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흑백으로 만든 영화 『동주』를 보면서 두 번 울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그 두 장면이 어쩌면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던 것 같다. 한 번은 송몽규 때문에 울었고, 또 한 번은 윤동주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먼저, 윤동주와 달리 매사에 적극적이고 투사적인 기질을 지녔던 송몽규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본 경찰로부터 '범죄사실'에 대해 서명을 강요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가 끝내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의 독립운동 과정에서의 불찰'을 한탄하는 장면은 정말 격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대목에서 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많은 순국 선열들이 조국의 불행과 자신의 처지를 함께 바라보며, 남을 탓하기에 앞서 도리어 자기 자신의 구국 활동이 용의주도하지 못했음을 탓하며 저토록 처절하게 스러지고 말았던가. 특히 그 장면에선 가증스런 일본 고등경찰 때문에 뜨거운 분노도 함께 치밀어 올랐다. 남의 나라, 남의 민족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모든 제국주의 열강들의 비열함이 동시에 겹쳐 떠올랐던 것이다.

 

뒤이어 윤동주 시인이 같은 형무소에서 송몽규와 매한가지로 서명을 강요받았을 때, 그 또한 '조국의 불행'을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너무나도 연약하게 '한갓 시나 쓰면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서명을 하지 못하겠노라고 버티며 진술서를 마구 찢어버리는 장면을 보자. 그때는 시인의 타고난 천성 때문에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한없는 나약함'이 도리어 나를 슬프게 했다. 시인이 느꼈을 그 한없는 무력감과 차마 말로도 표현해 내지 못한 뜨거운 분노 앞에서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쟁으로 점철되다시피 했던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피지배 민족이 겪었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정복자들이 보였던 '극악무도한 잔인함'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래도 우리 민족은 '무수한 외세의 침입'을 잘도 버텨내고 여기까지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래도 '남의 나라를 억지로 짓밟은 부끄러운 역사'는 없었다는 일말의 자긍심이었다. 


어쨌든 3.1절 97돌을 맞아 여러모로 몹시도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주변 정세'를 함께 떠올리면서, 아직도 과거 역사에 대해 통절한 반성은 커녕 최소한의 교육조차도 여전히 생각할 줄 모르는 '제국주의 일본'의 잔학한 그림자마저 엿볼 수 있게 만드는, 기억에 남을 영화를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때맞춰 보게 된 이 영화를 내 글의 도입장치 겸 지렛대로 삼아 지금부터는 조금 더 개인적인 얘기를 사진들과 함께 잔뜩 늘어놓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들에게 크게 누를 끼치지 않는 범위내에서라면 아마도 나의 못난 시도를 얼마쯤 눈감아 줄 지도 모르겠다. 사실 '독립운동'에 관해서라면 이미 가까운 주변에서도 훌륭한 분들이 너무나 많은 형편이어서, 아무나 나서서 함부로 자신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내세우기가 꽤나 곤란한 것도 사실이다. 나 또한 이런 얘기를 글로 써 본 적은 아예 없을 정도다. 다만 결국 '집안 사람들'일 수밖에 없는 '동네 친구들'과는 그런 '선조들'에 대해 아주 가끔씩 얘기를 나누곤 해왔다.

 

그런데 우리 집안의 어르신들은 틈날 때마다 가문의 전통과 위신을 결코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어릴 적부터 우리에게 전수하는 걸 잊지 않으셨다. 오래 전부터 대대로 우리 집안이 '불천위(不遷位) 사당'을 모시는 가문이었으니 늘 '자긍심'을 갖고 살라고 말이다. 수백 년 전에 지어진, 우리 마을의 종가집 뒷편에 반듯하게 자리잡은 사당에는 임금님께서 직접 친필로 썼다는 사액현판(賜額懸板)이 걸려 있다. 그 사당엔 임진왜란때 혁혁한 공을 세운 우리 가문의 선조 할아버지 '위패'가 모셔져 있고, 그분의 후손들인 우리 집안 사람들은 아직도 해마다 '제사'를 모시고 있다. 자손대대로 그분의 덕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는 게 바로 '불천위 사당'을 모시는 집안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니까 말이다.

 

또한 우리 마을엔 일제 강점기때 마치 윤동주 시인처럼 '저항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분도 계신다. 비록 이육사 시인이나 윤동주 시인에 비해서는 그 명성이 많이 뒤떨어지지만 말이다. 마침 그 할아버지께서도 일제 시대때 일본에 건너가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바로 그  '릿쿄대학'을 나왔다. 귀국 후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전문 잡지를 창간하시며 왕성하게 활동하신 적도 있었지만, 끝내 시인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를수록 극심해지는  '일본의 통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낙향'하여 절필하고 칩거에 들어감으로써 '무언의 저항'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늘 우연히 발견한 '우리마을' 관련글들.

 http://www.dbdbstory.com/detail.php?number=1520&thread=22r08r04)

http://www.expres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314

 

이쯤에서 나의 얘기를 다시 저 멀리 '백두산'까지 돌려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나는 '백두산 종주산행'을 끝내면서 뜻밖에도 '시인 윤동주'의 발자취를 겨우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백두산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던 '시인의 모교'를 찾기 전에, 잠시 '백두산'부터 좀 둘러보자. 국경일마다 울려퍼지는 애국가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민족의 영산'이니 말이다. 내가 백두산을 찾은 때는 2007년 8월이었다.

 

 

 - 고산화원(高山花園)에서 바라본 백두산의 모습

 

 

 - 5호 경계비에서 청석봉으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만난 야생화

 

 

 - 청석봉으로 이동하는 도중 잠시 되돌아 서서 5호 경계비 쪽을 바라본 모습

 

 

 - 청석봉에서 한허계곡으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 백운봉에서 녹명봉으로 이동하는 등산객들의 모습

 

 

 - 뒤로는 수백미터 낭떠러지인 외륜(外輪)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친구와 함께.

 

 

 - 마침내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낸 백두산 천지의 모습(백운봉 근처에서 바라본 모습)

 

 

 - 드디어 외륜 종주의 막바지 부근(용문봉과 천문봉 사이)에 다 왔다. 우리 일행들 뿐이다.

 

 

 - 외륜 종주의 막바지 부근(용문봉과 천문봉 사이)에서 단체 사진 한 컷. 아직도 하산길은 멀기만 하다.

 

 

 - 악전고투끝에 종주산행의 실질적인 종착점이라 할 '장백폭포'에 다다랐다.

 

 

-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연길시에서 용정시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원경 관광)

 

 

- 역시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용정시내로 진입하기 직전에 버스에서 하차한 후 원경 관광)

 

 

 - 용정시내 대성중학교 교정 뜰에 있는 윤동주 시비, 문익환 목사도 이 학교 출신이다. 영화『동주』에서 배우 문성근이 등장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랬으나 결코 우연은 아닌 셈이다. 마침 문성근 배우의 자택이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서 가끔씩이나마 그 앞을 지나칠 때도 있고, 그와 마주치기도 하는데, 그래서 더 놀랬다.

