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흑백으로 만든 영화 『동주』를 보면서 두 번 울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그 두 장면이 어쩌면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던 것 같다. 한 번은 송몽규 때문에 울었고, 또 한 번은 윤동주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먼저, 윤동주와 달리 매사에 적극적이고 투사적인 기질을 지녔던 송몽규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본 경찰로부터 '범죄사실'에 대해 서명을 강요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자. 그가 끝내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의 독립운동 과정에서의 불찰'을 한탄하는 장면은 정말 격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대목에서 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많은 순국 선열들이 조국의 불행과 자신의 처지를 함께 바라보며, 남을 탓하기에 앞서 도리어 자기 자신의 구국 활동이 용의주도하지 못했음을 탓하며 저토록 처절하게 스러지고 말았던가. 특히 그 장면에선 가증스런 일본 고등경찰 때문에 뜨거운 분노도 함께 치밀어 올랐다. 남의 나라, 남의 민족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모든 제국주의 열강들의 비열함이 동시에 겹쳐 떠올랐던 것이다.

 

뒤이어 윤동주 시인이 같은 형무소에서 송몽규와 매한가지로 서명을 강요받았을 때, 그 또한 '조국의 불행'을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너무나도 연약하게 '한갓 시나 쓰면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서명을 하지 못하겠노라고 버티며 진술서를 마구 찢어버리는 장면을 보자. 그때는 시인의 타고난 천성 때문에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한없는 나약함'이 도리어 나를 슬프게 했다. 시인이 느꼈을 그 한없는 무력감과 차마 말로도 표현해 내지 못한 뜨거운 분노 앞에서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쟁으로 점철되다시피 했던 기나긴 인류의 역사에서 '피지배 민족이 겪었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정복자들이 보였던 '극악무도한 잔인함'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래도 우리 민족은 '무수한 외세의 침입'을 잘도 버텨내고 여기까지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그래도 '남의 나라를 억지로 짓밟은 부끄러운 역사'는 없었다는 일말의 자긍심이었다. 


어쨌든 3.1절 97돌을 맞아 여러모로 몹시도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 '주변 정세'를 함께 떠올리면서, 아직도 과거 역사에 대해 통절한 반성은 커녕 최소한의 교육조차도 여전히 생각할 줄 모르는 '제국주의 일본'의 잔학한 그림자마저 엿볼 수 있게 만드는, 기억에 남을 영화를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때맞춰 보게 된 이 영화를 내 글의 도입장치 겸 지렛대로 삼아 지금부터는 조금 더 개인적인 얘기를 사진들과 함께 잔뜩 늘어놓고 싶은 욕심도 생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들에게 크게 누를 끼치지 않는 범위내에서라면 아마도 나의 못난 시도를 얼마쯤 눈감아 줄 지도 모르겠다. 사실 '독립운동'에 관해서라면 이미 가까운 주변에서도 훌륭한 분들이 너무나 많은 형편이어서, 아무나 나서서 함부로 자신이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내세우기가 꽤나 곤란한 것도 사실이다. 나 또한 이런 얘기를 글로 써 본 적은 아예 없을 정도다. 다만 결국 '집안 사람들'일 수밖에 없는 '동네 친구들'과는 그런 '선조들'에 대해 아주 가끔씩 얘기를 나누곤 해왔다.

 

그런데 우리 집안의 어르신들은 틈날 때마다 가문의 전통과 위신을 결코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어릴 적부터 우리에게 전수하는 걸 잊지 않으셨다. 오래 전부터 대대로 우리 집안이 '불천위(不遷位) 사당'을 모시는 가문이었으니 늘 '자긍심'을 갖고 살라고 말이다. 수백 년 전에 지어진, 우리 마을의 종가집 뒷편에 반듯하게 자리잡은 사당에는 임금님께서 직접 친필로 썼다는 사액현판(賜額懸板)이 걸려 있다. 그 사당엔 임진왜란때 혁혁한 공을 세운 우리 가문의 선조 할아버지 '위패'가 모셔져 있고, 그분의 후손들인 우리 집안 사람들은 아직도 해마다 '제사'를 모시고 있다. 자손대대로 그분의 덕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는 게 바로 '불천위 사당'을 모시는 집안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니까 말이다.

