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문득 햇살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낮은 어둠이 깔려있을때, 문득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진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은 오전의 전부. 9시부터 11시 57분까지. 그 사이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야무지게 먹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더 풍요로운 오전 시간을 갖고자 좀 더 일찍 일어난 적도 있으나 내가 왜 이리 일찍 일어났을꼬...하는 엉뚱한 상념으로 두어시간을 흘려보냈다.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시간의 아량은 2시간 57분이다. 2시간 57분 안에 대단한 일을 저지르고 싶어 종종거리기도 하는데 대개는 가만히 앉아 시간의 흐름을 애써 잊고 있을 뿐이다.
아침부터, 실은 어젯밤부터 심보선 시인의 시를 읽느라 잠을 설쳤다. 아침형 인간이 자정 넘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불면 혹은 감상 (독서와 영화). 요즘엔 되도록 침대에 일찍 누워 이웃집 아이가 잠들기 전 책상에서 멀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의자를 질질 끌어 당겼다가 책상으로 밀어넣는 소리는 밤의 낭만인 것만 같았다.
<슬픔이 없는 십오초>로 한동안 나의 계절과 밤과 무력한 오후와 생기발랄한 점심을 사로잡았던 시인은 새 시집을 들고 불쑥 나타났다. 기별이라도 하지 그랬수, 라고 친숙하게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지만 시인과 나는 멀다. 어쩌면 생각보다 가까울지도. 여섯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심보선 시인의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을 읽는다. 나만의, 어떤 즐거움의 묘미를 발견하고 싶어서 뒷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발문, 시집의 해설을 쓴 이의 이름이 띠용- 하고 눈에 밟혔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것처럼, 물컹물컹 촉감을 느끼는 것처럼 발문을 쓴 이가 잠시 심보선 시인을 멀리하고 (미안해요, 시인이여!) 예쁘장하게 나타났다. 심보선 시인보다 먼저 좋아했던 (애정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볼까나~) 진은영 시인이다. 진은영 시인이 심보선 시인의 시집 발문을 썼다! 시인들이 어떤 연유와 어떤 시스템으로 발문을 써주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내게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나는 심보선 시인과 진은영 시인과 동시에 소개팅 하는 것처럼 (혼성 소개팅이라니!) 둥둥둥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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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과 부자 아버지를 갖는 행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는 세상에서 제일 큰 저택을 구입할지도 모른다. 너무 커서 옛 연인을 초대해도 그 저택 안에서 결코 마주치지 않을 만큼 넓은 집. 그곳에서 가장 크고 높은 나무에 올라가 몰래 망원경으로 살펴보면 그녀가 그와 사랑을 나누던 시절만큼 아름다운지, 아직도 무화과를 즐기는지 관찰할 수 있는 그런 집.
그렇지만 우리들의 진짜 아버지는 너무 가난해서, 혹은 유산 없이 돌아가셔서 우리는 그런 저택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거야. 낭만적으로 빛나는 장식과 가구 같은 말들로 채워진 언어의 저택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거리에서도, 허름하게 부서진 건물 안에서도 만나 연인이 되고 친구가 되고 사랑하고 슬퍼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 우리가 최근에 알게 된 가장 가난한 이는 모리스 블랑쇼였다. 그는 언어 속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상실하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난했다. 그가 내린 문학의 정의 속에서 시인과 독자는 전 재산을 탕진하는 도박꾼처럼 모든 것을 잃는다.
- 진은영의 발문 도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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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나는 소설책보다는 시집이 더 좋아
나는 시보다는 작가 연보가 더 좋아
나는 언제나 무덤에 가까운 쪽에 매혹되니까
(중략)
심보선의 시는 살아있음의 반대, 죽음의 연대와 하릴없는 혹은 할 일이 있으나 손에 잡히지 않는, 무연한 시선으로 가까운 것, 먼 것을 그저 바라보며 조우하고 있다. 침울하고 우울한 죽음의 연대가 아닌 나의 일생이 쌓인 과거들의 집합소인 소멸이다. 상조 회사의 광고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지나온 생애의 누적된 일상, 상처와 노래 혹은 쓸모없이 지나버린 어느날들의 기록으로서의 엔딩 장면, 내가 지나온 과거다.
<음력>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발 아래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지.
나는 그때 나의 이름을 어렵게 기억해내어
나에게 말했지.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야.
내일은 음력으로 모든 게 잊힌 과거야.
(중략)
심보선 시인을 읽던 밤, 문득, 내가 아는 보선이가 있었다는 걸 기억했다. 보선이는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다. 보선이는 덩치도 크고 키도 큰, 예쁘지 않은 부잣집 딸이었다. 나의 사춘기 시절엔 부잣집 딸은 무조건 이뻐야 한다는 편견이 지배하고 있었다. 보선이가 부잣집 딸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보선이는 가끔 생선 냄새를 풍기며 학교에 왔다. 나는 보선이의 부모가 찰진 진흙 밭에서 꼬막을 캐어 학교를 보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보선이의 감색 교복 재킷은 청결하지 않았다. 체크무늬 교복 치마는 풍성하고 비루했다.
