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초, 그 해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발표되었던 그 때, 한겨레신문 문학담당 최재봉 기자의 기사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당선자들에겐 미안하지만 단편 소설이 아니라 장편을 써야 하는 시대, 라고. 정확한 문장은 아닌데 이런 뉘앙스는 분명하다. 비단 그 기사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그때부터 한국 소설에는 장편 소설 바람이 불었고, 온갖 장편소설 문학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돌풍이었다. 아마도 어떤 자구책이었을거라 생각한다. 단편에 치중되어있지 말고 장편도 같이 균형을 맞추자는. 그런데 그게 꼭 필요할까. 문학은 예술이고 예술은 어떤 지점에선 편향적이며 편협하다. 취향이 강하다는 뜻이다.
도서관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최재봉 기자의 <그 작가, 그 공간> 을 발견했고 선 채로 몇 페이지를 재미나게 읽었다. 책이 좀 두툼해서 빌리지는 않고, 도서관에 올 때마다 몇 장씩 읽기로 했다. 웹 검색의 꼬리들을 따라가다 한겨레 홈피에서 책의 근원이 된 기사 꼭지를 발견. 책에도 실려있을 평론가 김윤식 선생의 서재와 이야기가 담긴 동영상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단편이나 중편에 애착을 지닐 뿐 장편은 대체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국 단편은 장편의 역할을 해 왔어요. 전력을 기울여 쓴 것이니까 장편급이라 할 수 있지. 요즘 장편소설을 열심히들 쓰고 있던데, 결국 작가들이 출판사에 놀아나는 거라고 봐요. 단편에 이것저것 너절하게 넣어 살찌우면 뭐가 되겠어요? 장편(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장사꾼의 논리일 뿐이야.”
장편을 쓰라고 했던 기자와 단편 중편만 애정한다는 평론가의 우연한(?) 대화가 퍽 재밌다. 우리나라 작가가 쓴 소설을 좋아하고, 단편 소설을 좋아한다. 단편 소설은 짧지만 강렬한 그 무엇 이상이다. 장편소설 붐이 일면서 단편 소설을 읽던 나도 멈칫했다. 어떤 의무처럼 책을 주문할 때 장편소설 한 권쯤은 선별했다. 여기엔 얄팍하고 팔랑이는 내 귀도 문제겠지만, 그래도 모두들 장편, 장편하니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태생에 맞는 글 읽기를 강조하는 건 어떨까. 오래 자리를 지키며 책을 읽는 사람도 있고, 엉덩이가 묵직해도 오래 한 자리를 지키며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출판 시장이 불황이다 파국이다 하는 시절에도 팔리는 책은 팔린다. 작가들에게도 매니아, 팬 층이 있지 않으면 책 한 권 팔기 힘든 세상인 것이다. 그러니 장편, 단편 가릴 것 없이 자기 자신에게 맞는 책을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어떤 부류가 고집하고 선호하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내 몸의 생리구조에 맞춘 독서를 하는 게 낫다. 그리고 이미, 독자들의 생리 구조에 맞춰 읽으라고 세상에는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불황임에도 쏟아져 나온다.
다음 아고라에 서울시 교육감 후보, 민주진보진영 단일후보인 조희연후보의 둘째 아들이 쓴 글을 읽다가 오래 멈춘 대목이 있다.
이를 무릅쓰고 이렇게 글을 쓰는 건 저희 아버지가 최소한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인지 공정하게 평가받을 기회라도 얻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입니다. 인지도가 없으면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작가들의 책, 출판사들은 언제나 그 출판사가 그 출판사다. 마케팅과 홍보의 힘도 있겠지만 그 외의 출판사에서 책을 낸 작가들의 책을 만나는 건 참 어렵다. 그 사람들이 잘 쓰니까, 라고 말하면 할 말 없는데, 기회라는 것은 여전히 한쪽에만 향해 있는 것 같다. 이건 그들만의 잔치, 로 남게 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나는 우리나라 문학이 아는 사람만 아는, 한쪽으로만 치우친 어떤 장르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상의 문은 많은 것 같아도 열린 문은 언제나 좁을 뿐. 어디에도 휘둘리지 말고 내 취향에 충실하는 독서가 정말 재미있는 독서가 아닐까. 그러니까... 이글의 결말은 이렇게 하자. 선거를 잘하자. 선거 잘해서 세상 좀 바꿔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