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가 항상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책이 항상 많이 팔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좋은'이라는 평가가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평론가의 입을 빌어 나오는 현학적인 작품에 대한 분석이나 접근이 일반 관객이나 독자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에 '좋은 영화', '좋은 책'이라는 레테르는 어쩌면 완전한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 '좋았던 책'을 다른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욕구는 원초적인 것이고, 그 '좋았던 책'이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책이라면 더더욱 많은 이들과 그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니 범람하는 추천과 부추김에 또 한 술을 얹어 독자들의 귀를 미혹케 하는 나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란다.
미스터리 소설(출판)의 중흥기라 일컬을 수 있는 요즈음은 책 한권이 새롭게 나올때마다 여기저기의 커뮤니티에서 독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입소문을 타게 된다. 화제작들의 경우 예고된 출간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독자들도 많다. 장르 소설 독자들의 높은 충성도도 한 몫 한다.
'마케팅'과 '흥행'의 측면에서 보면 영화와 책은 공통점이 있다. 거대 제작사들은 스크린을 다수 확보하고 광고비를 투자해 각종 포털 사이트와 활자 매체들을 통해 개봉전 부터 영화를 알린다. 메이저 출판사들은 대형서점의 매대를 점거하고, 서평단 모집, 예약 판매, 할인 판매 등의 이벤트로 구매자들의 구미를 당긴다. 영화나 책이 어떤 경로로 유통되느냐에 따라 흥행의 상당 부분이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좋지만 소리 소문 없이 묻혀버리는 영화나 책'들이 생겨난다.
책의 모양새도 별 볼일 없고, 메이저 출판사도 아니고 장르 문학 독자들에게 그리 널리 알려진 전문 출판사도 아닌 곳에서 번역되어 나온, 그래서 별다른 입소문 조차 타지 못하고 초판도 채 소화 하지 못한채 밀려나 버린 책들 중에서도 보석같은 작품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흥행은 못했지만 극성스런 팬들에 의해 연장 상영을 하는 영화도 있듯이, 변변한 관심도 받지 못한채 신간 대열에서 밀려나 재고 처리만 남은 책들도 뒤늦게 입소문 한 번 타보는 것이 어떠한가. 내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지만 미력하나마 뒷북이라도 쳐보련다. 대상은 현재 알라딘 Salse Point 500미만으로 한정하였다.
<미션 플래츠>
상당히 의미있는 시리즈물인 '음마 라모츠웨 시리즈'를 펴내고 있어 낯이 설지 않은 출판사에서 미스터리 소설의 성수기인 작년 여름에 출판되었으나 일본 미스터리의 붐에 의한 상대적인 영미 작품들의 약세와 광고 및 홍보 부족등으로 다른 블록 버스터급 작품들에 밀려버린 비운의 작품. 현재 알라딘 Sales Point 177.
적지 않은 분량을 분권 없이 단단한 한권으로 냈고, 번역과 디자인도 비교적 깔끔하게 잘 되었다. 물론 최근의 대세인 작은 판형이 아닌 신국판이 두꺼운 분량과 조합되어 부담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들고 다니면서 보기엔 책이 좀 무겁다.
한솔로 님이나 물만두 님의 리뷰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제임스 앨로이의 명작 <블랙 달리아>의 분위기가 솔솔 풍기는 경찰 느와르 소설의 수작. 데뷔작이지만 대단히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과거의 비극적 사건들과 촘촘히 얽힌 진실들. 주인공의 심리나 등장인물들의 개성도 잘 묘사되어 있다. 최근의 작품들로 본다면 분명히 영미의 미스터리, 스릴러와 일본의 미스터리, 스릴러는 다른 질감이다. '영미의 질감'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로스 맥도널드, 에드 멕베인, 제임스 앨로이, 로렌스 블록 등을 좋아하시는 독자라면 필독이 요망되는 작품이라 단언한다.
<범인에게 고한다>
바야흐로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전성기다. 작년의 <모방범>, <용의자 X의 헌신>의 빅히트에 이어 최근의 <살육에 이르는 병>까지 미스터리 독자들의 눈은 온통 일본 미스터리에 향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권으로 나온 분권 편집, 미스터리 독자들에겐 생소한 출판사, 낮은 마일리지 및 이벤트 전무(이건 사실 최근의 혼란스러운 출판 유통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나쁘다고만 지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등의 요소로 인해 외면을 받은 것 같다. 현재 1, 2권의 알라딘 Sales Point는 각각 378, 398.
한 권으로 내기엔 분량 자체가 좀 애매하긴 하다. <모방범>의 한권 분량 보다는 약간 많아 보이지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그로테스크> 정도의 분량은 안 될 것이다. <이유> 정도의 판형과 편집이라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분권으로 인해 얻어지는 금전적 이익과 그로 인해 구매자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는 독자들을 출판사는 잘 저울질 해야 한다. 분권은 악재로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유괴와 아동 살인을 모티브로 하는 경찰 소설이다. 모양새는 주인공이 현장 수사관으로 활약하는 87분서 시리즈보다는 사건을 진두 지휘하는 기데온 시리즈와 흡사하다. 무거운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묵직함 보다는 '활극'(이 단어가 적절하게 사용되었는지는 자신이 없다)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경찰 내부의 알력이나 고독한 주인공의 캐릭터 등은 다카무라 가오루의 고다 형사 시리즈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그정도의 우울함과 묵직함은 없다. 사실 이 작품의 정서는 <13계단>이 주는 재미와 맞닿아 있는 편이다. 온간 고난을 받고 억울한 처지에 놓인 주인공의 역경을 딛는 성공 스토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간의 감정 과잉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바로 그 부분에 소설적 재미와 카타르시스가 뭉뚱그러져 있기에 탓할 순 없다. 어찌됐든 아주 재밌는 소설임엔 틀림없다.
<부활하는 남자들>
경찰 소설 이야기를 하는 김에 짧게 한 개 더.
이언 랜킨의 존 레버스 경위 시리즈다. 그리고, 흥행과는 거리가 먼 블랙캣 시리즈다. 여러편이 나온 긴 시리즈 소설 중에 상 받은 작품 달랑 하나만 나온것이 좀 생뚱맞다. 등장인물들의 전사(前史)와 캐릭터의 익숙함이 주는 시리즈 특유의 재미를 모두 잃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분권이다. 역시 분량은 좀 애매하다. <범인에게 고한다>와 비슷하거나 아주 약간 더 많아 보이는 분량이다. 나온지는 2년이 다 되어가니 곧 절판의 길을 걸을 위험도 있다. 이런 저런 단점들을 감안 하더라도 경찰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에겐 제법 즐거운 독서가 되지 않을까.
추천 코드는 헤닝 만켈, 펠 바르-마이 슈발, 아날두르 인드리다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