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열고 들어오다 늘 그랬듯 오른쪽 책장에 시선이 멈췄고, 무릎 쯤 닿는 거리에 꽂혀있던 이 책이 눈에 띄었다. 그 위로는 편애하는 일본 소설들이고 왼쪽에는 시집과 에세이, 오른쪽에는 국외 소설들이 거주하고 있다. 가끔 한눈에 들어오는 책들이 있으면 '그냥 꺼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읽는다. 서점 바닥에 앉아 책 읽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요즘엔 동경만경이 꽂혀있는 칸의 책들이 자주 눈에 띄고 주로 그 책장에서 하나둘씩 불러내어 무작정 내 놀이 상대로 맞이한다. 지난주엔 가와카미 히로미의 선생님의 가방이 생각나 꺼내 읽고, 내친김에 만화도 읽었다. 체온계가 장착되있는 것처럼 선생님의 가방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그 세계에 압도 당한 것이 아니라 그 세계로 스르르 스며들어가는 것 같다. 그런 느낌 때문에 서점 바닥에 앉아 책 읽는 놀이를 하듯 무작위로 꺼낸 책을 책상으로 모셔오곤 하는데 동경만경도 그랬다. 사랑이 언제 끝났죠? ... 정말 모르겠어. 라는 대사가 압권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일식> 을 인용하는 미오는 닿을듯 말듯하며 연인으로 지내는 료스케와 마음을 터놓고 지내지 못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인터넷 미팅 사이트에서 만났다. 시작이 그랬기 때문인지 둘은 연결되있지만 쉽게 연결을 끊고 지내고 접속한(=만난) 순간에만 뜨겁다. 사랑하는데, 먼저 사랑한다고, 죽도록 사랑하니 나와 같이 죽자 살자 하며 사귀어보자는 말은 판도라의 상자인듯 꺼내지도 못한다. 헤어지는 게 두려워서, 헤어짐 이후의 이별을 홀로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이게 사랑일까 하는 의심에 혼란스럽다. 낯선 서로가 만나 말하고, 웃고, 나누고 하는 일들에 공허를 느끼고 있다. 지금 웃으면 뭐해, 금세 헤어질걸. 지금 사랑하면 뭐 해, 난 결국 혼자인걸. 새로운 기기 발명이나 편리한 삶의 도구들은 새로울 것도 없는 시큰둥한 일상이 되어버렸고 독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으면 이슈가 되지 않는 세상에 살다보니 외려 내 삶이 이상하게 외로워져 버렸다. 내가 그에게 접속하지 않는 순간, 나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없는 것 같은 이상한 외로움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접속할 때만 연인. 사랑이 언제 시작됐지? 정말 모르겠어. 미오도 료스케도 대답은 회피하고 있다. 한때 친구들을 만나는 게 두려웠던 적이 있었다. 잘 만나 놀고 헤어져 돌아설 때의 느낌이 애인과 헤어지는 것처럼, 때로는 그 이상 막연히 쓸쓸했다. 애인이면 결혼이라도 하지 친구들과는 결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마음을 많이 빼앗긴 탓이었다. 이럴때는 제도권이라는 영역이 감정을 다스리는데는 괜찮은 것 같은데 미오와 료스케는 결혼은 커녕 사랑이야? 아니야? 로 밀고 당기고 당기고 밀고 있다. 그 말을 과연 누가 먼저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물음표가 많아지면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성격을 의심해봐야 한다. 사랑의 초입은 단순하고 무지막지한 구석이 있어서 사랑한다면, 일단 밀고 들어가버린다. 우왕 좌왕하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일시적인 강렬한 감정일 수 있다. 망설여지면 사랑하지 마세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이렇게 멋있고 좋았나 싶게, 참 좋다, 고 잠깐 생각했다. 얘네 둘, 끝까지 이런다. 끝까지 막연한 감정을 시험한다. 긴자에서 만나기로 했던 두 사람은 서로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는다. 다음날 도쿄만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근무처에 있던 두 사람은 통화를 하며 서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끊임없이 서로를 탐색만 하던 미오와 료스케. 료스케가 미오에게 말한다.