 

또한 우리 마을엔 일제 강점기때 마치 윤동주 시인처럼 '저항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분도 계신다. 비록 이육사 시인이나 윤동주 시인에 비해서는 그 명성이 많이 뒤떨어지지만 말이다. 마침 그 할아버지께서도 일제 시대때 일본에 건너가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바로 그  '릿쿄대학'을 나왔다. 귀국 후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전문 잡지를 창간하시며 왕성하게 활동하신 적도 있었지만, 끝내 시인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를수록 극심해지는  '일본의 통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낙향'하여 절필하고 칩거에 들어감으로써 '무언의 저항'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늘 우연히 발견한 '우리마을' 관련글들.

 http://www.dbdbstory.com/detail.php?number=1520&thread=22r08r04)

http://www.expres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314

 

이쯤에서 나의 얘기를 다시 저 멀리 '백두산'까지 돌려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나는 '백두산 종주산행'을 끝내면서 뜻밖에도 '시인 윤동주'의 발자취를 겨우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백두산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던 '시인의 모교'를 찾기 전에, 잠시 '백두산'부터 좀 둘러보자. 국경일마다 울려퍼지는 애국가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민족의 영산'이니 말이다. 내가 백두산을 찾은 때는 2007년 8월이었다.

 

 

 - 고산화원(高山花園)에서 바라본 백두산의 모습

 

 

 - 5호 경계비에서 청석봉으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만난 야생화

 

 

 - 청석봉으로 이동하는 도중 잠시 되돌아 서서 5호 경계비 쪽을 바라본 모습

 

 

 - 청석봉에서 한허계곡으로 이동하는 길목에서

 

 

 - 백운봉에서 녹명봉으로 이동하는 등산객들의 모습

 

 

 - 뒤로는 수백미터 낭떠러지인 외륜(外輪)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친구와 함께.

 

 

 - 마침내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낸 백두산 천지의 모습(백운봉 근처에서 바라본 모습)

 

 

 - 드디어 외륜 종주의 막바지 부근(용문봉과 천문봉 사이)에 다 왔다. 우리 일행들 뿐이다.

 

 

 - 외륜 종주의 막바지 부근(용문봉과 천문봉 사이)에서 단체 사진 한 컷. 아직도 하산길은 멀기만 하다.

 

 

 - 악전고투끝에 종주산행의 실질적인 종착점이라 할 '장백폭포'에 다다랐다.

 

 

-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해란강'(연길시에서 용정시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원경 관광)

 

 

- 역시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용정시내로 진입하기 직전에 버스에서 하차한 후 원경 관광)

 

 

 - 용정시내 대성중학교 교정 뜰에 있는 윤동주 시비, 문익환 목사도 이 학교 출신이다. 영화『동주』에서 배우 문성근이 등장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랬으나 결코 우연은 아닌 셈이다. 마침 문성근 배우의 자택이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서 가끔씩이나마 그 앞을 지나칠 때도 있고, 그와 마주치기도 하는데, 그래서 더 놀랬다.

 

 

 - 영화『동주』의 막바지에 감옥 창살 밖으로 비친 '밤하늘의 별'을 배경으로 낭송되던 서시(序詩)

 

 

 - 우리 일행은 '용정'을 거쳐 두만강까지 진출했다. 두만강 푸른(?) 물과 푸른 버드나무 아래에서 막걸리 한 잔

 

 

- 백두산 잣, 벌꿀, 기념 부채, 백두산 사진, 백두산 기념 수건, 백두산 화석, 그리고 <윤동주 시집> ......

