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이먼드 카버 : 어느 작가의 생
캐롤 스클레니카 지음, 고영범 옮김 / 강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지난 여름이었다. 폭염의 나날 속에서 나는 단 한 권의 책, 레이먼드 카버 : 어느 작가의 생을 정독했다. 지독하게 더운 여름 동안 나는 한 남자의 한 작가의 생을 쫓았다. 폭염을 잊을수는 없었지만 잠시 외면할 수는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이전의 상황과 태어나고, 살고, 죽은 후의 상황들이 나열된 이야기였다. 맨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나서 나는 한 작가의 생이 아니라 한 남자의 쓸쓸한 생을 읽은 것 같아서 쓸쓸하고 아팠다. 쓸쓸하다는 말, 참 오랜만이다. 중학교때 내가 마땅히 써야 할 유행어처럼 쓰고 처음이다. 레이먼드 카버, 참으로 쓸쓸한 인생이었다. 작가라는 그의 소명은 쓸쓸함을 부추겼을 뿐 해소하지는 못했다. 작가는 쓸쓸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다.
어떤 이는 감명깊은 책을 읽고, 작가를 알게 되면서 작가를 꿈꾸고 동경한다. 레이는 아홉살 때부터 작가가 되고자 꿈을 꿨다. 그 꿈을 갖게 된 후 그는 작가들을 동경했고 그들의 책을 읽었다. 그는 그 어린 나이에 자기의 운명을 정해놓고 그 길로 직진했다. 작가의 길로 가는 동안 그는 샛길로 빠지려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야 했고, 생활고를 등에 지고 품에 안고 걷고 뛰었다. 그가 쉽게 작가가 되었다면 그의 작품들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길을 가기 위해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뛰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뒷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에겐 오로지 '작가' 와 '글을 쓰는 것' 뿐이었다. 시대 상황에 어울리는 직업을 선택하여 편하게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아홉살 때부터 꾼 꿈밖에는 가진 게 없는 사람처럼 줄곧 그 길에 있었다. 그 길에서 이탈하는 방법일랑 그는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작가, 레이는 왜 그토록 작가를 꿈 꾼 것일까. 9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얼추 짐작한 건 그의 마음에 넘쳐나는 공허였다. 그건 태생적인 공허였다.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공허였다. 공허는 그런 게 아닐까. 나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덤벼들었다가 다시 제풀에 쓰러져 넘어져버리는 것. 누군가 해결해주려고 하는 것 자체가 귀찮고 절망적인 것. 공허는 공허를 낳음으로서 영원해진다.
어린 시절 읽은 동화가 떠오른다. 어떤 아이가 어른에게 물었다. 행복이 뭐에요? 그러자 어른이 그건 아주 좋은 거라고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아이가 말했다. 먹는 거에요? 어른은 아이를 따뜻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단맛이 나는 사탕일지도 모른다. 그러자 아이는 피식 웃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에이, 시시하네. 아이에게 사탕이란 금세 녹아 없어져버리는 먹을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린 나는 아이도, 어른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난 사탕을 먹으면 안된다는 금지 조항을 껴안은 어린 아이였기 때문이었고 어른의 말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동화를 오래 기억하고 행복을 얼추 상상할 수 있는 건 '단맛' 때문이었다. 지금도 가끔 누군가 행복이란 말을 입에 올리면 '단맛' 부터 생각난다. 레이의 생에는 없었던 단맛. 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사고 돈을 벌고 명성을 얻었을 때도 나는 그가 행복해보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공허로 주입된 에드벌룬처럼 그저 둥실 하늘에 떠 있을 뿐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도드라지게 떠 있는 에드벌룬.
레이는 작가의 길을 걸으며 남매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는 스무살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또래의 연인인 메리앤의 임신 소식을 듣고 레이는 청혼을 한다. 그 당시엔 평균 결혼 연령이 십대였고 어린 신부의 혼전 임신은 흔한 일이었다. 그 순간(레이가 청혼을 한 순간), 작가가 될 레이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고 필자는 말한다. 메리앤은 그가 작가의 인생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준 첫번째 사람이었다. 너무 이른 결혼으로 가장이 된 그는 가족 관계를 성립하는데 무지했다. 그에게는 아이들이 그저 어쩌다 생겨난 전유물처럼 존재했고 아주 나중에서야 남매에게 신경을 쓰게 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아버지 상과는 다르다. 딸은 레이처럼 알콜 중독을 겪지만 곧 회복하였고 아들도 독일에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딸과 아들의 증언은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회한이 역력하다. 아내 메리앤은 그가 작가가 되고자 하는 것을 적극 지원했고 영감을 주었으며 생계를 책임졌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직업 스토리는 놀랍고 고단해보인다. 레이의 소설들은 자전적인 요소가 많은데 아내 메리앤과의 에피소드, 그들의 일상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레이의 소설 주제가 바로 그들의 이야기였다.
