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흉흉한 이 와중에 모처럼 종이책을 한 권 냈다. 제목은 <상처>. 좀 멜로틱한 제목이긴 하지만 확실히 추리소설이다. 그것도 하드보일드 풍이 가득한. 존경하는 로스 맥도널드와 챈들러, 해밋, 로렌스 블록 등의 흉내를 냈는데 확실히 대가가 왜 대가인가를 배웠을 따름이었다. 


사실 종이책이 워낙 안 팔려서 막상 책을 내봐야 투자한 출판사에게 면이 안 서는 결과만 낳기 마련이라 출판에 흥미가 좀 떨어졌는데 3년 만에 한 권 내고 보니 기분이 좀 업되는 건 있더라. 한두 명이라도 신작을 기다렸다는 덧글을 보고 많이 흐뭇하기도 했고, 그만큼 반성하는 기회가 됐다. 기다리는 독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작가는 글쓰기를 멈추면 안 되는 것인데 그간 너무 무성의하게 살았던 것 같다. 간만에 신작이 나왔으니 앞으로는 적어도 1년에 한 권 정도는 신간으로 인사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얼른 넷플릭스 끊고 게임도 끊어야 하는데...(먼 산). 


요즘은 SF나 추리, 공포, 좀비 등 한국 장르소설의 출간도 활발한 것 같고 괜찮은 성과를 거둔 분도 계시다는 얘기도 들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꾸준히 한국 장르소설을 아껴주시고 돌봐주시고 사랑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칭찬해주시고 챙겨주시고 도와주시고 구매해주시고 적선해주시고 서평써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많은 분들께 부족한 한국 장르소설가 중 한 명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부디 <상처>도 기억해주시고 기회가 닿으면 꼭 한 번 읽어봐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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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베스트를 뽑아놓고도 귀찮아서 나중에 써야지 했는데 벌써 6월이네-_-;; 코로나로 아직도 외출이 부담되는 분들의 즐거운 독서를 위해 늦게나마 정리해본다.


5위 <우먼 인 윈도> - AJ 핀











AJ 핀이라는 신인작가의 초대형 히트작. 미국에서 10여 년 만에 데뷔작이 베스트셀러 1위를 찍었으며 100만 부를 넘게 팔고 헐리웃에 영화 판권도 팔았다고 한다. 어떻게 썼길래 신인작가, 아니 작가라면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성공을 데뷔작으로 기록했는지 궁금했다. 600페이지가 넘는 매우 두꺼운 책을 하루 만에 읽고 역시 팔리는 물건에는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줄거리는 기본적으로 히치콕의 <이창> 70프로+<현기증> 30프로로 이뤄져 있으며, 히치콕만큼 유명하진 않은 90년대 스릴러 <카피캣>도 레퍼런스로 참조한 듯하다. 도입부에는 드러나지 않는 모종의 사건으로 광장공포증을 얻게 된 여성 정신과 의사가 있다. 그녀, 애나 폭스는 한국의 히키코모리(글쓴이 같은)에게 한 수 배워야 할 듯하다. 나 같으면 독서, 게임, 영화, 넷플릭스 등으로 하루가 모자랄 텐데 애나는 술과 신경의약품, 온라인 체스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러다 질리면 창문으로 동네를 구경하는 게 낙인데 어느 날 새로 이사 온 3인 가족의 아내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살해당했다는 아내를 데려오는데, 놀랍게도 멀쩡히 살아 있는 그녀는 며칠간 지켜본 그 여자가 아니었다! 음모와 계략으로 점철된 히치콕풍 세계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지만 문제는 애나가 광장공포증으로 외부 활동이 불가능하며 음주와 약물 의존증 때문에 주변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복이 불가능한 이중고와 싸우며 그날 밤의 진실에 접근해가는 애나에겐 빼어난 반전과 의외의 범인이 기다리고 있다. 작가는 그간 벌어졌던 기기묘묘한 일들이 차근차근 설명되는 결말에서의 복선 회수도 매우 잘해냈다. 게다가 주인공을 고전 스릴러 광으로 설정해서 영화 얘기를 많이 넣었으며 영화에 딱 어울리는 장면들이 많아 영화 프로듀서들이 군침을 흘렸을 법하다. 다만 독자가 지나치게 많은 분량과 느린 템포(200페이지가 지나고 나서야 사건 발생)의 이중고와 싸우며 독서를 해야 하는 건 단점이다. AJ 핀은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이 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동정표를 많이 얻었는데 알고 보니 모두 거짓말이었다. 본인은 우울증으로 인한 연극성 장애였다고 해명했지만 지금까지도 비난을 꽤나 받고 있다. 그러나 <우먼 인 윈도>에서의 실력을 보면 작가생활의 결정적인 문제는 안 될 것 같다.



