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마음의 어디를 동여맨 채 살아가는 이를
  사랑한 것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두 팔을 아래로 내린 채 눈을 감고
  오늘 죽은 이는 내일 더 죽어 있고
  모레엔 더욱 죽어 있을 거라고 너는 말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음껏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
  이 세상 여자면 누구나 바라는 아주 평범한 일
  아무것도 원하지는 않으나 다만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그런 눈부신 일이 차례가 올 리 없다고 너는 말했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오늘 오늘 오늘의 연속
  이제까지 이렇게 어렵게 살아왔는데 앞으로도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야 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길이 쉬운 거라고 너는 말했다
  버림받고 병들고 잊혀지는 일이 무섭다고 너는 말했다
  잊혀져가는 것이라고 했다
  꽃과 나무와 길들로부터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잊혀져가는 것이라고 너는 말했다
  잊혀진 일은 내일이면 더 잊혀져 있고
  내년이면 더 많이 잊혀져 있으며
  그것은 세상일과 가장 많이 닿아 있는 일이라고 너는 말했다

   詩 : 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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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4-12-29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정권의 시 산정묘지를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쩡쩡한 얼음들의 결빙을 노래하는 그런 단호함이 마냥 좋았었거든요~

이 시는 그가 산에서 조금 많이 내려와서 쓴 시 같아요...

세상은 그런거라그런거라...

플레져 2004-12-29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정권시인의 시는 많이 읽지 못했어요.

시를 아주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는 너무 어렸던지라...

찾아 읽기 보다는 누가 권해주고, 좋다고 하는 것만 읽었죠.

산정묘지 찾아봐야겠네요.

비로그인 2004-12-2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좋네요...왠지 내 이야기 같기도 하구...

플레져 2004-12-29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고양이님, 내 이야기 같은 시를 만나면 거기에 마음을 놓아버립니다. 시인의 마음과 내 마음이 잘 섞이도록...
 

밤, 침대로 들어가려는데, 어이, 하고 오랜만에 그것이 찾아온다. 나는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맞아들인다. 아무도, 절망을 내쫓을 수 없다.

우리는 마주하고, 천천히 말을 주고받는다. 잘 지냈어? 별 문제 없었던 것 같은데. 절망은 그렇게 말하고, 친근한 몸짓으로 내 무릎을 톡 톡 친다. 침대에 들어가 얌전히 베개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내 무릎을.

오래전에 잊어버린 일이 몇 가지나 떠오르고, 나는 불쑥 나타난 그 기억의 선명함에 어쩔 줄 모른다.

예를 들면 쓰기 교과서.

황록색 표지에 커다란 장미꽃이 촌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추악하다고 생각했다. 추악하고, 품위가 없다고.

그 무렵, 품위가 없다는 말은 아빠의 입버릇이었고, 우리집에서는 결정적인 경멸을 뜻했다. 하지만 어린애들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교과서 표지를 가지고 품위가 없다고 하면, 그런 말을 한 어린애야말로 품위가 없는 셈이 되었다.

우리 엄마는, 수업과 공책이란 말에 경의를 표하는 마지막 엄마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엄마는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든 경청하거라." 하고 늘 주의를 주곤 했는데, 나는 '경청'을 오래도록 '긴장'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쓰기 교과서를 추악하다고 생각했다. 추악한 것은 한 번 보고 나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촌스런 장미꽃 그림.

나는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것만큼 초등학교가 품위 있는 장소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한번으로는 차라리 모르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 무렵, 나의 조그만 머리는 지금보다 훨씬 모순으로 가득했다.

이제 갈게.

절망이 말한다. 절망은 어린 시절 얘기를 좋아한다.

그럼 또 보자. 잘 자고.

절망이 그렇게 말하고 나간 후에야 나는 겨우 잠든다. 

    <67~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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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8 1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랑눈 : 조금씩 잘게 부서져 내리는 눈. 가늘게 내리는 비를 '가랑비'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조금씩 잘게 부서져 내리는 눈을 '가랑눈'이라 한다.

길눈 : 거의 한 길이나 되도록 엄청나게 많이 쌓인 눈. 보통 어른 한 사람의 키를 한 길이라고 한다. '길'은 주로 물의 깊이를 가늠할 때 쓰는 단위로, '한 길', '두 길' 따위로 나타낸다.

눈석임 : 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 스러짐.

눈설레 : 눈과 함께 찬바람이 몰아치는 현상.

도둑눈 : 밤에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내린 눈.

떡눈 : 물기를 머금어서 척척 들러붙는 눈송이.

살눈 : 얆게 내리는 눈.

설밥 : 설날에 오는 눈을 상징적으로 이르는 말.

숫눈 : 눈이 와서 덮인 후에 아직 아무도 지나지 않은 상태의 눈.

싸라기눈 : 빗방울이 갑자기 찬바람을 만나 얼어 떨어지는 싸라기 같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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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12-2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눈다운 눈은 오지 않은 듯...^^

어룸 2004-12-2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지난번 비에 이어 눈이로군요!! 그럼 또 퍼가야지요~후후후후~~^m^

플레져 2004-12-26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눈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근데 저 단어들과 의미는 참 고와요 ^^

투풀님~ 맞아요. 지난번에 비 이후에 눈 이어요~

날개 2004-12-26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떡눈이 눈사람 만들기 좋은 눈인가요? 어째 이름이 좀..흐흐~

Laika 2004-12-26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이미지를 보니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을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요... ^^

플레져 2004-12-26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요 그림 보고 말씀하신거죠? 지금... 서재 이미지 바꾸던 중이었어요~ ^^

2004-12-2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의 영혼은 어떨까...

Laika 2004-12-26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그새 이미지 바꾸셨네요...