요즘 내게 이야기 '재료'로 다가오는 것들은 내가 스무 살이 넘었을 무렵 내 눈에 드러났던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내가 부모가 되기 전의 생활에 대해선 거의 기억이 없어요. 스무 살이 되고 결혼해서 애들을 낳기 전까지는 내 인생에 중요한 일이라는 게 없었던 것 같아요. 그 후에야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거죠. 108쪽
레이는 작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모색한다. 대학을 다니고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 다시 또 글을 쓰고 일을 관두고 대학을 다닌다. 그들의 집에는 변변한 가구 하나 없었고 겨우 산 목숨을 이어갔을 뿐이었다. 작가들은 어딘가에 미쳐있는 사람들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에 홀려있었듯 레이는 술에 홀려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유전적인 탓도 있다, 그의 아버지도 그랬다) 불안했고 불안을 떨어내기 위해 술을 마셨다. 악순환은 반복되었지만 그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래도 술을 멀리할 수는 없었다. 레이는 시인이기도 했다. 그가 쓴 시들은 소설의 원천이 되었다. 그가 쓴 시 중에 <운전 중 술마시기> 는 제목에서부터 그의 일상을 드러낸다. 그에게 술은 글이 되지 못한 불안과 공허였을까. 그가 사로잡힌 공허는 어떤 결핍에서 오는 것일까. 그의 소설들은 사실적이고 단순하지만 의미와 여운은 오래 남는다. 그는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들을 부분 각색해서 써내려간다.
말들, 정확하고 진실한 말들은 행위가 지니는 힘을 가집니다.
여러분의 말들의 영혼, 여러분의 행위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것으로 준비는 충분합니다.
더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습니다 - 레이먼드 카버 857쪽
900페이지가 넘는 두껍고 긴 책을 읽은 건 처음이다. 중도에 포기했던 책들이 꽤 있었다. 나를 끝까지 읽게 한 레이의 생은 단순히 작가의 삶이어서가 아니라 한 남자의 생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 아버지 세대의 삶이어서도 아니다. 불안하고 가엾은 시지프스, 한 인간의 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굴러내려오는 생의 시간들을 혹독하게 치렀다. 그는 마치 불행하지 않으면 일상적이지 않은 사람처럼 살았다. 그렇다고 그가 벌린 옳지 못한 일들에 연민을 느끼는 건 아니다. 아내 메리앤을 집착할 정도로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던 레이를 옹호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아내 메리앤이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는 레이가 아내의 머리채를 잡은 것을 조금은 이해했다.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의 머리채가 아니라 팔이라도 부러뜨리고 싶지 않을까. 행동으로 옮기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지만 심정적으로는 미치광이로 변신시키는 게 사랑의 속성일테니. 레이와 메리앤은 사랑하는 연인이고 남편과 아내인 동시에 서로를 움켜쥐고 있는 필연의 관계였다. 에드가 드가가 연인 메리 커셋과 라이벌이자 어떤 선을 긋고 지냈던 것처럼. 레이와 메리앤도 사랑하지만, 어떤 한 부분은 서로에게 잡혀 있지만 (잡혀 있기를 원하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레이는 어떤 수순을 밟듯 메리앤과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시인 테스 갤러거와 마지막 생을 살았다. 나는 울었던 것 같다. 메리앤과 헤어질 때 메리앤이 레이를 위해 헌신한 일들이 떠올라서.(이건 순전히 소박한 독자, 여자의 감정이겠지) 하지만 레이와 메리앤은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만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진짜 사랑이, 끝났음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렇게 간단하게 마무리 지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의 끝, 그건 행복의 단맛과 달리 담백한 맛이 날 것 같다.
그가 자신의 삶에서 원했던 것은, 카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사랑 받았다 - 아들과 형제, 친구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두 번, 그리고 마침내 작가로서. 866쪽
그의 공허의 성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사랑받기 위해 글을 썼고 작가의 삶을 살았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오래 할 수 있는 일. 내 일을 선택할 때의 기준이었다. 레이도 그랬던 것 같다. 그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다. 그것은 글이었고 작가의 삶이었다. 레이의 주변 사람들 인터뷰를 성실하게 모았다. 증언은 지루할 수도 있는데 소박하고 일상적이어서 잘 읽혔다. 레이의 생애와 그의 작품에 대한 뒷 이야기, 짤막한 작품 분석들은 흥미로웠다. 책이 책을 부르듯 소설이 소설을 불렀다. 레이의 생애와 소설을 같이 읽느라 독서의 시간이 길었다. 이십여일만에 한 남자의 생애를 읽었지만 그를 이해하기 위해선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한 사람의 생을 내 생이 끝날 때까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단지, 부분 부분 깨닫게 되면서 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일뿐. 그의 작품이 남아있는 동안 그의 생에 대한 이해와 소설의 감동은 지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