4위 <조용한 무더위> - 와카타케 나나미











귀여운 곰 탈이 나오는표지 그림만 보면 서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소소한 사건을 해결하는 발랄한 일상계 미스터리 같지만 여기저기서 맞기도 하고 크고 작은 사고도 당하는 등 몸을 아끼지 않는 프로페셔널 탐정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하는 소프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단편집이다. 전체 6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첫 작품은 6월, 마지막 작품은 12월에 끝나 하무라의 반년을 보여주는 계절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표제작 '조용한 무더위'는 아주아주 유명한 고전 탐정소설의 모두가 아는 트릭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본격 미스터리이고, '소에지마 씨 가라사대'는 서점에 매인 하무라가 전화로만 인질극 사건을 해결하는 안락의자 탐정물이며, 제목부터 <붉은 수확>의 패러디인 '붉은 흉작'은 대실 해밋 류의 고전 하드보일드에 바치는 오마쥬, '성야 플러스 1'은 하무라가 고객의 귀중품(?)을 운반하며 겪는 온갖 위험 속에서 음모(?)의 실체를 깨닫는 모험물이다(이것 역시 제목 자체가 모험소설의 고전 <심야 플러스 1>의 패러디). 데뷔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부터 절찬받은 인간 내면에 은밀하게 자리잡은 악의, 독기 등을 은근하게 그리는 필체는 여전한 가운데, 하무라가 탐정뿐만 아니라 추리소설 전문 서점에서 알바로 투잡을 뛰기에 독특하고 유머 넘치는 조연들이 많이 나와 예전 작품들보다 한결 읽기 편안해졌다.예전에 초기작 두 권이 나왔다가 절판된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가 중간에 몇 작품 건너뛰고 국내에 새로 출간되는 셈인데, 그새 일본에선 드라마화도 되고 매년 신작들이 미스터리 전문 잡지에서 높은 랭킹에 오르는 등 오히려 예전보다 신분이 더욱 상승한 느낌이다. 2020년에 국내 출간된 <녹슨 도르래> 역시 뛰어난 작품이었다(나만의 2020년 베스트에서는 최상위권도 노려볼 만하다고 생각 중). 앞으로도 하무라 아키라의 활약이 속속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팬들은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3위 미스터리 아레나 - 후카미 레이이치로











