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영화, 전쟁 영화 등의 장르에 국한하고 미스터리 소설이나 스릴러, 서스펜스 소설에 국한해서 이야기 해 보자면 '고전'이라 칭할 만한 시대의 작품과 현대물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아마도 '속도감' 아닐까?

현대물에 익숙한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멸의 고전이라 불리우는 영화들도 지루하기 짝이 없게 보일 수도 있다. 4~50년대 최고의 대중영화로 인기를 끌던 존 웨인이 등장하는 서부 영화들은 도데체 총싸움은 언제 할건지, 서설이 길기도 하다. '하이눈'의 게리 쿠퍼도, '셰인'의 알란 라드도 총을 들고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그러나 스파게티 웨스턴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를 보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등장부터 멋진 권총 솜씨를 뽐낸다. <석양의 무법자>는 첫 장면 부터 흥미진진하다.

가장 극적으로 내게 '현대'와 '고전'의 차이를 명징하게 보여주었던 영화는 <코만도>였다. 중학생 시절, 바글거리는 극장에 자리가 없어 계단에 앉아서 보았던 영화지만 보면서 자리가 불편하다는 생각을 미처 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그 시절 우리 동네의 극장들은 개봉관이라 할지라도 고정 좌석제가 아니었다.) <코만도>의 액션이 시작하는 시점은 영화가 시작한지 불과 5분도 되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 그리고 러닝타임 내내 그 액션은 끊기지 않았다. 1년 정도 앞선 시기에 개봉했던 <터미네이터>와 비교해 보아도 큰 차이가 난다. 작품성이나 스토리의 밀도감은 별 볼일 없는 영화였지만, 당대 액션 영화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던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이른바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숨쉴틈을 허용하지 않는다'라는 목표의식이 영화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고전이 무조건 현대의 영화에 비해 재미없고 지루한 것만은 아니다. 고전은 고전 나름대로의 흥취와 멋이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콰이강의 다리>, <벤허> 같은 영화는 <터미네이터>시리즈나 <인디애너 존스>, <반지의 제왕>같은 영화들이 주는 재미와는 또 다른 재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스피드와 스펙터클에 젖어있는 관람객이 고전 영화들 속에서 찾는 재미는 무엇일까.

소설도 마찬가지다. 특히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는 이런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갈수록 잔혹해지고 치밀해지고 복잡해지고 현란해지는 현대물에 비하면, 도일이나 크리스티, 퀸의 세계는 한가롭고 따분해 보이기까지 한다. 탐정도 순진하고, 범인도 순진하며, 당시의 독자들도 순진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걸작 <나일강의 죽음>같은 경우는 450여 페이지짜리 소설에서 첫번째 살인이 발생하는 시점은 무려 200페이지가 넘어서이다. 참을성 없는 독자라면, 책을 덮어도 열번은 덮을 수 있는 분량이 본론에 앞서 펼쳐진다. 반 다인의 소설은 어떤가. 그 끝없이 펼쳐지는 파일로 번스의 잡설과 무수한 각주들을 참아 넘겨야 사건의 진상과 결말을 맛볼 수 있다.

그 뿐인가. 그 당시에는 센셰이션을 불러 일으킬 만큼 놀라운 트릭들도 현대물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새로울게 없다. 온갖 기상천외한 범행 트릭과 갖가지 서술 트릭이 난무하는 일본의 신본격소설이나 다중반전이 밥 먹듯 일어나는 미국의 최신 스릴러 소설을 섭렵한 독자가 과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나 <Y의 비극>을 읽으면서 놀랄 수 있을까.