 

 

 - 영화『동주』의 막바지에 감옥 창살 밖으로 비친 '밤하늘의 별'을 배경으로 낭송되던 서시(序詩)

 

 

 - 우리 일행은 '용정'을 거쳐 두만강까지 진출했다. 두만강 푸른(?) 물과 푸른 버드나무 아래에서 막걸리 한 잔

 

 

- 백두산 잣, 벌꿀, 기념 부채, 백두산 사진, 백두산 기념 수건, 백두산 화석, 그리고 <윤동주 시집> ......

 

 

 - 우리 일행이 산행했던 <백두산 종주 코스>

 

 

 - 2007년에 백두산 종주 산행때 함께 데리고 갔던 아들 녀석이 어느새 180cm가 넘도록 훌쩍 컸다.

   그 당시 중2에 불과했던 녀석이 건장하게 자라 지금은 어엿한 '대한민국 군인'이 되어 군복무중이다.

 

 

 - 광복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끝내 옥사하고 만 시인 '윤동주'의 삶을 회상할수록 안타깝기만 하다.

    영화 『동주』를 보고 나서 그런지 학사모를 쓴 시인의 앳된 모습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리다.

 

 

 - 1941년 11월에 쓴 <서시>의 육필 원고

 

 

 - <별 헤는 밤>의 육필 원고

 

 

 - <자화상>의 육필 원고

 

 

 - 윤동주 연보

 

 

오늘이 마침 3.1절이어서 그런지 이 글을 쓰는 동안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선구자 >라는 노래조차 그냥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그 모든 우리의 선조들께 오늘은 진심으로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드리고 그 분들의 명복을 빌고 싶다. 우리의 선구자이자 선조들이시여, 부디 고이 잠드소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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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6-03-0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을 먹고 앉아 이 글을 읽고 있으니 윤동주 문학관에 가족과 들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감옥의 느낌을 재현해봤다는 한 개조된 콘크리트 방 안에 갇힌 채 시인의 동영상을 봤었지요. 그때 문득 부끄러운 회고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유치한 시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부끄러움 탓에 안으로 숨어들어, 그 시를 읽어보는 것조차 힘듭니다. 텅 빈 수레 같은 저의 역사 의식 탓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한참을 모자라지요.

제게 고전을 가르쳐주신 한 노교수께서 정병욱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으셨던 까닭에 (가끔 당신께서 예의 대학 시절에 겪었던 공부의 어려움 등을 회고하실 때마다) 수업 시간에 윤동주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가르침과 배움이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어쩌면 저는 윤동주 시인과 그리 먼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위대한 정신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마음으로 글을 읽고 쓴다고 생각하면 정말 창피해집니다. 우물을 들여다봐도 제 눈에는 뭐가 보일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 글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p.s 산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제게는 언젠가 백두산을 꼭 올라가보자는 목표가 있습니다. 저는 북한 땅을 밟고 금강산을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에 북녘의 경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함께 오르는 산은, 그것도 북녘의 대산은 의미가 다르겠지요.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아주 부릅니다^^ 아, 그리고 아드님께서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oren 2016-03-01 22:26   좋아요 0 | URL
아.. 서울에도 <윤동주 문학관>이 있었군요. 용정 대성중학교에도 물론 <윤동주 기념관>이 있어서 `조선족 처녀`의 설명을 통해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었더랬지요. 그리고, 탕기 님의 아버님께서 산을 좋아하신다니 나중에 언제가 되든지 꼭 아버님을 모시고 백두산에 다녀오시길 바랄께요. 너무너무 좋답니다. 백두산을 실제로 올라가 보면 천지의 그 광대함에 넋을 잃을 지경이랍니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 아무리 백두산을 자주 봤더라도 실제로 가서 직접 보는 느낌하고는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있답니다. 정말 강추드립니다^^

프레이야 2016-03-01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가보았던 오일도 시비공원을 보니 무척 반갑습니다. 저 시비 `봄비` 옆에서 사진도 찍었지요.
윤동주와 같은 릿쿄대학을 나왔군요. 영양에 가게 되면 다시 한번 발걸음 하고 싶습니다.
영화 동주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페이퍼, 백두산 사진과 함께 잘 보았습니다.
오늘 아버지를 모시고 나들이 삼아 갔다온 진주성 북문 입구 앞 모 커피숍 유리문에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손글씨로 적혀 있었어요.
이북출신인 아버지가 좀더 젊었을 때 백두산을 다녀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금강산은 그 옛날 젊은 시절 몇 번 오르셨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진주성 한 바퀴 도는 것도 힘들어 벤취에 앉아 쉬고 있을테니 너희끼리 돌고 오라고 하십니다.
멋진 아들 군복무 건강히 마치고 오길 바랍니다.

oren 2016-03-01 22:4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님께서 `우리 마을`을 다녀가셨었군요. 오일도 생가는 국문학자들과 국문학도들만 찾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하기야 프레이야 님께서도 이젠 작가님으로 불러야 마땅하니, 마땅히 다녀가셨을 법하기도 합니다. 우리마을 인근에만 하더라도 조지훈 생가와 문학관, 이육사 생가와 문학관, 이문열 생가와 문학관 등이 즐비하니 한번쯤 두루 다녀갈 만도 하지만 워낙에 오지여서 발걸음 하기가 쉽지만은 않지요..ㅎㅎ

프레이야 님의 아버님께서 이북 출신이셨군요. 그래도 그리운 금강산을 몇 번 가보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는 군복무때 금강산을 철책선 너머로 여러 차례 구경만 했답니다. 잠시나마 `금강산 관광`이 허용됐을 때 잽싸게 가 볼 걸 그랬나봐요...ㅠㅠ

cyrus 2016-03-01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지와 함께 등산했던 날이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아드님이 저보다 잘 생겼고 듬직하군요. 멋진 남자 냄새가 납니다. 건강하게 전역하기를 바랍니다. ^^

oren 2016-03-01 22:41   좋아요 0 | URL
저도 아들 녀석과 등산을 함께 한 기억이 벌써 가물가물하답니다. 언젠가 아들 녀석하고 히말라야를 다시 오르고 싶은데, 아들 녀석은 `그 고생을 왜 일부러 사서 할까` 제게 되묻기만 한답니다. ㅎㅎ 사실, 백두산에 갈 때도 아들 녀석은 지금처럼 여전히 산을 별로 좋아한 것 같지가 않았는데, 그저 아빠가 함께 가자고 조르니 묵묵히 따라 나섰을 뿐이었던 터였지요. 성격이 워낙 좋아서 좀처럼 속을 썩히는 법도 없고 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듬직한 녀석이죠. ㅎㅎ

단발머리 2016-03-0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두산 사진도, 꽃사진도 너무 근사합니다. 듬직한 아드님도 너무 멋지구요.
윤동주의 육필원고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저는 아직 <동주>를 보지 못했는데, 듣게 되는 평이 모두 좋아서 기대가 됩니다.
어서 서둘러서 가봐야 할 텐데요. ㅎㅎㅎ

oren 2016-03-02 11:10   좋아요 0 | URL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북한을 통해 백두산을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던 적도 있었지요.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북녘땅을 통해 백두산을 다시 오르고 싶어요. 중국을 통해서 가면 꽤나 멀거든요.