 

"음, 만약에 말야, 지금 내가 여기에서 그쪽까지 헤엄쳐서 널 만나러 간다면...... 내가 너한테 싫증이 날 때까지 계속 내 곁에 있어줄래?"

"그게 머야. 너무 좋은 조건 아니야?"

".......자 그럼, 만약 내가 지금, 바다로 뛰어들어 도쿄만을 헤엄쳐 너에게...... 미오가 있는 곳까지 간다면, 날...... 끝까지 좋아해줄 수 있겠어?"

료스케의 말이 선명하게 미오의 귀에 와 닿았다. 농담이란 걸 알면서도 뭔가가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자기를 '미오'라고 불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좋아. 만약 정말로 료스케가 거기에서 여기까지 헤엄쳐 건너오면 끝까지 좋아할게."

미오는 일부러 진지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약속 장소에 동시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필연같은 우연으로 느껴져서인지 료스케는 대담한 제안을 하고 미오는 대담하게 받아들인다. 대담한 실험이 없이는, 목숨과 불가능을 걸지 않고서는 빠지기조차 힘들어진 엘오브이이. 이것이 이별을 대신하는 프로포즈라면 씁쓸하지만 받아들이겠다. 때로는 이별이 사랑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사랑 고백이라면, 같이 헤엄칠 준비를 해야지. 그게 사랑 아니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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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대로 글 쓰고 놀 수 있는 공간들을 모두 닫아버렸다는 걸 며칠전에야 알았다. 글이라는 게 나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쓰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말 할만한 것이 별로 없어서 입을 다물었고 손을 멈췄다. 그러다보니 나는 더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줄어버렸다. 먼지가 되기 전까진 글 쓰며 놀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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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5-13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웰컴! :)

플레져 2015-05-14 13:28   좋아요 0 | URL
하이:D

프레이야 2015-05-13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잘 오셨어요. 먼지 걷고 청소 좀 하셨나요? ㅎㅎ 먼지가 되기 전까진 쓰며 놀자에 동감입니다.

플레져 2015-05-14 13:29   좋아요 0 | URL
아차차... 먼지는 쓰면서 조금씩 날려버릴게요^^
잘 지내셨죠?

프레이야 2015-05-14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대문사진 보니 ‥ 시데 다녀오셨어요? 그동안

플레져 2015-05-14 21:13   좋아요 0 | URL
저 사진은 오래전에 걸어놓은건데요,
몇 년 전에 다녀온 터키, 파묵칼레에요 ^^

프레이야 2015-05-14 21:15   좋아요 0 | URL
아, 파묵칼레 입구. 저는 지난 12월에요.^^

icaru 2015-05-1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우아 반가워라잉ㅇㅇ;;

플레져 2015-05-14 21:14   좋아요 0 | URL
잘 지내셨죠? ^^
은근 슬쩍 방 문 열었어요~
 

  

 

 

 

 

 

 

 

 

 

 

 

 

 

2007년 1월 초, 그 해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발표되었던 그 때, 한겨레신문 문학담당 최재봉 기자의 기사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당선자들에겐 미안하지만 단편 소설이 아니라 장편을 써야 하는 시대, 라고. 정확한 문장은 아닌데 이런 뉘앙스는 분명하다. 비단 그 기사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그때부터 한국 소설에는 장편 소설 바람이 불었고, 온갖 장편소설 문학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돌풍이었다. 아마도 어떤 자구책이었을거라 생각한다. 단편에 치중되어있지 말고 장편도 같이 균형을 맞추자는. 그런데 그게 꼭 필요할까. 문학은 예술이고 예술은 어떤 지점에선 편향적이며 편협하다. 취향이 강하다는 뜻이다.