 

 

 - 우리 일행이 산행했던 <백두산 종주 코스>

 

 

 - 2007년에 백두산 종주 산행때 함께 데리고 갔던 아들 녀석이 어느새 180cm가 넘도록 훌쩍 컸다.

   그 당시 중2에 불과했던 녀석이 건장하게 자라 지금은 어엿한 '대한민국 군인'이 되어 군복무중이다.

 

 

 - 광복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끝내 옥사하고 만 시인 '윤동주'의 삶을 회상할수록 안타깝기만 하다.

    영화 『동주』를 보고 나서 그런지 학사모를 쓴 시인의 앳된 모습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리다.

 

 

 - 1941년 11월에 쓴 <서시>의 육필 원고

 

 

 - <별 헤는 밤>의 육필 원고

 

 

 - <자화상>의 육필 원고

 

 

 - 윤동주 연보

 

 

오늘이 마침 3.1절이어서 그런지 이 글을 쓰는 동안 라디오로 흘러나오는 <선구자 >라는 노래조차 그냥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그 모든 우리의 선조들께 오늘은 진심으로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드리고 그 분들의 명복을 빌고 싶다. 우리의 선구자이자 선조들이시여, 부디 고이 잠드소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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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6-03-0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을 먹고 앉아 이 글을 읽고 있으니 윤동주 문학관에 가족과 들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감옥의 느낌을 재현해봤다는 한 개조된 콘크리트 방 안에 갇힌 채 시인의 동영상을 봤었지요. 그때 문득 부끄러운 회고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유치한 시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부끄러움 탓에 안으로 숨어들어, 그 시를 읽어보는 것조차 힘듭니다. 텅 빈 수레 같은 저의 역사 의식 탓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한참을 모자라지요.

제게 고전을 가르쳐주신 한 노교수께서 정병욱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으셨던 까닭에 (가끔 당신께서 예의 대학 시절에 겪었던 공부의 어려움 등을 회고하실 때마다) 수업 시간에 윤동주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가르침과 배움이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어쩌면 저는 윤동주 시인과 그리 먼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위대한 정신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마음으로 글을 읽고 쓴다고 생각하면 정말 창피해집니다. 우물을 들여다봐도 제 눈에는 뭐가 보일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 글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p.s 산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제게는 언젠가 백두산을 꼭 올라가보자는 목표가 있습니다. 저는 북한 땅을 밟고 금강산을 다녀온 적이 있기 때문에 북녘의 경험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와 함께 오르는 산은, 그것도 북녘의 대산은 의미가 다르겠지요.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아주 부릅니다^^ 아, 그리고 아드님께서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oren 2016-03-01 22:26   좋아요 0 | URL
아.. 서울에도 <윤동주 문학관>이 있었군요. 용정 대성중학교에도 물론 <윤동주 기념관>이 있어서 `조선족 처녀`의 설명을 통해 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었더랬지요. 그리고, 탕기 님의 아버님께서 산을 좋아하신다니 나중에 언제가 되든지 꼭 아버님을 모시고 백두산에 다녀오시길 바랄께요. 너무너무 좋답니다. 백두산을 실제로 올라가 보면 천지의 그 광대함에 넋을 잃을 지경이랍니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 아무리 백두산을 자주 봤더라도 실제로 가서 직접 보는 느낌하고는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있답니다. 정말 강추드립니다^^

프레이야 2016-03-01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가보았던 오일도 시비공원을 보니 무척 반갑습니다. 저 시비 `봄비` 옆에서 사진도 찍었지요.
윤동주와 같은 릿쿄대학을 나왔군요. 영양에 가게 되면 다시 한번 발걸음 하고 싶습니다.
영화 동주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페이퍼, 백두산 사진과 함께 잘 보았습니다.
오늘 아버지를 모시고 나들이 삼아 갔다온 진주성 북문 입구 앞 모 커피숍 유리문에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고 손글씨로 적혀 있었어요.
이북출신인 아버지가 좀더 젊었을 때 백두산을 다녀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금강산은 그 옛날 젊은 시절 몇 번 오르셨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진주성 한 바퀴 도는 것도 힘들어 벤취에 앉아 쉬고 있을테니 너희끼리 돌고 오라고 하십니다.
멋진 아들 군복무 건강히 마치고 오길 바랍니다.