그리고 어느날, 10년 만에 보선이를 만났다. 보선이가 졸업 앨범 주소록에서 우리 집 전화 번호를 보고 연락을 해온 거였다. (10년 사이 이사하지 않은 나, 전화 번호도 바뀌지 않은 내가 어떤 유물처럼 느껴졌다) 보선이를 대학로 예일디자인학원 지하 에스프레소에서 만났다. 그때 나는 에스프레소 카페의 단골이었다. 너른 실내는 나무 판자 바닥으로 깔렸고 짙은 네이비 2인용 소파와 짙은 초록색 테이블이 있었다. 아르바이트 생은 자주 바뀌었고 주인은 커피 리필에 관대했다. 진한 커피를 추출하던 정통 커피 전문점은 내 또래 아이들의 아늑한 아지트였다. 여러 개의 쇼핑백을 들고 와 쉬어가는 그녀들이 있었고, 지금은 죽어도 할 일이 없다는 게으른 표정의 그들이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곳에서 스터디를 하기도 했고 남자친구들을 만났으며 미래를 걱정했다.
그 곳에서 10년 만에 보선이를 만난 건 위치 설명이 쉬웠기 때문이었다. 보선이를 나의 세계로 무작정 데려와도 될까 하는 망상은 금세 거뒀다. 보선이도 나처럼 미래를 걱정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보선이는 중국 청도에서 유학중이라고 했다. 보선이는 가사 도우미와 함께 살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며 자랑했다. 내가 보선이와 친했던가. 보선이를 만난 후 보선이와의 친분 정도를 가늠하다니. 보선이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껏 멋을 낸 보선이와 아저씨들의 구겨진 셔츠 주머니에서나 나올 법한 구겨지고 허름한 담배갑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빨리 보선이와 헤어지고 싶었다. 청도에서 삼각관계에 휘말려 멋진 사랑을 했다던 보선이의 연애와 그 허름한 담배갑은 어울리지 않았고 보선이의 고백마저 거짓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결국 그날 나는 보선이의 술 한 잔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선이는 검은색 벨벳 재킷에 검은색 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검은색 스타킹, 검은색 구두를 신었다. 재킷에 받쳐입은 흰색 블라우스가 보선이의 마지막 순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보선이는 그 구겨진 담배갑을 검은색 가방에 넣고 청도에서의 러브스토리를 다 들려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나를 보내주었다.
여전히 나는 의문이다. 보선이와 내가 친했던걸까. 보선이는 왜 그날 내게 연락을 했을까. 나는 왜 보선이를 만나러 갔던 것일까.
<이 별의 일>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내가 아는 보선이와 심보선 시인은 아주 다르다. 그건 아주 자명한 일이지만 보선이와 아주 헤어진 것만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구겨진 담배갑을 (아! 정말 그 담배갑은 몹시 초라했다. 겨우 종잇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초라하고 누더기 같을 수가 있는지) 가방에 넣고 다니는 건 아닐까. <이 별의 일>에 기대어 보선이와의 질긴 기억을 '멸망' 모드로 기록하고 싶다. 그날, 보선이의 화려한 삼각관계에 어떤 조언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언제나 누구에게든 말하는 입 보다 듣는 귀가 발달한 사람이고 싶었다. 비록 늦었지만, 늦게 보선이에게 이르는 말, 그때 넌 참 예뻤어. 주머니에 금화가 가득한 부잣집 딸처럼 풍요로워 보였고 깔끔했어. 나는 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시인의 시를 읽으며 지내. 너는 어떻게 지내니? 졸업 앨범의 나의 주소록과 전화 번호가 바뀐 것처럼 나도 많이 변했어. 변했을 거라고 생각해. 너도 변했으리라 상상하며, 어두운 하늘에서 별이 초롱하게 빛나는 것처럼 너도 별처럼 빛나고 있기를.
<늦잠>
별은 어둠의 미묘한 순응자.
시간이 닦아놓은 밤의 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는 젖은 흙 위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잘 익은 사과 맛이 나는 발자국들을 찍으며.
나의 어느 쪽 귀에 더 많은 속삭임이 고여 있을까?
내가 모로 누워 웅크리고 자는 쪽의 반대편.
당신이 메마른 숨결의 흰 가루를 떨어뜨리는 그 움푹 팬 곳.
새벽의 결정, 입술에서 이슬로 옮아간다.
금화를 세어본 적 없는 당신의 손.
언제나 잘못된 시간의 열쇠를 아침에 건넨다.
등 뒤에서 당신은 나지막이 묻는다.
"지금은 몇 시죠?"
나는 생각한다.
멀리 떨어진 두 개의 눈동자를 이어주는 흙길.
녹슨 나침반의 떨리는 북쪽.
오전 열 시.
이제 일어나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