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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읽던 책들은 주로 소위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구미의 소설들이었다. 집에 있던 청소년용으로 출판된 세계 문학 전집이 탐독의 대상이었다. 2단 세로 쓰기에 한자까지 섞여 있는 책이었지만 청소년용 답게 삽화도 있고, 초장편 소설들도 한권 분량으로 축약한 다이제스트본이었다. 가끔 완역 단행본으로 사서 읽은 책들도 있지만, 나의 고전에 대한 얄팍한 교양은 대부분 이 다이제스트 문고에 한정되어 있다. 대학생이 되면 더 이상 고전은 가까이 하지 않는게 그 시절의 알량한 독서 풍토였으니.
고전으로 추앙받는 명작들도 결국 다루는 주제는 대부분 통속 대중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남녀간의 사랑이다.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사랑'일까. 그 시절 읽었던 두 권의 소설은 몇 년간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잡담을 할때마다 내가 끄집어 내는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다. <폭풍의 언덕>과 <두 도시 이야기>가 바로 그 소설이다.
남자들이 여성에 대해 가장 보수적이고, 폭력적이고, 완고한 시각을 갖는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이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80년대'에 '남자 고등학교'를 다녔던 애송이의 머릿속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 학교는 여자 교사 한 명 없는 그야말로 숫컷들의 복마전이었다.) 마초이즘은 남성 교사들에게서 제자들에게로 유유하게 전수된다. 한참 혈기왕성한 남자아이들을 오십명이 넘게 방 한칸에 가두어 두었으니, 그 안에서 거론되는 이성에 대한 이야기들의 내용이 무엇이었겠는가. 나는 자연스레 성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과 남성 우월적 시각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의 비교,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시각등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나는 <폭풍의 언덕>과 <두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 그리고 작가의 성별을 놓고 열변을 토하곤 했었다.
"여성작가인 에밀리 브론테는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 가장 극적이고 격렬한 요소를 '질투'와 '복수'로 묘사하지. 그러나 우리의 위대한 남성 작가, 찰스 디킨즈를 보아라. 그의 사랑이야기는 목숨을 바치는 '희생'과 '헌신'이 아닌가. 히스클리프의 사랑과 시드니 카아턴의 사랑중에 무엇이 숭고한가? 여성 작가는 대승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남성 작가들을 문학적 성취도와 완성도에서 따라 올수 없는것 같다"
얼토당토 않는 편파적인 주장이었지만, 성장기의 소년에게 저 두 편의 소설이 깊은 인상을 남기긴 했나 보다.
별 쓸데 없는 이야기를 길게 남긴 이유는 바로 <용의자 X의 헌신>을 읽는 동안 내내 <두 도시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렸기 때문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대단히 '남성적'인 작가이다. 소설가 본인도 '여성 등장인물에 대한 섬세한 심리 묘사'가 가장 어렵다고 토로한 적이 있듯이 그는 대단히 담백한 남성적 시각을 가졌다. 결코 에둘러 가지 않는 그의 작품 스타일은 그의 이런 성향과 자연스럽게 어우러 진다. 오직 하나의 줄기에 집중하여 간결하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은 게이고의 독보적인 매력이다. 본격 추리 소설에 임할 때도 그의 이런 자세는 변함이 없다. 은근 슬쩍 감추거나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다. 모든 단서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본격 미스터리 작가로서는 너무 친절한 것이 아닌지. 그의 이런 우직한 남성적 사고방식이 '사랑 = 헌신'이라는 다소 순진하고 고색창연한 등식을 들고 나오게 된 배경이 아닐까. 그래서 이 소설은 남성적 작가의 사랑에 대한 판타지다. (비슷한 등식이 같은 작가의 작품인 <백야행>에서도 이미 등장한 바 있다.)
미스터리의 구조적 측면에서 보자면 가장 핵심적인 구도는 역시 천재 수학자와 천재 물리학자의 대결이다. 사건을 사이에 두고 그들이 나누는 선문답은 이 소설의 백미였다. 게이고의 소설 답게 책장은 정신 없이 넘어간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속도감은 롤러 코스터가 아니라 초고속 열차에 비견할 수 있다. 급박한 반전과 서스펜스에 정신없이 휘둘리기 보다는 그저 작가의 이야기에 편안히 실려 간다는(그렇지만 엄청난 속도로) 느낌을 준다.
작가가 이 소설을 구상했을 때 두 천재의 팽팽한 머리싸움과 트릭을 먼저 염두에 두었는지 그렇지 않다면 한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을 그리고자 트릭과 구성을 끌어 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트릭이나 탐정과 범죄자의 대결 구도 보다는 이시가미의 사랑과 헌신 쪽이 더 머리속에 남아 있다. 아쉽게도 소설의 중반부가 채 못되어 이시가미가 꾸민 트릭을 거의 완전하게 간파해 버렸다는 것과 어린 시절 읽었던 <두 도시 이야기>에 대한 오랜 기억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한 남자의 조건없는 사랑과 헌신을 당연하다는 듯이 그저 넙죽 받아들이는 여자 주인공은 얄밉고 짜증난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바뀐게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