작년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처럼 기발하고 새로운 기법으로 고갈 위기에 놓인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돌파구를 열어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아이디어로 반은 먹고 들어가는 추리소설이라 그 아이디어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향에 따라 반응이 극심하게 나뉠 듯. 도입부는 평범하게(?) 친구들 10여 명이 모인 산 속 콘도에서의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그 순간, 갑자기 챕터가 바뀌며 또 다른 화자가 끼어든다. 그는 바로 <미스터리 아레나>라는 추리 프로그램의 진행자. <홍백가합전>이 이미 역사 속에 사라진 근미래의 일본에서는 1년의 마지막 날을 온 가족이 이 프로그램과 함께 보낸다는데, 도입부의 살인사건은 실제가 아니라 이 프로그램의 문제에 불과했다. 이 문제를 풀러 나온 참가자들 중 가장 빨리 맞춘 1인만 거액을 받기에 확신이 서면 중간에라도 바로 버저를 누르고 답을 말해야 한다. '내 생각에 범인은 누구이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고.' 그런데 참가자들이 전부 추리소설에 쩛어 있는 것들이라 기상천외한 답을 쏟아낸다. 서술트릭, 성별오인, 정통 본격파, 다중인격 등 참가자들 수만큼이나 다양한 가설들이 말 그대로 쏟아진다. 독자를 속이는 추리소설의 고전적인 수법들이 총망라되고 있어 추리소설(특히 본격) 마니아들은 더욱 흐뭇하게 볼 수 있다. 더불어 작중의 문제가 추리소설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추리소설에 대한 소설, 즉 메타 추리소설이기도 해서 추리소설의 각종 법칙이나 클리쉐를 토대로 가설을 제시하는 참가자들은 영락없이 우리 추리소설 마니아들을 떠올리게 한다. 평범하게 하나의 사건에 하나의 해답이라는 추리소설은 더 이상 자극을 못 주는 걸까? <마루타마치 르부아>,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 이 작품처럼 마치 백화점식으로 여러 개의 가설이 폭죽처럼 터지는 추리소설로 한계를 돌파하려는 노력이 갸륵하기도 하고, 좀 애처롭게도 보이는 게 사실이다. 작가의 아이디어에 감탄했고 매우 흥미로웠지만 결말이 좀 와장창 느낌인 건 아쉬웠다. 기왕에 여러 가설이 나온 김에 정말 끝판왕 격의 강력한 정답이 제시되길 바랐는데 그런 스타일의 결말은 아니었다.



2위 <사일런트 페이션트> -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나를 찾아줘> 이래로 몇 년간 계속 지속되고 있는 도메스틱 스릴러 장르로 볼 수 있다.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음모, 살인이 주요 테마인 이 장르는 특히 전 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독서 시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20-40대 여성들의 구미를 사로잡아 몇 년째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해당 여성층은 밀리터리나 스파이, 액션, 프로파일러, 경찰물보다는 연애나 부부관계, 가정에서의 학대 등 현실적인 우리네 삶에 밀착된 얘기에 더욱 관심이 많아 보여 도메스틱 스릴러의 유행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얘기를 주로 다루다 보니 가정학대나 데이트폭력, 불륜 등의 소재가 남발되어 감정적으로 공감은 가지만 추리소설로서는 순도가 떨어지는 도메스틱 스릴러도 제법 보여 읽고 나서 실망한 작품도 꽤 된다. 독자의 공감을 얻고 너만 그런 게 아니라며 다독이는 소설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우리가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는 책장을 딱 덮었을 때 뒤통수가 얼얼한 반전이나 상상도 못했던 범인의 정체 같은 것에서 짜릿함을 느끼기 위함이 아닐까. 일상에서는 접하기 힘든 지적 쾌감 말이다. 특히 그런 점에서 <사일런트 페이션트>는 고만고만한 도메스틱 스릴러 중 단연 발군이다. 남편을 총기로 살해하고 몇 년째 입을 닫은 환자를 치료하려 노력하는 정신과 의사가 나오는 중심 줄거리는 뻔한 편인데 트릭에서 독자를 완전히 한 방 먹인다. 영국 작가가 아니라 아야쓰지 유키토나 아비코 다케마루 같은 일본의 신본격파가 떠오르는 음울한 분위기와 트릭지향적인 스타일이 서양 스릴러에 접목되니까 어디서도 접하지 못한 퓨전음식을 먹는 듯한 묘한 맛이 탄생했다. 기분 좋은 독서였고, 저자 알렉스 마이클리디스는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우먼 인 윈도>의 AJ 핀과 멋진 라이벌이 될 듯하다.