영화 《동주》는 흑백영화라서 특별히 감동이 더하는 듯해요. 비록 전반적으로는 애잔하면서도 슬픈 영화지만, 그래도 감옥의 창살 밖으로 내다보이는 별들도 아름답고, 시인의 젊었던 학창 시절 모습도 풋풋하고 싱그럽답니다. 단발머리 님께서도 놓치지 말고 꼭 보세요~

yamoo 2016-03-0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을 안 할 수 없는 글이에요! 아드님도 멋지고!!

저는 요번 주 쯤에 동주를 볼 예정입니다. 기대가 많이 되어 실망하면 어쩌나 좀 걱정이 되긴 합니다.^^;;

oren 2016-03-07 17:38   좋아요 0 | URL
영화 <동주>는 여운이 참 오래 가는 영화더라구요.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 볼 때, 아직도 그 영화가 생각이 날 정도니까요. 야무 님도 놓치지 말고 꼭 보시길요~~
 
5년의 독서 : 읽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탕기 님의 기나긴 글을 읽고 나서 공감을 표시하는 따뜻한(?) 댓글 한 줄이라도 쓰고 싶었는데, 정말이지 마땅한 표현을 찾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네요. 그나마 님의 글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발견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하나의 미약한 연결 고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이런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식의 뜬금없는 먼댓글을 쓸 수도 없었겠지요.(니체가 마침『우상의 황혼』이라는 책에서 말했던 '다섯 손가락을 모두 보여주는 것은 점잖치 못한 일이다. 스스로를 먼저 입증시켜야만 하는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란 표현을, 하필이면 어제 오후에 펼쳐진 그 화려했던 '창밖의 폭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찾아 읽지 못했더라면 말이지요...)

 

아무튼 기나긴 글 쓰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5년 후, 10년 후에 좀 더 높은 곳에서 뒤돌아 보게 될 '야트막한 언덕 위의 작은 이정표' 하나쯤 미리 세워두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 싶습니다. 주제넘은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지만, 어쨌든 지치지 않는 '성실성'을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 * *

 

초보자이며 어린아이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고급한 인간류는 '직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간 여유를 갖고, 서두르지 않으며, '준비 완료'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않는다. ㅡ 30세라는 나이는 고급 문화라는 의미에서는 초보자이며 어린아이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제5절

 

 

 * * *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

 

사람들은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이 세 가지 과제가 목표로 하는 것은 모두 고급 문화이다.보는 법을 배우는 것 ㅡ 이것은 눈으로 하여금 평정에, 인내에, 그리고 자신에게-다가오게-놔두는 일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 판단을 유보하고, 개별적인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다루어보고 포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성을 위한 첫 번째 준비 교육이다 : 특정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억제하고 격리하는 본능을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비철학적 용어로 강한 의지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 거기서 본질적인 것은 결정을 유예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바로 그럴 능력이다. 비정신적인 것, 천박한 것은 모두 특정 자극에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에서 나온다 ㅡ 사람들은 반응해야만 하며, 개개의 자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런 당위가 벌써 병이고 하강이며 쇠진의 징후이다. ㅡ 비철학적인 조잡함이 '악덕'이라고 칭하는 것은 거의 전부 반응하지 못하는 생리적 무능력일 뿐이다. 보는-법을-배웠다가 응용되는 경우 : 배우는 자로서 사람들은 대체로 서둘지 않게 되고 불신하게 되며 저항하게 된다. 사람들은 적의 어린 평정 상태에서 모든 종류의 낯설고 새로운 것을 자기에게 다가오게 한다. ㅡ 그리고 그것에서 손을 뒤로 뺀다. 모든 문을 열어 개방하는 것, 온갖 사소한 사실 앞에서도 엎드리는 것,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물들 안으로-들어가고, 그-안에-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요약하자면 유명한 근대적 '객관성'이라는 것은 나쁜 취향이며 전형적인 저속함이다. ㅡ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제6절

 

 

 * * *

 

 

펜을 가지고서도 춤출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 : 이것에 대해 우리의 학교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대학에서조차, 심지어는 철학을 진정 배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마저 이론과 실천과 직업으로서의 논리가 사멸해가기 시작한다. 독일 책들을 읽어보라 : 그 책들은 생각하는 데에는 기술과 교과 계획과 뛰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ㅡ 우리가 춤을 배우려고 하듯 생각하는 것도 배우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이 춤의 일종이라는 것을 더 이상은 희미하게라도 상기시켜주지 않는다······ 정신의 가벼운 발이 모든 근육으로 옮기는 그 정교한 전율을 지금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독일인이 누가 있단 말인가! ㅡ 정신적인 동작의 뻣뻣한 무례함, 파악할 때의 굼뜬 손 ㅡ 이것이 독일적이다. 외국인들이 대체적인 독일적 본성이라고 혼동할 정도로 독일적이다. 독일인은 뉘앙스를 타진할 손가락이 없다······ 독일인들이 그들의 철학자들을, 그리고 특히 위대한 칸트라고 하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 중에서 가장 기형적인 개념의 불구자를 참아왔다는 사실이 독일적 온화함에 대해 알게 해준다. ㅡ 이라는 것은 어떤 형식이든 고급 교육과 분리될 수 없다. 다리를 가지고 춤출 수 있지만, 개념들과 말을 가지고도 춤을 출 수 있다는 것 ; 을 가지고서도 춤출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직도 말해야 할까? ㅡ 사람들이 이런 글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을?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제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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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과 칼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사슬' 안에서, 우리의 '칼' 사이에서 춤추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또 때때로 우리는 그러한 상황 아래 이를 갈며 우리 운명의 모든 비밀스러운 가혹함에 견디기 어려워 하는 것도 대단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한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6장 우리 학자들>, 제226절 

 

 * * *

 

인생은 그 속에서 지루해하기에는 수백 배나 너무 짧지 않은가?

 