 

도서관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최재봉 기자의 <그 작가, 그 공간> 을 발견했고 선 채로 몇 페이지를 재미나게 읽었다. 책이 좀 두툼해서 빌리지는 않고, 도서관에 올 때마다 몇 장씩 읽기로 했다. 웹 검색의 꼬리들을 따라가다 한겨레 홈피에서 책의 근원이 된 기사 꼭지를 발견. 책에도 실려있을 평론가 김윤식 선생의 서재와 이야기가 담긴 동영상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단편이나 중편에 애착을 지닐 뿐 장편은 대체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국 단편은 장편의 역할을 해 왔어요. 전력을 기울여 쓴 것이니까 장편급이라 할 수 있지. 요즘 장편소설을 열심히들 쓰고 있던데, 결국 작가들이 출판사에 놀아나는 거라고 봐요. 단편에 이것저것 너절하게 넣어 살찌우면 뭐가 되겠어요? 장편(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장사꾼의 논리일 뿐이야.”

 

장편을 쓰라고 했던 기자와 단편 중편만 애정한다는 평론가의 우연한(?) 대화가 퍽 재밌다. 우리나라 작가가 쓴 소설을 좋아하고, 단편 소설을 좋아한다. 단편 소설은 짧지만 강렬한 그 무엇 이상이다. 장편소설 붐이 일면서 단편 소설을 읽던 나도 멈칫했다. 어떤 의무처럼 책을 주문할 때 장편소설 한 권쯤은 선별했다. 여기엔 얄팍하고 팔랑이는 내 귀도 문제겠지만, 그래도 모두들 장편, 장편하니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태생에 맞는 글 읽기를 강조하는 건 어떨까. 오래 자리를 지키며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엉덩이가 묵직해도 오래 한 자리를 지키며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출판 시장이 불황이다 파국이다 하는 시절에도 팔리는 책은 팔린다. 작가들에게도 매니아, 팬 층이 있지 않으면 책 한 권 팔기 힘든 세상인 것이다. 그러니 장편, 단편 가릴 것 없이 자기 자신에게 맞는 책을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떤 부류가 고집하고 선호하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내 몸의 생리구조에 맞춘 독서를 하는 게 낫다. 그리고 이미, 독자들의 생리 구조에 맞춰 읽으라고 세상에는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불황임에도 쏟아져 나온다.

 

다음 아고라에 서울시 교육감 후보, 민주진보진영 단일후보인 조희연후보의 둘째 아들이 쓴 글을 읽다가 오래 멈춘 대목이 있다.

 

이를 무릅쓰고 이렇게 글을 쓰는 건 저희 아버지가 최소한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인지 공정하게 평가받을 기회라도 얻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입니다. 인지도가 없으면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작가들의 책, 출판사들은 언제나 그 출판사가 그 출판사다. 마케팅과 홍보의 힘도 있겠지만 그 외의 출판사에서 책을 낸 작가들의 책을 만나는 건 참 어렵다. 그 사람들이 잘 쓰니까, 라고 말하면 할 말 없는데, 기회라는 것은 여전히 한쪽에만 향해 있는 것 같다. 이건 그들만의 잔치, 로 남게 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나는 우리나라 문학이 아는 사람만 아는, 한쪽으로만 치우친 어떤 장르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상의 문은 많은 것 같아도 열린 문은 언제나 좁을 뿐. 어디에도 휘둘리지 말고 내 취향에 충실하는 독서가 정말 재미있는 독서가 아닐까. 그러니까... 이글의 결말은 이렇게 하자. 선거를 잘하자. 선거 잘해서 세상 좀 바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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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5-30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하도 안 나타나셔서 이제 여기는 안 오시나 했습니다.ㅋ
잘 지내죠?
중국처럼 문학인에게도 나라에서 월급도 주고 하면 좋을텐데 항상 그런 생각을 해요.
단편 쓰는 게 장편 보다 어려운 건데 내가 작가라면 단편을 쓰고 싶고,
독자라면 장편을 읽고 싶고 해요. 이런 이율배반이 어딨습니까?ㅎㅎ
요즘도 글 열심히 쓰시죠? 어찌지내는지 궁금합니다. 플레져님.^^

플레져 2014-05-30 18:12   좋아요 0 | URL
보고 계시죠? 열심히 서재에 글 쓰고 있는 모습을...ㅎㅎ

다락방 2014-05-30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플레져님 아니십니까!
어제 영화리뷰는 집에 돌아가는 길 스맛폰으로 보았는데 오늘 이렇듯 피씨로 페이퍼를 만나니 더 반갑네요.(이게 대체 무슨말?)