1위 <기도의 막이 내릴 때> - 히가시노 게이고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가히 추리소설의 제왕이라 할 만큼 인기가 드높은 히가시노 게이고지만 독자에게서나 평론가에게서나 비평적인 평가는 갈수록 떨어지는 추세인 듯하다. 워낙 많은 작품을 쓰다 보니 그중에 범작도 있고, 누가 봐도 돈 때문에 쓴 것 같은 안이한 작품들도 많아져서 자연히 평균이 내려간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추리소설가 중 한 명이고, 왕성한 생산력과 꿋꿋한 작가적 태도를 존경까지 하지만 어디서 그해의 베스트 추리소설을 얘기하는 자리에 게이고를 거론하는 건 좀 수준(?)이 떨어져 보이는 게 아닐까 스스로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의 막이 내릴 때>를 다 읽고 몇 번을 고쳐 생각해봐도 이 작품은 내게 2019년 최고의 추리소설이다. 이 양반이 날림으로 쓰는 것도 많지만 적어도 본인의 양대 캐릭터인 가가 교이치로 형사와 '갈릴레오' 유가와 교수 얘기는 문장부터 구성, 트릭, 아이디어 모든 면에서 공을 들인다. 하물며 작가의 자타공인 대표작인 가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서는 어떻겠는가. 데뷔를 <방과 후>로 했지만 실제로 제일 먼저 쓴 작품은 가가 시리즈의 첫 작인 <졸업>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게이고의 시작을 함께한 캐릭터를 영영 떠나보내는 것이니만큼 여느 때보다 집필에 힘을 준 덕분에 2010년대 게이고의 최고 걸작이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다. 특유의 신파도 <용의자 X의 헌신>에 버금갈 만큼 강력하지만 플롯은 그 작품보다 더 탄탄하게 짜여져 있다. 최후에 밝혀지는 눈물 쏙 빼는 사연 못지않게 가가 교이치로라는 민완형사의 날카로운 추리가 곳곳에 돋보일 수 있도록 안배를 잘 해놓았다. 이 정도면 감동 코드와 눈물을 잘 다듬어 세일즈하는 일급의 문화상품이자, 40년 가까운 노장 추리소설가의 저력을 보여주는 회심의 한 방이 아닐까. 나 역시 게이고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가가 교이치로라는 캐릭터와 영영 작별하는 게 너무 아쉽다. 아직도 필력은 여전하니까 남은 작가생활 동안 그 못지않게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주인공이 게이고의 펜 끝에서 또다시 탄생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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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환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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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첫 소개되는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는 것은 반갑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살짝 겁도 난다. 한 번도 검증된 적이 없는 주식에 투자하는 기분이랄까. 떨리는 기분으로 시모무라 아쓰시라는 작가의 <생환자>에 투자한 결과는 다행스럽게도 자못 만족스러웠다. 간략히 요약해 세계 3대 고봉 중의 하나라는 히말라야 칸첸중가 등반 중 벌어진 재난사고에 숨겨진 미스터리를 다루는 산악 모험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생환자>는 작가의 섬세한 취재와 안정적인 글솜씨, 이야기 전반에 걸친 흡인력, 몇 번의 반전과 의외의 진상 등 추리소설 평가의 모든 영역에서 수준작이라고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전문적인 영역을 다루는 추리소설은 다루는 소재의 특성상 열혈 팬과 다소 뜨뜻미지근한 독자가 나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예컨대 바둑을 주로 다루는 추리소설이라면 바둑 팬은 환장할 테고, 나 같은 바둑 문외한은 아무래도 흥미가 덜 생긴다. 이 점은 철저하게 고봉 등반에 집중한 <생환자>도 예외가 아닐 텐데 등산이라고 동네 뒷산 정도만 가본 사람들은 지레 지루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할 터. 하지만 그런 걱정은 잠시 넣어두셔도 좋을 것 같다. 꼭 등산 얘기가 아니더라도 320쪽에 불과한 분량 안에서 정말 다양한 수수께끼가 펼쳐져 끊임없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등산이라고 동네 뒷산 정도만 가본 나조차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끝까지 읽었을 정도이니까.