성실함, 만일 이것이 우리 자유정신이 벗어날 수 없는 덕목이라고 한다면 ㅡ 그러면 우리는 모든 악의와 사랑으로 이것을 위한 작업을 해보고자 하며, 단지 우리에게 남겨진 우리의 덕 안에서 지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완성'해보고자 한다 : 그 덕의 광채가 언젠가 금빛으로 빛나는 푸르면서 조소하는 듯한 저녁 노을처럼 이렇게 늙어가는 문화와 그 희미하고 침울한 진지함 위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성실함이 어느 날 피로에 지쳐 한숨을 내쉬고 손발을 내뻗으며 우리 자신을 너무 가혹하다고 느끼고, 마치 기분 좋은 악덕처럼 더 낫고 더 편하고 더 부드러운 것을 지니고 싶어해도, 우리는 엄격한 태도로 남아 있자, 마지막 스토아주의자들인 우리는! 그리고 이 덕을 돕기 위해 우리 안에 오직 악마성으로 가지고 있던 것만을 보내도록 하자 ㅡ 졸렬하고 우연한 것에 대한 우리의 구토도, 우리의 '금지된 것을 향한 갈망'도, 우리 모험가의 용기도, 우리의 교활하고 까다로운 호기심도, 탐욕스럽게 미래의 모든 나라를 찾아 배회하며 열광하는 우리의 가장 섬세하게 위장된 정신적인 힘에의 의지와 세계 극복을 향한 의지도 보내도록 하자 ㅡ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악마를 데리고 우리의 '신'을 도우러 가자! 아마 우리는 이것 때문에 오해받고 혼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그들의 '성실함'ㅡ이것은 그들의 악마성을 말하는 것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령 그 사람의 말이 옳다고 해도 말이다! 모든 신은 지금까지 이와 같이 신성화(神聖化)되어 개명된 악마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를 인도하는 정신은 어떻게 불리길 원할까? (이것은 이름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신을 숨기고 있는가? 우리의 성실함, 우리 자유정신은, ㅡ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허영, 우리의 화려한 장식, 우리의 한계, 우리의 어리석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모든 미덕은 어리석음이 되고, 모든 어리석음은 미덕이 되는 경향이 있다. '성스러울 정도로 어리석다' 고 러시아 사람들은 말하는데, ㅡ 우리는 성실에서 벗어나 마침내 성자나 권태로운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인생은 그 속에서 지루해하기에는 수백 배나 너무 짧지 않은가?

 

- 니체, 『선악의 저편』, <제6장 우리 학자들>, 제2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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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6-02-2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는 정말 따뜻한 댓글입니다. Oren님과 댓글을 나누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항상 마음을 채워주셨지요. 저는 달아주신 인용구를 이면지에 적고, 펜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며칠을 생각하곤 합니다. 이런 말은 오만일 수 있겠지만, 좀 거칠게 포괄해보자면, 절반 정도 이해하면 ˝이런 인용구를 적어주신 의도를 알겠다. 대단한 분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그보다 이해가 점점 깊어지면 그때는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밭을 갈러` 갑니다. ^^

니체는 너무 진합니다. 너무 진해서, 다른 글들과 같은 날에 읽기 힘들어요. 저는 두어권의 책을 나란히 읽곤 해서, 니체를 인용구로든 아니면 서재에 꽂힌 제목으로든 읽기라도 하면 도대체 다른 책에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다행이도 `새벽`이라는 시간이 따로 있으니, 니체를 영접할(?) 기회는 매일 있는 셈이긴 하지만요. 저는 첫 번째 인용구에서 `니체적 따뜻함`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위안을 얻었습니다. 저의 나이가 딱 초보자이자 아이의 수준이라고 거의 늘 (오만할 때를 제외하면)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어쩌면 저는 매번 실패하면서도 니체가 `고급 문화`라고 부르는 어떤 특이한, Oren님께서 문학의 특수성을 말씀하실 적에 사용하셨던 그 `특수`라는 영역으로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그런 제게 니체는 성실함으로 그걸 `완성`해보자고 격려하고, 스토아적인 엄격함을 주문하는군요. 살이 떨리는 말입니다... 언제가 되야 저는 이 나태함과 정신적 병약함과 게으름과 객기와 분노와, 이런 것들을 물릴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편지 삼아 이 글의 먼댓글로 오늘 하루 동안의 생각을 적으려고 했지만, 제게는 짧은 글은 알라딘 서재에 올리지 않은 정언명령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주절거리는 글을 훌륭한 인용구 밑에 감히 끼워넣어봤습니다. 계속 니체의 인용구를 복기하겠습니다. Oren님의 공감과 조언, 가르침에는 항상 감사한 마음 갖고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앞으로도 저의 졸문(?)들에 거울을 비춰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

oren 2016-03-01 12:40   좋아요 0 | URL
탕기 님께서 남겨놓으신 긴 댓글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군요. 그런데 어떤 부분은 제겐 너무 과분하게만 느껴져 읽기가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탕기 님의 예민한 감수성과 특유의 진솔함과 단단한 결심들이 동시에 느껴져 다시금 저를 편안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해주기도 하네요.

탕기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니체는 정말 심연처럼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 철학자임에 틀림없는 듯합니다. 사실, 그의 내면은 너무나도 깊어서 어떨 땐 정말 `이 사람이 과연 인간인가` 싶은 생각이 들 때조차 있으니까 말이지요. 저는 니체를 만나기 전까지는 `쇼펜하우어`를 `인류의 천재 중의 천재 철학자`로 여겨 마음 깊이 존숭해 마지 않았는데, 니체를 읽으면서부터 적잖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쇼펜하우어에 대해 스스로 `우리의 스승!, 우리의 성자!`라는 극존칭을 써가면서 이야기를 끌고 가다가도, 금세 태도를 돌변하여 `스승의 결함`을 마구 들춰내면서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들을 펼치는데 엄청난 열을 올리니까 말이지요. 하기야, 그가 저돌적인 힘으로 밀어붙여 쓰러뜨리지 못할 `인물이나 사상`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기나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저 그런 일도 `당연지사`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넘어가야 할 일일 뿐인데도 말이지요.

어쨌든 니체라는 `심연`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전 준비`가 따로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마치 `젊은 처녀와 청년들만` 골라 잡아 먹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잡기 위해 다이달로스가 지어 놓은 미궁을 향해 바다 건너 크레타 섬으로 찾아가는 테세우스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시커먼 동굴의 입구를 주저없이 들어설 엄청난 용기뿐만 아니라, 마침내 괴물과 싸우고 난 뒤에 무사히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기 위하여 `아리아드네 공주`의 실타레마저도 미리 준비하는 세심함마저 필요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안도와 기쁨으로, 괴물 퀴클롭스의 동굴 속에 갇힌 오뒷세우스가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 마침내 거기서 무사히 빠져나와 `아무도 아니`였던 자가 바로 `나`였다고 큰 소리로 다시 외칠 수 있을 테니까요.(`퀴클롭스`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그림들도 많습니다. ☞ http://blog.aladin.co.kr/oren/7136954)

어쨌든 저는 용케도 니체를 마침내 지금에서야 마주치게 된 걸 여간 다행으로 여기지 않는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젊을 때` 읽기에는 가슴을 너무 격동시킬 만큼 문장이 벅찬 데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수많은 작품 속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마구 쏟아낼 때마다 거기에 거침없이 함께 딸려나오는 수많은 작가들과 철학자들과 음악가들조차도, 독자가 그들에 대해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그의 깊디깊은 생각을 올바로 부여잡지 못하고 금세 격랑에 휩쓸려 어디론가 떠내려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어쩄든 니체는 숱한 철학자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온갖 분야의 대가들을 끊임없이 우리 앞에 불러낸 뒤에, 열변을 토하면서 끊임없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독자들을 다그치는 데 조금도 지칠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까요.

