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hanicare > '파파 톨드 미' (11권)에서 발췌
에피소드 46 My solitaire
(히토미;맞선을 보는 올드 미스 편집자)
남의 부탁은 절대 거절 못 한다.언니 그건 장점이 아니라구.끝맺음이 분명하지 않은 성격이란 소리니까.우유부단하다,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용기가 없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지.
좋은 아내가 되는 조건이 있다면 제1조가 순종일 것이다.물론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얘긴 아니다.요새 세상에 말만이라곤 해도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는 없다.아이에게 순종하는 엄마는 많은 것 같지만.내가 말하는 순종이란 '지금'에 대한 순종. 지금 눈앞에 쌓아올린 온갖 가치관의 城에 대한 순종이다. 난 그게 안된다.도저히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그다지 반항은 하지 않지만 왠지 흥미도 없기 때문에 성에는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혼자 산책한다.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
(맞선남)저기 히토미 씨,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중략) 그 반지 어째서 왼손 약지에다?
(히토미)아 별뜻 없어요.그냥 글을 쓸 때 오른손은 걸리적거려서-그것뿐이에요.
(맞선남) 난 또. 그렇군요.안심입니다. 한가지만 더 물을게요. 실례지만 그 반지는 누가 준 선물인가요?
(히토미) 아뇨.제가 샀어요. 작은 반지를 좋아하거든요. 제 생활 속의 아주 작은 기쁨이죠.
(히토미의 친구들 장면) 그래도 역시 반지는 남자친구가 사줘야 맛이지...여자가 혼자 보석상을 서성이는 건 비참해 보이쟎아.
(히토미의 마음 속에서)
어릴 때부터 책이 좋았다.읽는 것도 들었을 때의 묵직한 느낌도 종이와 인쇄냄새도.그런 직업이 있다는 걸 안 뒤로는 편집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무척 열심히 노력해서 무리라고 말하는 대학에 어찌어찌 합격해서 기적적으로 지금의 이 회사에 들어갔다. 물론 이상과 현실은 조금씩 어긋나기 마련. 뒤돌아보면 난 내 꿈대로 살아왔다. 분명 많은 행운과 많은 사람들 덕이었으리라. 그래서 스스로 일한 돈으로 자신의 생계를 꾸리고 작지만 마음 편한 집도 가졌으며 거기에 더해 이런 작은 기쁨(인용자 주-스스로에게 맘에 드는 반지를 사주는 것)도 누릴 수 있었다. 이게 나에겐 황홀할 정도로 행복한 일이었는데 모두가 비참해 보인다고 말한다면 정말 그럴지도. 하지만 어째서 그게 비참해 보이는 걸까?
(맞선남 측 중년부인)
저기 ..몹시 실례되겠지만 히토미씨가 지금까지 혼자 지낸 데 혹시 무슨 이유가 있는지?
(맞선남)일이 꽤 힘들죠?
(히토미) 네, 시간도 불규칙하고 ㅡ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맞선남)하지만 만약 저와 결혼하신다면 전 히토미씨가 계속 일하는 걸 허락할 겁니다.
(히토미)허락해주셔서 고맙군요.마치 신 같네요.
(맞선남)
히토미씨 같은 분은 밖에서는 유능한 직업여성이고 안에서는 아내와 엄마로서 양자를 훌륭하게 소화해낼 게 분명합니다. 전 집에 돌아왔을 때 맛있는 음식만 식탁에 차려져 있으면 아무런 불평도 없거든요.
(히토미) ...그렇지 않아요.만약 결혼하셔도 제가 요시오씨보다 일찍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을 거라고 봐요.주말도 그렇고.
(맞선남)요새는 맞선을 우습게 보지만 현실적으로 무시할 순 없죠.스트레스도 받고 동급생도 이제 거의 결혼해버렸으니.독신은 회사에서 혜택도 적어요.
(히토미)
왜죠? 왜 독신은 안되는 거예요? 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거죠? 생각해 본 적 없으세요?
왜 결혼하지 않느냐, 더 적극적으로 찾아봐라.솔직히 진짜 그런가 싶을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신기한 기분이 들어요.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하고.
(집으로 돌아온 히토미의 독백)
하지만..혼자 잼을 만드는 일.혼자 반지를 사는 일.혼자 살아가는 일. 한 사람을 계속 좋아하는 일. 행복한 꿈은 꾸지만 행복에의 야심은 갖지 않는 일. 어째서 안 되는 걸까? 누구에게도 나쁜 짓은 하지 않는다.
혼자 있으면 인간은 더 빨리 진화하는지도 모른다. 빨리 어른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발 먼저 앞서가는 일.마음 속에 자기 혼자만의 혹성을 찾아내는 일. 그건 동물로서의 인간에겐 안 좋은 일이겠지만. 유전자는 두 개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나는 태고 때부터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생물로서의 목소리, 여기에 머무르라는 목소리이고 또 하나는 본 적 없는 미래의 존재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목소리. 그 친절한 사람들은 전자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일 것이다. 같은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도 비어져 나온 사람에게 차갑게 대하는 것도 전자에서는 의의가 있다. 지켜야 할 건 많으니까. 그 사람들이 때때로 목소리를 높이거나 초조해해는 건 희미하게 노래하기 시작한 또 하나의 목소리를 없애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으로서. 외로운 것도 멋진 일. 조금은 쓸쓸하지만 다정한 아주 먼 거리를 두고 작게 반짝이는 별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 난 이렇게 패기 없고 에고이스트이며 축복받은 행복한 사람이니까. 무섭지 않아. 이 진화의 요람도. 그리고 때때로 소파 위에서 2000억 광년의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