눈사태 사고로 칸첸중가에서 형을 잃은 프로 등반가 동생이 주인공이다. 슬픔에 잠겨 형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형의 자일을 누군가 몇 가닥 끊어놓은 것을 발견한다. 물론 형은 자일 사고로 사망한 건 아니지만 누군가 형을 살해하려 했던 것일까? 게다가 형은 4년 전 비슷한 눈사태로 애인이자 동료 등반가였던 여자를 잃고 그동안 산을 멀리했었다. 4년 만에 그것도 극한의 위험지인 칸첸중가를 다시 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는 한편 형이 소속된 등반대와 같은 장소에서 단독 등반했던 사람이 간신히 생환해 고립된 자신을 매몰차게 버리고 갔던 등반대의 비열한 행적을 고발하는 일이 일어난다. 늘 산과 산악인을 사랑했던 형의 숨겨진 진면목이 고작 그런 것이었을까? 주인공이 느끼는 마음의 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형과 같은 소속의 등반대 중 유일한 생존자가 나타나 앞선 단독 등반자와 정확히 반대되는 증언을 남긴 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둘 중 한 명이 거짓말을 하는 건 확실한데 둘 중 누가,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짤막한 내용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까?, ---을까?가 몇 번이나 나온다. 대체 이 수수께끼들을 전부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해 죽겠는데 작가는 풍선 입구를 막아놓듯이 철저하게 비밀을 감춘다. 부푼 풍선이 터져나가기 직전, 이 소설의 진정한 하이라이트가 시작된다. 소설의 마지막 1/3 지점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을 돕는 기자, 두 명이서 사건의 핵심 용의자를 추적하기 위해 직접 칸첸중가에 오르는 것이다. 성난 대자연이 무심하게 던지는 온갖 위험과 맞서싸우던 주인공 일행은 그 험난한 과정 속에서 형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낼 단서를 차곡차곡 모은다. 최후에 밝혀지는 진실은 마침내 정상 등반에 성공한 주인공이 마주치는 무지개 같이 선명하고 아름답다. 복잡한 여러 개의 수수께끼가 낱낱이 풀리는 쾌감이 더할 수 없이 짜릿하며, 산과 산을 오르는 사람에 대한 연대의식이 공감가게 그려져 가슴 뻐근한 감동마저 느껴진다. 다른 무엇보다 생존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따른 조금은 씁쓸한 반전도 덤으로 따라온다.

작가 시모무라 아쓰시는 일본 추리소설 신인 등용문인 에도가와 란포상에 다섯 번이나 떨어진 끝에 결국 당선되었다는 이력이 있다고 한다. 낙방 행진을 할 때 일반소설에 가깝고 추리소설적인 플롯이 약하다는 단점이 지적되었다는데, <생환자>를 읽어보니 그러한 결점은 확실히 고친 것 같다. 추리소설적인 플롯은 누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화된 데다가, 원래의 강점인 일반소설스러운 문장력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하이라이트의 등반 장면은 산악 모험소설의 고전인 <아이거 빙벽>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개인적으로 어느 때보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 올 여름은 휴가도 못 갔는데 13,800원에 3시간이나마 확실히 더위를 식힌 것 같다. 고작 그 가격에, 게다가 안전하게 칸첸중가를 다녀올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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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무더위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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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리소설계 중견 작가 와카타케 나나미의 단편집이다. 예전에 불운한 여탐정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가 두 편 출간된 적이 있는데, 중간의 몇 편을 건너뛰고 2016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조용한 무더위>가 국내에서는 올해 나온 것이다. 시리즈의 첫 두 작품은 읽어보았지만 큰 인상은 남아 있지 않고 하무라의 다소 시니컬한 성격과 터프한 언행만 어렴풋이 기억 나는데, <조용한 무더위>에서도 큰 변화는 없지만 아주 살짝은 밝아진 듯한 모습이라 반가웠다. 표지 그림만 보면 서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소소한 사건을 해결하는 발랄한 일상계 미스터리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여기저기서 맞기도 하고 크고 작은 사고도 당하는 등 몸을 아끼지 않는 프로페셔널 탐정이 등장하는 소프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에 가깝다.