니체의 책 속에서 아직도 여전히 낯선 인물들을 자주 만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젠 낯익은 인물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는 사실이 제겐 얼마나 위안과 기쁨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여러 음악가들과 그들이 지어낸 작품들(가령, 베토벤,모차르트,멘델스존,슈만,쇼팽,리스트, 그리고 특히 바그너와 그의 여러 작품들), 고대의 시인과 역사가들(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소포클레스 등 3대 비극시인과 특히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 투키디데스, 타키투스 등), 여러 문학 작가들(단테,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몽테뉴, 볼테르, 빅토르 위고, 스탕달, 괴테, 심지어 에머슨까지도!), 그리고 심지어 생물학자 다윈 까지도 이제는 마음 편히 만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제 댓글이 너무나도 길어졌군요. 댓글이 얼마나 길어질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끝으로, `한 사람에게 연연해서는 안 된다`던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댓글을 마무리해야 겠다 싶습니다. 오뒷세우스도 나우시카아 공주에 연연했더라면 결코 페넬로페를 다시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입니다.(˝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와 이별했을 때처럼, 그렇게 삶과 이별해야 한다. ㅡ 연연해 하기보다는 축복하면서.˝ - 니체, 『선악의 저편』)

* * *

독립성에 대한 시험

사람들은 자신이 독립할 수 있고 명령할 수 있도록 예정되어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적당한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아마 그 시험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놀이 가운데 가장 위험한 놀이일지라도, 그리고 결국 다른 심판관 앞에서가 아니라, 증인인 우리 자신 앞에서 행해지는 시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시험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에게 연연해서는 안 된다. 설령 그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 모든 사람은 감옥이며 또한 후미진 구석의 모퉁이다. 조국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대단히 위기에 처해 있고 도움이 필요할지라도 말이다. - 물론 승리에 찬 조국에서 자신의 마음을 떼어놓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동정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것이 우리가 우연히 보아왔던 보다 높은 인간의 기이한 고통과 고립무원의 상태에 해당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한 학문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 그것이 겉으로는 바로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귀중한 발굴물로 한 사람을 유혹할지라도 말이다. 자기 자신의 해방에 매달려서는 안 되며, 더욱더 많은 것을 자기 아래로 내려다보기 위해 언제나 더 창공 높이 날아오르는 새처럼 탐욕적으로 멀고 낯선 세계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 그것은 비상하는 자의 위험이다. 우리 자신의 유덕함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며, 전체적으로 우리는 예를 들어 우리의 `손님을 후대하는 친절`처럼 어떤 개별적인 덕의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 고귀한 품성을 지닌 사람과 풍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소모적이고 거의 무관심하게 자기 자신을 대하며 편견 없는 덕을 악덕에 이를 때까지 밀고 나가는데, 이는 위험 중의 위험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존할 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가장 강한 독립성에 대한 시험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제41절

단발머리 2016-03-01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글, 잘 읽고 갑니다.
이해하는 건 제 수준에는 많이 어렵지만, 감상은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니체는 어려워 미뤄두고만 있는데, oren님 글을 통해 한 줄, 두 줄이라도 읽게되니 참 좋습니다. ㅎㅎ

oren 2016-03-01 12:51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님 반갑습니다. 저도 가끔씩 단발머리 님과 같은 경험을 하며 즐거울 때가 있답니다. 제가 한 번도 읽을 생각을 못해봤거나, 혹은 나중에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하는 작품들 속의 문장을 `우연히` 발견하는 기쁨 말이지요. 그런 스치듯 만나는 인연들이 쌓여서 결국엔 나도 모르게 그 작가를 향해 조금씩조금씩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랄 때조차도 있게 마련이거든요. ㅎㅎ
 
번역 : 정신의 요람

 

탕기 님께서는 '번역 공부'까지도 일부러 따로 하시는군요.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탕기 님의 이 글을 읽어내려가다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마주치게 된  '시 번역은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는 대목을 접하고 나서야 마침내(?)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제게도 약간이나마 '덧붙일 말들'이 몇몇 떠오르는 걸 느낍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정도가 약간이나마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어쩌면 시는 '번역' 뿐만 아니라 애시당초에  '창작' 부터가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는 듯싶고, 특히나 범속한 사람들에게는 '접근 금지' 팻말부터 먼저 제대로 확인해 보고 나서 발을 내디뎌야 하는 몹시도 특수한 영역일지 모르겠다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제가 덧붙일 댓글은 사실상 거의 '인용'일 뿐이어서, 예전에 미리 갈무리해 둔 내용을 이렇게 '먼댓글 형식'으로 덧붙여 봅니다.)

 

 * * *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위대하고 참다운 시인만을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 독일에서 대단히 증가하고 있는 평범한 시인이나 엉터리 시인이나 우화작가 등 어리석은 무리들은 문제삼고 있지 않다. 이러한 무리들의 귀에는 사방에서 쉴 새 없이 다음과 같이 외쳐 주어야 한다.

 

사람도 신도 서점의 기둥도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Mediocribus esse poétis

Non homines, non Di, non concessere columnae                  ────호라티우스, 《시론》

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이 자기들과 타인의 시간과 종이를 얼마나 망쳐 놓으며, 또 그 영향이 얼마나 해로운가 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붙잡으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과 동질인 불합리한 것과 범속한 것에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평범한 작가들의 작품은 대중을 참다운 걸작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러한 작품들로 대중의 교양을 억제한다. 따라서 천재의 좋은 영향을 정면으로 방해하고,좋은 취미를 점점 해쳐서 시대의 진로에 역행한다. 그러므로 비평이나 풍자를 할 때는 용서나 동정을 하지 말고, 평범한 시인들에게 혹평을 가해서, 그들이 졸작을 쓰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읽는 데에 여가를 이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재적인 재능이 없는 시인들의 졸렬한 작품은 온화한 시신인 아폴론까지도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게 할 정도로 격노하게 한다. 나는 평범한 시가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 수 없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권,  <51. 시에 대하여>

 

 * * *

 

졸렬한 시인보다 더 자신을 가진 자는 없다

 

나는 무척이나 시가를 좋아한다. 남의 작품은 어지간히 알아본다. 그러나 사실 내가 시가를 써 보려면 어린아이 장난이 되어 버려, 스스로 참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은 다른 데서는 아무 데서라도 어리석은 수작을 할 수 있지만 시가에서는 못한다.

 

신들도 인간도

작품을 붙이는 기둥도

시인들의 평범함은 용서되지 않는다.                                  (호라티우스)

 

우리 출판사 사옥 앞에 이 격언이 붙어 있어서, 그 많은 사이비 시인들이 작품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진실로 졸렬한 시인보다 더 자신을 가진 자는 없다.    (마르티알리스)

 

어째서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없는가? 선대(先代) 디오니시우스는 자기 재주 중에도 시짓는 것을 가장 자랑삼았다. 올림픽 경기 때에 그는 화려하기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한 수레들을 가지고 제왕답게 금박을 하고 수를 놓은 천막에 깃발을 날리며, 시인들과 음악가들을 시켜서 자기 시를 제출케 하였다. 그의 시가 낭독될 때에 처음에는 그 운율이 우아하고 탁월한 데서 민중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 작품의 변변찬은 내용을 감식하게 되자, 그들은 처음에는 경멸하다가 점점 그 판단이 명확해지자, 금세 화를 내며 달려나가 그 깃발을 모두 쓰러뜨리고 찢어 내팽개쳤다. 수레도 역시 경기에서 아무런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부하들을 실어왔던 배는 시칠리아로 귀환하지 못하고 폭풍우에 밀려서 타렌토의 해안에 가서 부서졌다. 민중들은 이것이 확실히 신들이 그들과 같이 이 못된 시에 분개한 탓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난파에서 겨우 살아난 뱃사람까지도 이 민중들의 의견에 가담하였다.