간혹 들러주세요, 플레져님.

플레져 2014-05-30 18:15   좋아요 0 | URL
시스터 보셨나요? 이 더위에 겨울 배경이라 시원~하게 볼 수 있고...
또... 좋은 영화라 생각되니 꼭 보세요!
간혹, 때때로, 틈틈이 들를게요. 반겨해주셔서 감사해요 다락방님 ^^

푸른희망 2014-05-30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편을 무척 좋아합니다... 너무 단편만 읽어서 내가 읽기에 무언가 문제를 가지고 있는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지요.. 긴 호흡이 힘들고 장편도 좋은 작품이 많지만 뭔가 중언부언하며 곁가지가 많다는 생각도 하구요. 짧지만 길게 생각할 수 있는 단편을 좋아하면서 드러내기는 힘들었는데.. 왠지 내가 틀린 건 아니구나... 라는 위안을 받고 갑니다.. 잘 읽었고 공감합니다. 선거는 잘해야겠죠 !!

플레져 2014-05-30 18:16   좋아요 0 | URL
푸른희망님 안녕하세요.
단편을 좋아하시는 분을 근래에 첨 뵙는 것 같아 저도 반갑습니다.
지적하신대로 짧지만 길게 생각할 수 있는 여운을 주는 것이 단편소설인 것 같아요. 즐독하세요!

비연 2014-05-30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플레져님. 넘 반갑습니다!!!!

플레져 2014-05-30 18:16   좋아요 0 | URL
비연님 오랜만이에요 ^^!
 

 

 

 

2012년 작, 시스터를 보았다. 레아 세이두를 보려고....힛.

 

12세 소년 시몽은 스키장에서 스키와 스키 악세사리등을 훔치는 능숙한 도둑이다. 시몽은 훔친 물건을 동네 아이들과 리조트에 잠시 일하러 온 제 3세계의 노동자들에게 판다.시몽의 고객들은 물건의 출처를 알면서도 모른체 넘어간다. 시몽의 누나 루이는 시몽에게 용돈을 받아 쓰고 내키는대로 일을 관두고 남자를 만나고 가출했다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시몽은 루이에게 외려 용돈을 주고 그저 돌아와주기만을 바란다. 누나 루이는 시몽의 고객들처럼 시몽이 도둑질을 한다는 걸 알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만, 씁쓸하게 웃거나 웃지 않을 뿐이다. 시몽의 도둑질은 과감하고 리조트의 관리는 허술하다. 시몽과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은 시몽을 방관할 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몽의 세상은 더 쓸쓸하다. 누군가 나의 잘못을 크게 꾸짖어주지 않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나를 더 슬프게 하고 외롭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몽이 훔치고 팔고를 반복하던 끝에 겨울이 끝나가고 스키 시즌은 끝이 난다. 파장이다. 그제야 시몽의 외로움이 드러난다.

 

스키장에서 일하던 사람들, 휴가 온 사람들이 모두 떠났을 때 시몽은 외로움을 느낀다. 12세 소년이 지나치게 늙어 보인다. 인생을 본의아니게 오래 살아버린 노인처럼, 폐허가 된 도시에 나타난 리플리처럼, 종말의 끝에 혼자 살아남은 지구인처럼 시몽은 외롭고 혼자다. 그동안 시몽이 저지른 범죄들이 이해될 것만 같다. 시몽에게 도둑질이란 또래의 소년들처럼 친구와 가족과 놀이를 즐기는 시간이었던 것만 같은 것이다. 시몽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면 시간을 때울 수 없었고, 그것은 곧 가족이 있지만 없는 것과 같은 자신의 처지를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들켰을 테니까. 남의 물건을 훔치는 시몽에게는 거짓말도 자연스럽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스키장에 온 영국 부인에게 시몽은 자신의 부모가 아주 큰 호텔을 경영하고 있다며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고 그들의 식사 값을 치루려 선뜻 지폐를 꺼내는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그순간의 시몽은 소년이면서 부인의 가정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빈 옆자리를 차지하려는 성인 남자같다. 시몽은 왜, 열두살 소년의 보통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