'고전'을 접하는 독자들은 뭔가 좀더 다른 '시각'과 '시선'이 필요한 건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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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9-14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변한 시대를 감안하고 그 시대를 생각하며 읽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이드 2006-09-14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올드핸드님 글이다~
요즘 독자.인 저는 최근 뤼팽.을 읽기 시작했답니다. 홈즈나 애드거 알랜 포우.는 왠지 컴플리트홈즈.정도로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고, ( 가지고 있고;; 그러나 안 읽고;;) 애거서 크리스티.는 재미있게 읽지만 찾아 읽지는 않고, 다행히(?) 현대스릴러물에 중독.된 것은 (혹은 그 잔인성과 엽기성과 과장등의 독자를 자극하기 위한 그 모든 장치들에 염증을 살짝 느끼고 있는 : 가장 최근에 읽은 추리소설 -> 눈은 진실을 본다) 아닌가봐요. 근래, 추리소설 추천해달라고 하는 비독자( 평소에 안 읽는) 가 몇명 주위에 있었는데요, 난감.하더군요. 뭘...뭘 추천하지? 그렇다고 거기다대고, 어떤 종류? 고전, 하드보일드, 일본사회파, 본격파, 호러, 법의학, 경찰/경감, 단편, 특이한 탐정, 홈즈앤왓슨물, 코지, 역사, 등등등 뭐? 라고 물을 수도 없고 말이죠. -_-;; (그나마 동생은 '반전 있는 추리소설, 일본 추리소설' 추천해달라고 해서 몇가지 주억거려주었지만서도) 난 추리소설은 아니 책.은 다 좋고, 그 중에서도 낭만적이고, 인간적인 추리소설이 좋아요.

paviana 2006-09-1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oldhand님
전 끝없이 펼쳐지는 파일로 번스의 잡설과 무수한 각주들이 좋아요. 느무 구닥다리인가 봐요.ㅎㅎ

oldhand 2006-09-1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 그렇게 읽어야 더 참맛을 느낄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모든 독자들이 그렇게 너그러운게 아니니..
하이드님 :: 눈은 진실을 본다.. 전형적인 현대 스릴러였지요. 모든 주인공들이 다 미남, 미녀들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하하. 비미스터리 독자가 추리소설을 추천해 준다고 하면 아무래도 저는 고전쪽을 먼저 소개하게 되더군요. 제가 읽어온 순서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뤼팽 시리즈는 재미있나요? 저도 이번 여름에 뤼팽을 6권 정도 구입했는데, 언제 읽게 될진 모르겠습니다.

oldhand 2006-09-14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댓글 다는 사이에 파비아나님이.. ^^
서재 마실 다니면서 무수히 뵌 분이라서 새삼스럽게 인사를 하자니 참 쑥스럽기도 합니다. ^^ 이렇게 먼저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전 파일로 번스의 잡설은 물론이고 교고쿠도의 그 끊임없는 장광설마저도 좋아한답니다. ^^

상복의랑데뷰 2006-09-1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터미네이터나 인디아나 존스도 고전이 되어버렸죠;;;

파란여우 2006-09-14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oldhand님(파비님 따라 흉내 내기)ㅋ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콰이강의 다리>, <벤허>,<터미네이터>시리즈나
<인디애너 존스>, <반지의 제왕>, <나일강의 죽음> 다 좋아합니다.
특히, <셰인>의 달밤에 악당들을 무찌르러 강 건너 산 넘어 달려가는 배경,
캬아, 잊혀지지 않아요. 마지막 장면의 메아리 셰인~~~~은 어떻고요
뒷 배경이 세트간판이라 시시껄렁하다는 말은 하지 맙시다.
주인공이 잘생기고 정의롭고, 마지막엔 비장하게 떠나가는. 네 명작입니다.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 하면서 동네방네 사건은 다 알아채는 미스 머플
이 할머니도 중학교때 참 총애했었는데. 지금쯤은 돌아가셨겠죠?^^

oldhand 2006-09-14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 님 :: 내가 요새 영화를 거의 안보니, 생각나는게 그 정도야.. 크크.
파란여우 님 :: 그 시절 흑백 영화는 어찌 보면 지루한데, 또 어찌 보면 감칠맛 나게 재밌고 그래요. 그러니까 파란여우 님은 잘생기고 정의로우면서 비장한 남자 주인공을 흠모하셨던 거군요. 하하. 중학생 시절 미스 마플을 총애하셨다면 동서미스터리 문고로 보셨겠네요?

paviana 2006-09-1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도 페이퍼도 잘 안 쓰는 불량서재인이라서, 예의라도 발라야 되겠기에, 내공있으신 분의 서재에 처음 댓글달때는 항상 인사를 드리지요.ㅎㅎ
<계속>이니까 다음 편을 기대해도 되겠지요?

oldhand 2006-09-15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공이라고 말씀하시니 민망합니다. 알라딘의 수많은 고수님들 앞에서.. ^^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고, 분위기도 다를것 같아서 뒷 이야기를 끊었는데.. 언제 뒷 이야기를 쓰게 될진 게으른 저로서는 장담하기가 주저스럽습니다.. 저도 불량서재인이잖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