 

그의 죽음을 예언한 신탁도 역시 어느 면에서 백성들에게 찬동하는 것 같았다. 그 신탁에는 디오니시우스가 자기보다 우수한 자들에게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에, 그의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고 실려 있었다. 이것을 그는 자기보다 우세하던 카르타고 인들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이 예언의 뜻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여러 번 승리할 기회를 저버리며 조절해 갔다. 그러나 그는 잘못 해석했다. 왜냐하면 신은 그가 아테네에서 자기보다 우수한 비극 시인들에 경쟁해서 《레네이아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상연시키고, 매수행위(買受行爲)와 부정으로 승리를 거두는 때를 그 시기로 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승리 뒤에 그는 갑자기 죽었다. 얼마간은 그가 이때 느낀 과도한 기쁨 때문이었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제2권, <17. 교만에 대하여> 중에서

 

 ** *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그러나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인간도 신도 서점(書店)의 진열창도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향연에 듣기 싫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진한 향유가 나오거나, 사르디니아산(産) 꿀을 친 양귀비 종자가 나오면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 없이도 향연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원래 영혼에 쾌감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도 정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심연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격검(擊劍)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연병장에서 무기에 손대지 않으며, 구기나 원반 던지기나 굴렁쇠 놀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관중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섭니다. 그런데도 시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이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용감하게 시를 씁니다. 하긴 왜 못 쓰겠습니까? 그는 완전한 자유민일 뿐 아니라 재산상으로도 기사 등급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품행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니 말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호라티우스/詩學>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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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나쁜 시인이기 때문에...

 

호메로스는 어떻게 모든 시인들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을까? 그가 그만큼 더 많이 관조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나쁜 시인이기 때문에 시에 관해 그토록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미적 현상은 단순하다. 단지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유희를 바라보고 항상 정령의 무리들에 둘러싸여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져보라. 그러면 시인이 될 것이다. 단지 스스로 변신하여 다른 사람의 몸과 영혼으로 말하려는 충동을 느껴보라. 그러면 극작가가 될 것이다.

 

-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8장

 

  * * *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는 물론 감미로워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얼굴은 웃는 자와 더불어 웃고, 우는 자와 더불어 우는 법입니다. 그대가 나를 울리고자 한다면 먼저 그대 자신이 고통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텔레포스여 그리고 펠레우스여, 그대의 불행이 나를 감동시킬 것입니다. 그대가 남이 시키는 말만 서투르게 늘어놓는다면 나는 하품과 웃음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비장한 말은 슬픈 얼굴에 어울리고, 위협적인 말은 성난 얼굴에 어울립니다. 그리고 변덕스런 말은 익살스런 얼굴에 어울리고, 진지한 말은 엄숙한 얼굴에 어울립니다. 자연은 그때그때의 경험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자연은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격동시키키도 하며, 무거운 근심으로 의기소침하게 하기도 하고, 불안으로 마음 조이게도 합니다. 그런 연후에 영혼의 감동을 바깥으로 표출시키는데 이때 혀가 그 통역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이때 화자의 말이 그의 체험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관중석에 앉아 있는 모든 로마 인들은 교양의 유무를 막론하고 폭소를 터뜨릴 것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호라티우스/詩學> 중에서 

 

 * * *

 

시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플라톤

플라톤은 시와 예술에 관해 따로 책을 쓴 적이 없고 주로 『이온 Ion』과 『파이드로스 Phaidros』와 『국가』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고 있다. 시와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복잡하다. 먼저 나온 두 대화편에서 그는 시인들을 칭찬하고 있으나 『국가』에서는 매우 위험한 자들이라며 가차없이 자신의 '이상국가'에서 추방하고 있다. 시인들에 대한 그의 칭찬은 모호하고 유보적인 반면 비판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불렀다.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플라톤/詩論>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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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6-02-24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범속한 시인들에게 혹평을 아끼지 않는` 독자 축에 들겠군요.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혹평을 하겠으나, 나이가 어려 예의 상 이렇게 서재에 숨어 지냅니다.

부모님께서 수 십 년 동안 국어교사를 하셨기에
가끔 시인 등단한 제자분들께서 감사의 뜻으로 시집 한 권씩을 보내주곤 합니다.
저도 창작의 문외한은 아니라... 시집을 읽으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죠. 심지어 교수를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한 현대문학 교수의 지적대로, 등단의 방법은 무수합니다.
문학상은 `다음 수상자`가 대체로 그 해에 이미 정해지기 마련이고요.
우리나라의 문인 수가 공식 협회에 등록된 것만 하더라도 만 명은 넘는다고 하죠?
교수는 지난 문학사의 반 세기를 놓고 `정지용` 외에는 남을 만한 시인이 없다고까지 역설하더군요.

문단의 벽은 낮아지고, 독자의 수준은 떨어지며, 그리하여 기억될 만한 가치 없는 것들이 회자됩니다.
저는 이런 출판과 독서의 문화를 곱씹을 때마다 현기증이 납니다.

모든 건 독자의 몫일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독자에게 실천의 몫이 남은 건 분명합니다.
저도 Oren님 말씀처럼 문학은 특수한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방법은 물론이고 작가의 자질에 있어서도요.

많은 공감할 수 있는 인용문들입니다. 이면지에 몇 줄 적어 훔쳐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p.s 여담이지만, Oren님의 인용 실천을 보고 있으면 문헌학에 매달렸던 젊은 시절의 니체가 떠오릅니다. 그 실천의 방법을 저도 배워봐야겠습니다.^^

oren 2016-02-25 12:31   좋아요 0 | URL
탕기 님께서 남겨주신 댓글을 읽어보니 어느 정도 짐작은 갑니다만, 제가 그 쪽 분야에 대해서는 아는 게 너무나도 없어서 뭐라 댓글을 달기조차 어렵군요. 시인들이나 시 작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제 고향에도 집안 어르신 가운데 한 분이 오래 전에 이름난 시인으로 활동하셨던 덕분에, 그 분의 시비뿐만 아니라 시문학공원까지 두루 마련되어 있는 형편인데도, 저는 어쨌든 `시`나 `문학` 쪽으로는 거의 한발짝도 내밀어본 기억이 없답니다.) 아무튼 유익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려요^^