oren 2016-03-01 22:4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 님께서 `우리 마을`을 다녀가셨었군요. 오일도 생가는 국문학자들과 국문학도들만 찾는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하기야 프레이야 님께서도 이젠 작가님으로 불러야 마땅하니, 마땅히 다녀가셨을 법하기도 합니다. 우리마을 인근에만 하더라도 조지훈 생가와 문학관, 이육사 생가와 문학관, 이문열 생가와 문학관 등이 즐비하니 한번쯤 두루 다녀갈 만도 하지만 워낙에 오지여서 발걸음 하기가 쉽지만은 않지요..ㅎㅎ

프레이야 님의 아버님께서 이북 출신이셨군요. 그래도 그리운 금강산을 몇 번 가보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저는 군복무때 금강산을 철책선 너머로 여러 차례 구경만 했답니다. 잠시나마 `금강산 관광`이 허용됐을 때 잽싸게 가 볼 걸 그랬나봐요...ㅠㅠ

cyrus 2016-03-01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버지와 함께 등산했던 날이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아드님이 저보다 잘 생겼고 듬직하군요. 멋진 남자 냄새가 납니다. 건강하게 전역하기를 바랍니다. ^^

oren 2016-03-01 22:41   좋아요 0 | URL
저도 아들 녀석과 등산을 함께 한 기억이 벌써 가물가물하답니다. 언젠가 아들 녀석하고 히말라야를 다시 오르고 싶은데, 아들 녀석은 `그 고생을 왜 일부러 사서 할까` 제게 되묻기만 한답니다. ㅎㅎ 사실, 백두산에 갈 때도 아들 녀석은 지금처럼 여전히 산을 별로 좋아한 것 같지가 않았는데, 그저 아빠가 함께 가자고 조르니 묵묵히 따라 나섰을 뿐이었던 터였지요. 성격이 워낙 좋아서 좀처럼 속을 썩히는 법도 없고 해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듬직한 녀석이죠. ㅎㅎ

단발머리 2016-03-02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두산 사진도, 꽃사진도 너무 근사합니다. 듬직한 아드님도 너무 멋지구요.
윤동주의 육필원고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저는 아직 <동주>를 보지 못했는데, 듣게 되는 평이 모두 좋아서 기대가 됩니다.
어서 서둘러서 가봐야 할 텐데요. ㅎㅎㅎ

oren 2016-03-02 11:10   좋아요 0 | URL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북한을 통해 백두산을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던 적도 있었지요.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북녘땅을 통해 백두산을 다시 오르고 싶어요. 중국을 통해서 가면 꽤나 멀거든요.

영화 《동주》는 흑백영화라서 특별히 감동이 더하는 듯해요. 비록 전반적으로는 애잔하면서도 슬픈 영화지만, 그래도 감옥의 창살 밖으로 내다보이는 별들도 아름답고, 시인의 젊었던 학창 시절 모습도 풋풋하고 싱그럽답니다. 단발머리 님께서도 놓치지 말고 꼭 보세요~

yamoo 2016-03-0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을 안 할 수 없는 글이에요! 아드님도 멋지고!!

저는 요번 주 쯤에 동주를 볼 예정입니다. 기대가 많이 되어 실망하면 어쩌나 좀 걱정이 되긴 합니다.^^;;

oren 2016-03-07 17:38   좋아요 0 | URL
영화 <동주>는 여운이 참 오래 가는 영화더라구요. 가끔씩 `하늘`을 올려다 볼 때, 아직도 그 영화가 생각이 날 정도니까요. 야무 님도 놓치지 말고 꼭 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