이룩한 쾌거. 처음으로 3D 를 본 거였는데 3D 안경이 너무 컸다. 그 안경은 어느 푸른 해변, 긴 비치의자에서 크림파스타를 먹기 위해 머리띠에 잠시 고정시키는 용도로만 써야 할 것만 같다. 우리에겐 너무 큰 안경.  

 

 

 

 

 

 

 

 

만약 내가 버려야할 것이 있다면 맞지 않는 옷이어야 한다.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참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걸 버리기 위해선 어떤 계기가 폭풍처럼 다가와야 한다. 아주 흔한 소재가 카메라 워크로 빛이 난다, 빛이. 그로 인해 식상해진 것들이 인상적인 아우라가 된 어휘가 몇 가지 있다. 뜻밖에, 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예상하지 못한, 이 이토록 매혹적일 수 있을까. 뜻밖에와 예상하지 못한을 건너고나면 결국, 이란 편안한 자리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여전히 세상은 고요하고 나는 소란스럽다. 영화를 함께 본 친구와 올봄에 틸다 스윈턴이 입었던 오렌지색 바지를 한 벌씩 장만하기로 했다. 우리 동네 옷가게에서 그걸 보고 말았다. 다음주에 친구와 들러야겠다. 사이좋은 친구와 같은 옷을 입는다는 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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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1-03-03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못 챙겨보는 저같은 사람에겐 플레져님의 스포일러가 고맙답니닼ㅋ
그런데 겨우 1g이면 스포일러도 아닌데 뭘 그래요...

플레져 2011-03-04 11:35   좋아요 0 | URL
제 딴에는 애교,,,로 썼는데 좀 까칠하게 보였나요? ^^;;
반가워요, 진주님~~~

진주 2011-03-04 21:31   좋아요 0 | URL
으잉? 전혀 '까칠'아니었어요. 귀여웠어요 ㅎㅎ

플레져 2011-03-08 13:29   좋아요 0 | URL
헤헤. 감사합니다 ^____^

Mephistopheles 2011-03-04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g 쯤이야...^^ 아무래도 국내 극장은 오스카 영향인지 블랙스완과 킹스스피치에 관심이 쏠릴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코엔 형제의 영화인 '진정한 용기'는 아마 큰 빛을 보진 못할 것 같습니다. (꼭 보세요란 말은 아닙니다..ㅋㅋ)

플레져 2011-03-04 11:36   좋아요 0 | URL
블랙스완, 저는 조금 무서웠지만 아주 잘 본 영화였어요.
마지막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더라구요 ㅠㅠ
예술가의 자기 파괴는 어디까지일까요...
킹스스피치는 콜린 퍼스 땜시 보고 싶구요,
진정한 용기도 보고 싶은데. 꼭 보게 될 것 같은 이 예감은...ㅎ

stella.K 2011-03-0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1g 아닌가? 스포일러란 느낌 거의 안 드는데...
고 정영일 씨는 아예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 주던데.풉~
반가워요. 마치 봄처녀 나들이 나온 것처럼.(아, 봄처녀 아니지? 봄 아줌마?ㅋㅋ)
저 <아이 엠 러브> 설명 들으니 끌리네요. 카메라 워크를 어떻게
썼을지 궁금 궁금...


플레져 2011-03-04 11:38   좋아요 0 | URL
그럼 다행. 아무 생각없이 들어왔다가 어떤 방해를 받게 되실까봐-
봄 아줌마 ㅋㅋ 그냥 아줌마보다 훨씬 듣기 좋습니다.
아이엠러브, 너무 좋아요 ㅠㅠㅠㅠ
카메라 워크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영화를 보면 딱 아실거에요.
아- 하는 감탄과 함께 ^^

2011-03-04 1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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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4 17: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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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6 0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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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8 1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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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9 2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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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0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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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7 0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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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2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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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3 0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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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3 0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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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4 1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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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4 16: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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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3 1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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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3 1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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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3 15: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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