아, 참, `젊은 시절의 니체`를 말씀해 주셨는데, 어쨌든 그 철학자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놀라운 발상`과 경이로울 정도로 다채로우면서도 격동을 불러 일으키는 힘찬 문장들 때문에 더욱 매료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는 `사상`으로 보나 `문장`으로 보나 초인(超人)다운 기질을 타고난 듯해요. 숱한 인류의 걸출한 인물들을 순식간에 납작하게 구겨서 간단히 쓰레기통에 휙~ 집어 던지고야 마는 거인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요? 결국 인류를 왜소하게 만드는 데 앞장서 왔을 뿐인 온갖 엉터리 `인물과 사상들`에 대해 가차없이 통쾌한 주먹을 날리는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과연 언제, 누구로부터 그런 우렁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아찔한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비로그인 2016-02-24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눈 호강을 하네요. 탕기님의 댓글까지 평론가 수준의 경지까지 보여주시니 ... ;^^

oren 2016-02-25 12:29   좋아요 0 | URL
시인 님께서 몸소 여기까지 찾아오셔서 댓글을 남겨주시니 제가 조금은 머쓱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시를 쓸 수 있는 재능은 오랜 세월 동안에도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겨우 허용된 매우 특별한 능력이었던 만큼, 시인 님께서도 앞으로 훌륭한 시들을 많이 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yamoo 2016-02-26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오렌 님은 고전 인용의 달인이십니다! 정말 적재 적소에 환상적으로 어울리는 고전의 인용! 배인화시인 님처럼 항상 눈호강 합니다~^^

oren 2016-02-26 14:27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하는 대목들이 늘 적재적소이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생뚱맞거나 뜬금없을 때도 결코 적지 않을 테지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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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배나 나쁜 것

 

백 배나 나쁜 것은 '관조하는 자들'이다 ㅡ : 나는 저 '객관적' 등받이 의자, 저 냄새를 풍기는 역사의 향락주의자, 반은 성직자 나부랭이며, 반은 호색가인 르낭Renan의 향기보다 구역질을 일으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르낭은 무엇이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지, 어디에 자신의 결함이 있는지, 이 경우에 어디에서 운명의 여신이 그 잔인한 가위를, 아! 너무나도 외과적으로 다루었는지를 이미 박수갈채를 보내며 가성(假聲)으로 소리 높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내 취미에 맞지 않으며, 또한 견딜 수 없다 : 그러한 장면을 보고서 더 이상 잃어버릴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참아내면서 보는 것이 좋다.ㅡ 나는 그러한 장면을 보면 분노한다. 그러한 '관객'은 구경거리(알고 있는 일이지만, 역사 자체) 이상의 '구경거리'에 대해 나로 하여금 화나게 한다. 이 경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나크레온풍의 기분이 된다. 황소에게는 뿔을, 사자에게는 크게 벌린 입을 준 이러한 자연, 그 자연이 나에게 발을 준 이유는 무엇인가? ······ 신성한 아나크레온Anakreon에게 그것은 단지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밟기 위해서였다! 썩은 등받이 의자, 비겁한 관조, 역사에 대한 호색적인 내시 근성,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한 추파, 성 불능이 정의인 척하는 위선 같은 것을 짓밟기 위해서였다! 나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전적으로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이 정직한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이것이 그 자신을 믿고 우리에게 못된 장난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마침내 무한한 것이 빈대 냄새를 풍길 때까지, 그 공명심이 지칠 줄 모르고 무한한 것의 냄새를 맡는 이 온갖 교태를 부리는 빈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인생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하얗게 칠한 무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지혜에 휩싸여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피로한 자와 쓸모없는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짚으로 만든 머리 위에 이상이라는 요술 두건을 쓰고 있는 영웅으로 분장한 선동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금욕주의자들이나 성직자들로 알려지기를 원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단지 비극적인 어릿광대일 뿐인 야심만만한 예술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이상주의를 믿는 이러한 가장 최근의 투기꾼들, 반(反)유대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적으로 아리아적으로 속물적으로 자신들의 눈을 까뒤집고, 가장 진부한 선동 수단인 도덕적 태도를 견딜 수 없을 만큼 남용함으로써 민중 속에 있는 멍청이의 요소들을 모두 불러일으키려고 한다(ㅡ오늘날 독일에서 온갖 종류의 정신적인 사기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부정할 수 없고 이미 명백한 독일 정신의 황폐화와 관련이 있다. 이 황폐화의 원인을 나는 신문과 정치와 맥주와 바그너의 음악을 너무 지나치게 섭취한 데서 찾는다. 게다가 이러한 섭생의 전제가 되는 것은 우선 민족적 강박과 허영, "독일이여, 만방에 빛나는 독일이여"라는 강력하면서도 협소한 원리이지만, 그 다음으로는 '현대적 이념'이라는 진전마비(震顫痲痺)이다). 유럽은 오늘날 무엇보다도 흥분제로 충만해 있고 그것을 발명하는 데 뛰어나다. 자극제와 브랜디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또한 이상의 어마어마한 위조, 이러한 정신의 브랜디도 필요하게 되며, 그러므로 또한 모든 곳에 널리 퍼져 있는 불쾌하고, 악취 풍기는, 거짓의 사이비 알코올 냄새도 필요하게 된다. 나는 이 유럽의 공기가 다시 좀더 청정한 냄새를 풍기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위조된 이상주의나 영웅의 복장이나 호언장담이라는 금속성 장난감의 뱃짐이, 얼마나 많은 설탕이 가미된 알코올성의 동정(상표 : 고통의 종교)을 담은 통[桶]이, 얼마나 많은 정신적인 편평족(扁平足) 환자를 돕기 위한 '고귀한 분노'라는 의족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교젹 도덕적 이상의 코미디언들이 오늘날 유럽에서 수출되어야만 했는지를 알고 싶다 ······

 

역자주) 진전마비 Paralysis agitans는 일명 파킨슨Parkinson 증후군으로도 알려져 있는 병으로 서서히 진행하며, 바른 보행, 특이한 자세, 근육 쇠약 등의 특징을 나타내고, 특히 노년기에 생기는 원인 불명의 병으로 보고되고 있다.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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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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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악질적인 전염병_인간에 대한 커다란 혐오, 인간에 대한 커다란 동정

 