 

시몽의 물건을 구입하는 어린아이들은 시몽이 스키도 무척 잘 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몽은 일(=훔치기)하는데만 열중하며 스키는 탈 줄 모른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시몽이 할 줄 모르는 것은 그뿐이 아니다. 시몽은 물건 훔치기에만 능숙하지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데 서툴다. 누나 루이에게 큰소리 치며 청바지 하나 사입으라고 베풀지만 누나는 시몽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늘 씁쓸하게, 불편하게만 바라본다. 거기에 두 사람의 비밀이 있다. 루이는 시몽의 진짜 누나일까? 시몽은 루이의 진짜 동생일까?

 

사람의 마음은 무척 정직하다. 사랑이나 정은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초 단위로, 분 단위로 차곡차곡 쌓이고 오고 가고 주고 받으며 학습되며 자라난다. 그런 과정은 가족이라는 단위에 속해있을때 배울 수 있다는 건 자명한 일. 시몽이 영국부인에게 진심으로 대하지만 그 진심은 나이에 맞지 않은 행동이고, 시몽 또한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단, 훔친 물건을 판 돈으로 누나의 환심을 샀던 것처럼 돈으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에 시몽은 영국 부인에게 진심을 베풀었지만 영국부인에겐 그저 자신의 가족을 잠시 도와준, 그러나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소년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시몽의 도둑질이 발각되어 스키장 출입이 금지되었을 때, 시몽은 고속도로 히치하이커로 변신하여 최선을 다해 또 훔친 물건을 판다. 어린 시몽은 왜 그토록 최선을 다해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차라리 보통의 소년 도둑처럼 물건을 판 돈으로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쓴다면 속이라도 시원했을까. 시몽에게 루이는 그리운 모성, 그리운 가족이다. 시몽은 자신이 보통의 아이들이 부모의 축복아래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사랑을 얻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소년은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과 바꿔서라도 괜찮은 가족의 구성원이고 싶었을 것이다. 심지어 시몽의 고객들은 자신의 가족에게 선물하기 위해 시몽의 훔친 물건을 기꺼이 산다. 그때의 시몽의 마음은 어땠을까. 시몽이 누나 루이에게 같이 자게 해달라며 돈을 지불하는 장면에서 그 마음은 들통난다. 누나의 배에 머리를 대고 누운 시몽은 그제야 어린 열두살 소년의 표정으로, 따뜻한 가족이 있는 소년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에 기꺼이 다가가고 마음을 사려했던 시몽에게 <빌리 엘리어트>의 가족이 있었다면, 또 하나의 빌리 엘리어트가 탄생했으리라. 열 두살 소년에게도 고독은 고독이고 외로움은 외로움인 것이다. 아마 어른의 고독보다 더 무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나태한 어른들보단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고독과 처지를 헤쳐나가려 하는 면면은 가히 서럽고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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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매일 짧게나마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라기 보다는 그날의 소소한 기록에 불과한 일들이다. 그날 통화한 사람, 오랜만에 문자 안부를 주고 받은 사람, 인터넷 주문한 상품, 라디오에서 들은 노래 제목, 새로이 알게 된 단어의 뜻, 그날 마신 커피의 양, 다음달 카드지출내역서 등등을 짧게 기록하고 낙서한다. 갑자기 적어야 할 메모도 다이어리에 다 쓴다. 그러면 그 계좌번호는 어디있지? 그사람 연락처는 어디있지? 할 필요 없이 다이어리를 찾으면 된다. 오늘 아침엔 제법 긴 일기를 썼다. 일기도 쓰고 짧은 기록과 낙서를 할 수 있게 된 건 올해 받은 제법 묵직한 다이어리 때문이다. 손바닥만한 수첩, 양장본 사이즈의 다이어리를 애용했었다. 내가 직접 날짜를 써야 하는 만년 다이어리 형태였다. 그러나 올해 선물받은 다이어리는 날마다 한 페이지씩 올해의 날짜가 새겨져있고, 그 한 페이지는 그날치 나에게 주는 여유처럼 느껴져 기록할 맛이 난다. 다이어리를 후루룩 넘기다보니 올해 내 앞에 다가올 날들이 참 많고, 고맙다는 생각마저 든다. 나이들었다. 모든 것이 다 고맙고 감사하다. 캄사!!

