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더닛(Whodunit), 퍼즐 미스터리, 본격 추리소설...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명칭들이다. 포우에 의해서 '발명'된 '추리 소설'은 이후 많은 작가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그리고 사실 포우가 '발명'한 '추리 소설'은 어쩌면 위에서 말한 후더닛, 퍼즐 미스터리, 본격 추리소설에 국한된 것일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비록 일본에서 명명되어졌지만 우리가 가장 흔하게 쓰는 '본격'이라는 용어를 쓰겠다)
1841년 신천지가 열렸다.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천재 포우의 발명품.
'본격'의 찬란한 황금기를 열어젖혔다고 회자되는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는 사실 '본격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포우의 작품들에 미치지 못한다. 그 대신 풍부한 모험적 요소와 불멸의 캐릭터들로 인해 큰 인기를 끌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도일 이후 많은 작가들에 의해 양산된 미스터리 소설들은 이후 '본격성'의 측면에서 한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 작가는 다름아닌 S.S. 반 다인이다.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언페어'라며 통렬히 비판하는 입장에 있었던 반 다인은 미스터리 소설의 미덕을 특유의 '정형성'에서 찾으려고 한 것 같다. 그의 작품들은 천편일률적이고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완변한 형식성을 고수하고 있다. 사건의 발생, 탐정의 개입, 관계자들의 심문, 제2, 3의 살인, (보너스로 반스의 장광설 -_-;)그리고 범인의 색출. 반 다인은 '작가는 독자들을 속여서도 안되며 탐정은 독자들이 모르는 사실을 혼자서만 알고 있어서도 안된다'라는 명제를 미스터리 소설의 기치로 내세웠다.
정통파 미스터리의 미덕은 천편일률적인 정형성인가.
반 다인의 유지를 이어 받아 본격의 시대를 찬란하게 열어젖힌 작가는 엘러리 퀸이다. 그의 데뷔작 <로마 모자의 비밀>은 반 다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지만 한 발 더 나아가 미스터리 역사상 최초의 시도를 하고 있다. '독자에의 도전'이 바로 그것이다. 국명 시리즈 전편과 <중간 지점의 집>까지만 등장하는 '독자에의 도전'은 명백히 작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도발적인 도전장이자 페어 플레이를 다짐하는 선언문이었다.
정력적인 독자들은 '도전장'을 마주하는 순간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 재독을 시도한다는데..
공교롭게도 <로마 모자의 비밀>이 발표된 1929년은 '추리 소설의 시작'이라고 불리우는 <모르그 가의 살인>만큼 중요한 또 하나의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본 해이기도 하다. 사무엘 더실 해미트가 '하드보일드의 시작' - <피의 수확>을 발표한 것이다. <피의 수확> 이후 하드보일드는 도도한 흐름을 형성하며 미스터리 소설의 주류로 떠오른다.
영미에 이어 미스터리가 큰 인기를 얻은 나라인 일본도 역시 이런 추세에 발 맞추어 마쓰모토 세이초 이후 사회파 미스터리가 압도적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제 미스터리 소설들은 여러가지 사회적 부조리를 파헤치기도 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기도 하며, 순문학에 못지 않은 빼어난 문체를 자랑하기도 한다. 어쩌면 현대의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단순히 '장르'가 아닌 '문학'으로 기능하고 인정 받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현대의 작품들은 '장르'적인 특성이 점점 희미해지게 되었고, 추리적 요소는 문학성이나 엔터테인먼트의 보조기능으로 전락하는 듯 보였다.
본격 추리 소설의 최대 이슈는 '트릭'이다. 황금기에 발표된 무수한 추리 소설들은 앞다투어 저마다 새로운 트릭을 개발해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마디로 '먼저 써먹는 사람이 임자'인 시절이었다. 엘러리 퀸도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보며 '나도 구상해 오던건데..'라며 탄식을 했다지 않는가.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듯이 '트릭의 황제' 존 딕슨 카 이후 더이상 기상천외하고 신선한 트릭은 없다고 여겨졌다.
극한 '트릭' 콜로세움. 트릭의 장인 딕슨 카의 생애 최대의 트릭이 펼쳐진다.
<점성술 살인 사건>은 바로 이러한 '본격'의 철저한 쇠락과 퇴조기에 등장했다. 폐지처럼 구깃구깃하게 버려진 50년 전 엘러리 퀸이 세상을 향해 던졌던 '독자에의 도전장'을 다시 손에 들고. 이후 많은 '신본격 미스터리'들이 세상에 나왔지만, <점성술 살인사건>만큼 고전에 가까운, 순수하리만치 모든 첨가물을 제거한 생짜 그대로의 '본격 추리 소설'은 드물다. 불가해한 사건이 있고, 탐정과 조수가 있고, 명쾌한 해결이 있을 뿐이다. 독자를 현혹하기 위한 어떠한 불순물이 들어갈 여지도 없다. 오리지널은 원래 순수한 법이다.
일본 미스터리의 출판 붐과 아울러 인기 작가들의 최신작들이 따끈따끈하게 국내에 번역되는 요즈음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좀 오래된 미스터리 애호가라면 그의 미스터리 편력은 아마도 도일과 크리스티로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나의 시작도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넓어진 취향과 관심거리를 가지게 된 지금에도 미스터리에 대한 이 장르적 편애의 근원은 역시 '본격 추리 소설'에 대한 향수가 아닐런지.
신본격의 기치를 내걸고 시마다 소지의 깃발아래 모인 일군의 작가들 역시 추리 소설 작가가 되기 이전에 이미 이런 매니아로써의 '본격'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던 독자들이었을 것이다. 새롭게 정식 출판된 <점성술 살인사건>을 읽으며, '그래 이맛이야, 이게 추리 소설이지!'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던 나는 속절없는 구식 추리 소설 독자임에 틀림없다.
내게 있어 미스터리의 본령은 역시 '본격'이다. 취향이 변하고, 안목이 변하여도 이 생각은 변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