전체 6편이 실려 있는데 첫 작품은 6월, 마지막 작품은 12월에 끝나 하무라의 반년을 보여주는 계절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시리즈 초기작과 비교해 가장 달라진 것은 하무라가 '살인곰 서점'이라는 추리소설 전문 서점에서 부업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탐정 일을 해나간다는 것. 주요 배경이 추리소설 전문 서점이라는 독특한 공간이다 보니 분위기가 다소 밝아졌고, 자연히 동서양 추리소설에 관련된 얘기들이 많이 나와 추리소설에 대해 많이 알수록 좀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추리소설 작가, 편집자, 독자 등 추리소설 씬의 뒷얘기도 자주 언급되니 추리소설 마니아 입장에서는 한층 몰입감이 배가된다. 탐정사무소라는 조금은 음험한 이미지가 아닌 밝은 느낌의 추리소설 전문 서점을 무대로 삼은 것은 2기 하무라 시리즈의 최대 특징이라는데, 배경과 이야기들이 찹쌀떡처럼 잘 붙어 작가의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끊임없이 시니컬한 나레이션을 내뿜는 1인칭 화자가 등장하는 등 전반적인 분위기는 확실히 소프트한 하드보일드지만 단편마다 다양한 장르의 맛을 선보이는 것도 강점이다. 표제작 '조용한 무더위'는 아주아주 유명한 고전 탐정소설의 모두가 아는 트릭을 현대적으로 변주한 본격 미스터리이고, '소에지마 씨 가라사대'는 서점에 매인 하무라가 전화로만 인질극 사건을 해결하는 안락의자 탐정물이며, 제목에서부터 <붉은 수확>의 패러디인 '붉은 흉작'은 해밋 류의 고전 하드보일드에 바치는 오마쥬, '성야 플러스 1'은 하무라가 고객의 귀중품(?)을 운반하며 겪는 온갖 위험 속에서 음모(?)의 실체를 깨닫는 모험물이다(이것 역시 제목 자체가 모험소설의 고전 <심야 플러스 1>의 패러디).

데뷔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부터 절찬받은 인간 내면에 은밀하게 자리잡은 악의, 독기 등을 은근하게 그리는 필체는 여전한 가운데 독특한 개성의 조연들이 선사하는 유머가 추가되어 예전보다 훨씬 부담없이 읽힌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열혈 팬도, 서점을 다룬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일상 미스터리 팬도, 다 떠나서 그냥 완성도 높은 추리소설을 찾는 사람도 모두 만족시켜줄 뛰어난 단편집으로 많은 일미 애호가들이 선택에 참고하는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랭킹 2위를 한 것에 충분히 동의한다. 개인적으로 '붉은 흉작'과 '소에지마 씨 가라사대', '조용한 무더위' 순으로 좋았으며 특히 앞의 두 편은 일본 단편 추리소설 올타임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라 본다. 나머지 단편들 역시 크게 떨어지지 않으니 6타수 3홈런, 3안타쯤 된다고 할까. 이 정도 타자라면 틀림없이 프로팀에서 드래프트가 된다. 여러분의 서재에 드래프트해도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고 감히 조언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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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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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어본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한여름에 '따끈따끈'이라니 더워 보일 수 있겠지만 여름에는 역시 등골이 오싹한 스릴러가 제격 아닌가. 영미 독서계의 대표 상품인 스릴러는 몇 편의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통해 드라마틱한 유행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 옛날 <007> 시대에는 모든 작가가 양복 입은 스파이를 썼으며, <양들의 침묵> 이후에는 천재 사이코 빌런이 출연하는 사이코 스릴러가 대세였다. 한 10여 년 전의 <다빈치 코드> 시대에는 더 이상 어떤 역사적 음모론도 나오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팩션들이 서점에 쫙 깔렸었고. 80-90년대의 홍콩영화처럼 소설 하나가 터지면 아류작이 쏟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상업 출판시장의 흐름인 것 같다.