 

 

어제는 눈발 날리는 가운데 산책했다. 트레이닝복에, 패딩조끼에, 장갑에, 모자에 눈발이 그득그득 쌓였다. 돌아오는 길엔 눈발이 내 앞으로 들이쳐 얼굴은 고스란히 눈을 맞았다. 그게 다 얼굴의 반을 가려주는 마스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마스크가 보이기엔 좀 요상해도 한여름엔 자외선 차단 해주지 (과연...) 추운 날엔 보온효과도 커서 늘 애용한다. 마스크는 늘 내가 놓아두던 자리에 놓아두곤 했다. 한 며칠 산책을 걸렀더니 마스크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웬만해선 물건을 잘 잊어버리지 않는 편이다. 특히 매일 사용하는 일상 용품은 눈에 띄는 곳에 두어 잊어버릴 수도 없다. 첫번째 마스크를 잊어버렸던 날의 아득함이 떠올랐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다. 일몰 직전의 늦가을 산책로는 풀숲에서 기기묘묘한 소리가 들린다. 새들의 움직임이 빤하지만 해질 무렵의 소음은 괜한 오싹함을 선사하기도 하여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와 통화를 하면서 나는 마스크를 벗었다. 마스크를 벗지 않아도 통화는 할 수 있지만 먼 곳에서 전화를 걸어온 친구에 대한 예의 같아서 마스크를 벗고 통화를 했다. 마스크는 내 귀 한 쪽에 걸려 있었고 바람은 여전했다. 십 여분쯤 통화를 했을까. 통화를 마친 후 마스크가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내 손때가 묻은 소지품은 가치로 따질 수가 없다. 사소한 소지품이어도 그것이 사라지고나면 잠깐의 균열과 불편함이 생긴다. 당장 새것을 마련할 수는 있어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길을 잃은 그레텔의 두려움을 껴안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빠른 걸음으로, 뛰거나 걸으면서 내 뒤에서 따라오던 산책객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산책로에서 산책하는 이들은 거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시선이 마주쳐도 금세 외면하고 자신의 리듬으로 되돌아갈 줄을 안다. 내가 마주친 산책객들은 다섯 명의 여자들이었다. 그들 중 한사람이 나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읽은 것 같았다. 하필이면 그들 모두 그 흔한 산책객의 필수품인 마스크를 하고 있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마스크를 못 보셨나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게 왠지 유난스러워 보여서, 그녀들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결국 나는 마스크를 찾지 못했다. 그건 두고두고 어떤 안타까움을 주었고 산책로에 나설 때마다 한동안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마스크는 금세 장만했지만 손때가 묻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아쉬움이 오래 남았다. 그나저나 내 두번째 마스크는 또 어디로 간걸까. 패딩 점퍼 주머니도 뒤져보고, 심지어 침대 밑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없다. 얼른 약국으로 가 새 것을 사야하는걸까. 끙...

 

 

 

마스크만 잊어버린 게 아니었다. 읽었던 책 제목도, 내용도 잊어버렸다. 읽은 책을 또 주문하고 말았으니. 그것도 열흘 간격에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했다.

 

 

바로 이 두권이다. 문제의 두 권의 책. 
재미있게 읽었다. 독서 중 인상깊은 구절을 따로 메모해두기도 했다. 그런데 책 검색의 검색 꼬리를 따라가다가 이 책들이 몹시 신선하게 와닿아서...목차까지 확인했음에도 덜컥 주문을 한 것이었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여러번 읽어도 좋으니까, 다시 또 읽고 있다.

술꾼의 품격도 다시 읽어도 좋다. 다만, 이 책은 날이 풀린 후에나 읽어야겠다. 