두려워해야 할 것, 다른 어떤 숙명보다도 숙명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커다란 공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커다란 혐오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커다란 동정이다. 만일 어느 날 이 두 가지가 교미를 한다면, 어찌할 방법 없이 바로 가장 섬뜩한 어떤 것이, 즉 인간의 '최후의 의지', 허무를 지향하는 그의 의지, 허무주의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을 위한 많은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냄새를 맡기 위한 코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오늘날에도 들어가는 곳이면 거의 어디서나 정신병원이나 병원의 공기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ㅡ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인간의 문화권이나 바로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유럽'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가장 커다란 위험은 병자이다 : 악인이나 '맹수'가 아니다. 처음부터 실패자, 패배자, 좌절한 자 ㅡ 가장 약한 자들인 이들은 대부분 인간의 삶의 토대를 허물어버리고, 삶이나 인간이나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가장 위험하게 독을 타서 그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자들이다.  어디에서 사람들은 깊은 비탄이 실려오는 저 가려진 눈길을, 그러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는 바를 드러내는 선천적 불구자의 저 내향적인 눈길을ㅡ탄식하는 저 눈길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 눈길은 이렇게 탄식한다 : "내가 다른 어떤 존재였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희망이 없다. 나는 나 자신인 것이다 : 내가 어떻게 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ㅡ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진저리가 난다!" ······ 자기 경멸의 이러한 땅 위에서, 진정한 늪지대에서 모든 잡초, 온갖 독초들이 자라나며,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작게, 그렇게 숨어서, 그렇게 비열하게, 그렇게 달콤하게 자라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복수의 감정이나 뒤에 남은 감정의 벌레들이 우글거린다. 여기에는 비밀스러움과 은폐의 냄새가 악취를 풍긴다. 여기에는 언제나 악의적인 음모의 그물이 ㅡ 잘난 인간들이나 승리한 인간들에 대한 고통받는 자의 음모가 거미줄을 치게 된다. 여기에서 승리한 인간의 모습은 증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증오를 증오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이 무슨 기만인가! 무슨 호언장담이나 태도를 소모하고 있으며, 얼마나 '대단한' 비방의 기교인가! 이러한 못난 자의 입에서 어떤 고귀한 웅변이 흘러 나온단 말인가! 그들의 눈에는 얼마나 많은 달콤하고 끈적거리고 겸허한 복종이 젖어 있을 것인가!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최소한 정의 , 사랑, 지혜,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 ㅡ 이것이 이러한 '최하층 인간', 이러한 병자의 야심인 것이다! 그러한 야심은 사람들을 얼마나 능숙하게 만드는가! 특히 여기에서 덕을 각인하는 것이나 심지어 울리는 소리마저도, 덕의 황금의 음색까지도 모방하게 되는 위조지폐자의 능숙함은 놀랄 만하다. 그들, 이러한 약자들이나 치료할 수 없는 병자들은 이제 덕을 완전히 스스로 독점했는데,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즉 "우리만이 선한 인간이며, 의로운 인간이다. 우리만이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그들은 생생한 비난으로, 우리들에 대한 경고로 우리 주변을 배회한다. ㅡ 마치 건강, 성공, 강함, 자부심, 힘의 감정 자체가 이미 사람들이 언젠가는 그 대가를, 쓰라린 대가를 치러야 할 사악한 것처럼 말이다 : 오, 얼마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대가를 치르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으며, 얼마나 그들은 사형 집행인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 가운데는 재판관으로 변신한 복수심에 들끓는 사람이 가득하며, 이들은 언제나 독침처럼 '정의'라는 말을 입에 담고, 언제나 입을 뾰족 세워, 불만족스럽게 사물을 보지 않고 기분 좋게 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침을 뱉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 가운데는 또한 저 허영에 찬 가장 구역질나는 유형의 인간이 없는 것도 아니며, '아름다운 영혼'을 나타내려고 하며, 일그러진 관능을 시구나 기저귀에 싸, '마음의 순수'로 시장에 내놓으려는 거짓된 불구자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 이것이 도덕으로 지위행위를 하는 인간이나 '자기 만족자'의 유형이다. 어떤 형태의 우월감을 나타내고자 하는 병자들의 의지나 건강한 자들을 압제하는 사잇길을 찾는 그들의 본능ㅡ실로 가장 약한 자들의 힘을 향한 이러한 의지가 발견되지 않는 곳이 있단 말인가! 특히 병든 여자는 지배하고 억압하고 폭력을 행하는 정묘함에서 그 누구도 능가할 수 없다. 병든 여자는 살아 있는 자이든, 죽은 자이든 이런 일을 하는 데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는다. 그녀는 가장 깊이 묻힌 것을 다시 파헤친다(보고스족이 말하기를, "여자는 탐욕스런 이기주의자이다"). 모든 가족, 모든 단체, 모든 공동체의 배경을 살펴보라 : 그 어느 곳에서든지 건강한 사람에게 대항한 병자들의 싸움이 있다.ㅡ대부분은 약간의 독이 섞인 분말가루를 가지고, 아프게 찌르는 말로, 교활한 인내자의 무언극으로, 그러나 때로는 또한 '고상한 분노'를 가장 잘 연출하고자 하는 요란한 몸짓을 하는 저 병자의 바리새주의로 조용하게 싸우는 것이다. 격분해 날뛰며 지르는 병든 개들의 목쉰 소리, 물며 덤벼드는 그러한 '고상한' 바리새인들의 기만과 격노, 이것이 과학의 신성한 영역에까지 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들 생리적으로 실패한 자들이자 벌레 먹은 자들, 이들 모두는 원한의 인간들이며, 지하의 복수에 완전히 몸을 떠는 토양이며, 행복한 자들에 대해 감정을 터뜨릴 때에도, 또한 복수의 가면무도회를 할 때에도, 복수의 구실을 만드는 데도, 지치지 않고 싫증을 모르는 자들이다 : 그들은 도대체 언제 최후의 가장 세련되고 가장 섬세한 복수의 승리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 자신의 불행을, 모든 불행 일반을 행복한 자들의 양심에 밀어 넣는 데 성공할 때인 것이다 : 그러면 이들 행복한 자들은 어느 날엔가는 자신들의 행복을 수치스럽게 여기기 시작할 것이고, 아마 서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것이다 : "행복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너무 많은 불행이 있다!" ······ 그러나 이와 같이 행복한 자들, 잘난 자들, 몸과 정신이 강한 자들이 자신의 행복에 대한 권리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숙명적인 오해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전도된 세계'는 없어져버려라! 병자가 건강한 사람을 병들게 하는ㅡ이것이 그 유약화일 것이다ㅡ일이 없다는 것ㅡ이것이야말로 지상에서 최고의 관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 ㅡ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 병자의 모습을 경계하면서, 건강한 사람은 병자와 떨어져 있고, 건강한 사람이 병자와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이 모든 일이 필요하다. 또는 간호인이나 의사가 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일까? ······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더 이상 심하게 잘못 인식하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ㅡ 위에 있는 자는 밑에 있는 자의 도구로까지 자신을 격하시켜서는 안 되며, 거리의 파토스는 또한 영원히 양자의 임무를 마땅히 분리시켜야만 한다! 그들의 생존의 권리, 음조가 틀리고 깨어져버린 종에 대해 완벽한 음조를 지닌 종(種)의 특권은 실로 천 배나 더 큰 것이다 : 오직 그들만이 미래의 보증인이며, 오직 그들만이 인류의 미래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것은 결코 병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이며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들만이 해야 하는 것을 이들 병자가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들 병자가 어떻게 병자의 의사나 위안자나 '구원자'의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좋은 공기가 필요하다! 좋은 공기가! 어쨌든 문화의 모든 정신병원이나 병원의 근처에서 멀리 떨어지자! 그러므로 좋은 사교 모임, 우리의 사교 모임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을 때에는 고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안으로 향하는 부패와 은밀한 병자의 벌레 먹은 자리에서 나는 악취에서 멀리 떨어지자! ······ 나의 친구들이여, 이것은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 간직해두었을 수도 있는 두 가지 가장 악질적인 전염병에 대해서 적어도 잠시라도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ㅡ 즉 인간에 대한 커다란 혐오에 대해서! 인간에 대한 커다란 동정에 대해서! ······

 

 - 니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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