부지런히 새해 인사도 먼저하시는군요...^^ 플레져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플레져 2004-12-26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아주 깨끗하고 싶어서 그린 것 아닐까요....

라이카님, 새해엔 이미지 안바꾸고 지내보려구요...잘 될까 모르겠지만..^^

2004-12-27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4-12-27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눈이 와서 덮인 후에 아직 아무도 지나지 않은 상태의 눈이 젤 인거 같아요...근데..여기다 "숫눈"하고 호명을 해봉께네...크으...어감이 좀...^^

숨은아이 2004-12-27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폭탄에 불을 붙이려는 건가요? 아님 폭탄처럼 생긴 폭죽일까요?

플레져 2004-12-27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순이언니님, 그..그런가요? ㅎㅎ

숨은아이님, 폭탄이예요!!
 

행인의 얼핏 비친 눈물

날 선 초승달 스쳐
살점 벌어진 저녁 바람
행인의 얼핏 비친 눈물로
서녘은 저리 붉었다
벌어진 살점에
소금 한 줌 뿌리고 눈 뜨는 별의
비린 길을 걸으면
보도 블록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숱한 행인의 발걸음들
어느 발자국의 보도 블록에
불을 대고 엎드려
별들간의 거리를 올려다본다
그렇게 오래도록 드러누워 있고 싶지만
가던 길 간다, 갈 곳은 없지만
리드하는 저녁 바람이 행인의 허리를 잡고 스텝을 밟으면
발길에 툭, 걸리는 것이 있어
행인은 뒤돌아본다
언 강물 위에 박힌 돌멩이들처럼
보도 블록 그물코에 매달린 발걸음들
해 진 거리에서 묻는다
-여 보 세 요, 아직 막차는 남아 있나요?



詩 : 윤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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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4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4-12-2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 시는 참... 그래도 메리 크리스마습니다요^^

파란여우 2004-12-24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푸~~~욱 내려 앉습니다....그래도 전 님에게 메리 클수마수입니다^^

플레져 2004-12-2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여우님... 들뜬 기분을 갖지 못하는 친구가 있답니다. 그녀를 생각하면 크리스마스란 말 조차 호사스러워 보여서요...

2004-12-24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4-12-2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위를 배려하는 플레져님께도 성탄의 기쁨을 전합니다.

플레져님의 그 분께도 함께요.

잉크냄새 2004-12-24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차는 남아있습니다. 막차에는 제한시간이 없습니다. 그저 진심으로 손만 뻗으면 나타납니다. 저도 플레져님께 성탄의 기쁨을 전합니다.

2004-12-24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굼 2004-12-2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차를 놓쳐도..조금 기다리면 다시 첫차를 타실 수 있을거에요: )

플레져 2004-12-24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잉크냄새님, 소굼님~~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

2004-12-25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기다림으로 > (빨간머리 앤2) - 무뚝뚝하게 쌓이는 정

빨간머리 앤에서 누가 제일 좋아?
심심한 마음에 나에게 묻는 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테지.
"나는 마릴라 아줌마가 제일 좋아"

앤이 가진 풍부하고 귀여운 상상력과 쉴새없이 터져나오는 시끄러움과 실수들이 매우 사랑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악동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당당히 멋진 남자가 되어버린 길버트도 근사하긴 하지만..
마릴라 아줌마의 무뚝뚝한 말 한 마디가, 나는 더 좋다.
매튜 아저씨의 끝을 알 수 없는 쑥스러움에 견줄만한 매력이랄까?

 

 




 

 

 

 

 

 

 

 



아기자기한 자상함이나 포근함은 없지만,
단단한 주관과 내세우지않는 상냥함이 있다.
화려하고 풍성한 애정은 보이지 않지만,
깊게 뿌리내리는 감정의 진실함은 가지고 있다.

앤이 다치자 달려가던 마릴라의 조급한 표정과
앤의 흉을 보는 린드 부인에게 불편한 심기를 보이는 모습과
언제나 눈에 띄는 아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미소는
..사랑이 엿보인다.(마릴라 아줌마, 숨기려 해도 우린 모두 다 알고 있다구요^^)




 

 

 

 

 

 












나는 무뚝뚝하고 차갑고 성실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 뒤로 보이는 자상함과 따뜻함과 여유로움이 한결 강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매튜아저씨도 한 컷^^>




 

























 이 두 사람의 뒷 모습에서, 누가 알았을까?






























  이렇게 서로를 안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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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2-22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그거 아세요...빨간머리 앤은 남자애들 사이에서도 꽤나 인기가 좋았답니다.

다만 앤보다는 다이애나가 더 인기가 좋았죠...

호밀밭 2004-12-22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의 고요한 나날이 어렸을 때는 참 심심해 보였는데 커서 보니까 참 따뜻하고 평온해 보여요.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지만 늘 잔잔한 행복을 느끼는 모습이 멋져요. 그런데 남자들은 다이애나를 더 좋아했군요. 처음 알았어요^^.

mira95 2004-12-22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가 말하길.. 어렸을 때는 앤밖에 안 보였는데 크니까 머릴러가 너무 좋다고 하더군요.. 요즘 앤을 읽고 있는데 앤 주위의 사람들이 너무 매력적으로 나오는 거 있죠.. 좋은 작품이에요..

플레져 2004-12-22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호밀밭님, 미라님... 함께 이 만화를 보던 사람을 만나 너무 기뻐요. 공중파 방송이니 만날만도 하지만, 왠지 특별해보입니다.

icaru 2004-12-23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튜 아저씨 : "음....그러니까아...그럼 그러지...뭐어..", "나는 글쎄....", "저기..."

하는 음성을 듣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