제일 최근의 유행은 아무래도 <나를 찾아줘>가 만들어낸 도메스틱 스릴러 열풍일 것이다.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음모, 살인이 주요 테마인 이 장르는 특히 전 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독서 시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20-40대 여성들의 구미를 완전히 사로잡아 몇 년째 인기가 식지 않고 있는 듯하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해당 여성층은 밀리터리나 스파이, 액션, 사이코, 경찰물보다는 연애나 부부관계, 가정에서의 학대 등 현실적인 삶에 밀착된 얘기에 더욱 관심이 많아 보여 도메스틱 스릴러의 유행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예전 홍콩영화나 팩션이 몰락한 게 아류작의 범람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친 쏠림 현상은 확실히 이 장르에서 독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이름을 댈 순 없지만 모 작품은 내가 읽어본 2,000편 넘는 미스터리 소설 중 최악이었다(아, 실명 까고 싶다).

사실 도메스틱 스릴러에서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주로 가정, 애인,친구 등이 사악한 실체를 드러내며 반전이 완성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대가족도 아니고 요즘은 부부 한 쌍에 많아야 애 하나, 심지어 1인 가족도 나를 포함해 즐비한데 기껏 해야 서너 명의 용의자 안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을 만들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니 늘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남편, 아내, 친구, 애인이 사실은 나쁜 놈이었다, 로 끝나기 일쑤인 것이다. 다만 범인이나 반전은 뻔해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고, 트릭이나 미스디렉션 등 추리적인 장치가 빼어나다면 그건 또 다른 얘기이긴 하다. 그런 경우라면 고만고만한 아류작 수준을 뛰어넘어 한 편의 추리 스릴러로써 충분히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홍콩영화 팬들이 <영웅본색>만큼이나 <첩혈쌍웅>을 좋아하는 것처럼.

반갑게도 <사일런트 페이션트>가 딱 그런 작품이었다. 남편을 총기로 살해하고 몇 년째 입을 닫은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려 노력하는 정신과 의사가 나오는 중심 줄거리는 뻔한 편인데 트릭에서 독자를 완전히 한 방 먹인다. 실은 일본의 신본격파가 자주 쓰는 어찌 보면 좀 평범한 트릭인데 이게 서양 스릴러에서 나오니까 닳고 닳은 추리소설 독자인 나조차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작가가 일본 추리소설을 넓게 탐독했을 리도 없으니 아마 순전히 본인의 창의력에 의해 트릭을 만들어낸 것일 텐데, 이런 류의 트릭을 처음 봤을 가능성이 높은 서양 독자들은 완벽하게 넉다운,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신인 작가의 데뷔작이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도 하다.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이런 류의 트릭은 영화화가 어렵다는 게 통설이지만 이 작품은 편집에서 잘 오려붙이면 충분히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데이비드 핀처 같은 감독이 제시카 차스테인, 벤 위쇼 혹은 에디 레드메인 진용으로 만들어내면 박스오피스도 점령하지 않을까. 실제 정신병원에서 몇 년이나 일했다는 작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쏟아부으려는 신인의 치기도 범하지 않고 깔끔하게 플롯 위주로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알케스티스'가 핵심 제제이지만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빠지지도 않는다. 오직 흥미로운 이야기로만 승부하는 이야기계의 새로운 승부사 출현이다. 앞으로의 행보가 몹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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