(아, 그러고보니 술꾼의 품격을 페이퍼에 올린 적도 있는 것 같다.........ㅠㅠ)

 

 

 

이주은의 글은 편안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그림과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림과 잘 어울린다. 그녀의 책들을 다 소장하고 있다. 읽고 있으면 이주은이 말하는 그림과 다르게 또 다른 그림이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글의 모양새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사라지기만 하는 것 같지만 아주 새롭게 무언가를 떠올리게도 한다. 기억은 잊혀지는 특성보다 불현듯, 새삼, 문득 떠오르는 성질이 더 짙다. 어떤 일과 연관하여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면 그날은 행복한 날이 될 것이다. <셜록 시리즈>를 보면서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 언니는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언니는 늘 셜록과 괴도 루팡 사이에서 귀여운 갈등을 하곤 했다. 누굴 더 좋아해야할까! 나와 제법 터울이 났던 언니는 혼자만의 갈등을 즐겼고 결국 루팡을 선택했다. 대신 셜록이 살던 집 주소 베이커 스트리트 221B를 언니의 책상에 이름 붙였다. 그 시절 언니의 책상은 아주 컸다. 작은아버지가 학창시절 쓰던 책상이었다. 나는 언니가 학교 간 사이 그 책상에 누워, 아니 베이커 스트리트 221B에 불량하게 다리를 꼬고 누워 세계명작동화를 읽거나 잠이 들곤 했다. 책상은 나의 놀이터였고 어린 나에게는 과분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언니의 책상 이름을 떠올린순간...내 안에는 더 많은 기억들이 잠들어있다는 걸 알았다. 기억은 언제든 나를 찾아올거라는 생각에 문득 내일이, 미래가 기대가 된다. 올 한 해의 날짜가 꾹 꾹 새겨져있는 두툼한 다이어리의 날짜가 새삼 설레는 것도 다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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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1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12-02-0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쏙 들고 손에 챡 감기는 다이어리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요!
작년 연말부터 올해까지 다이어리 산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결국 대충 타협해서 쓰고 있습니다 ^^;

플레져 2012-02-02 22:08   좋아요 0 | URL
연말이면 다이어리 고르는게 연중 행사에요 ㅎㅎ
맘에 드는 다이어리 고르셨어요?
쓰다보면 곧 정이 들거에요^^

icaru 2012-02-02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늘 부르짖고 다니는 모토가 그것인데요, '기록 좀 하자고!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니까, 기억이 지좋을대로 사실 왜곡해버리는 횡포도 막을겸사...' 그러나 전, 기록을 잘 안 하네요. 못하는거지요 ㅎㅎ
셜록 시리즈라 하시면, 시즌2가 시작된 BBC 드라마를 말씀하시는 것일려나? ㅎ 명절에 시즌2 2부까지 봤거든요. 플레져님은 유년 시절도 멋지구리~해요!! ㅎ 기억력도 좋으시구..
이주은 씨는 알라딘에서였나, 어디에서였나 인터뷰 기사를 읽었었는데 그의 프로필에서 주부로서 일상을 고단하게 살았구나, 하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이주은 씨 글이 플레져 님에게는 그렇구나! 이렇다하게 읽은 책이 없으니, 꼭 읽어봐야지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문체나 글 스타일을 안다는게,,, ㅎㅎㅎ 저도 있거든요. 잘 읽히고, 내 주파수와 잘 맞다고 생각되는 문체!
아무튼, 다른분들 속삭이셔서 저도 비밀글로 속삭일까 하다가, 내용 중 은밀한 부분이 없으므로 통과--!

플레져 2012-02-02 22:10   좋아요 0 | URL
제가 얼마전에 정말 아주 멋진 스토리가 떠올랐거든요. 어떤 막연한 장면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생각이 안나는거에요 ㅠㅠ 그게 정말 엄청난 화력을 갖고 있는 장면같았다며 미련을 못 버리고 틈만 나면 그 장면을 떠올리려고 애쓰다...지쳐가요...흑.
이주은씨 인터뷰를 찾아봐야겠어요 ^^ 이분의 문체가 무지 편안해요. 정든 친구가 읽어주는 느낌 ㅎㅎ
담엔 은밀한 부분도 섞어주세요 ㅋㅋ

2012-02-07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14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