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부의 이력서
최희숙 지음, 김홍중 엮음 / 소명출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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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민경아가 오리엔탈 나이트클럽에서 그녀 오지우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침침한 맨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쩐지 무척 고독하고 슬퍼 보였다. 이 소설의 첫 부분이다. 그렇게 나- 경아는 대학동창 지우를 다시 만났다. 2년 만이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외모의 화려함, 내면의 스산함

 

소설에는 표현이 안 되었지만 지우는 퀸카였다. 재벌 딸이나 권력가의 무남 독녀 외동딸같은 분위기가 났다. 지우 스스로 이런 말도 하긴 했다. "우리 아버진 X당의 최고 간부야. 우리 엄마도 X당의 선전부장이고, 또 부녀회 회장이기도 해. 하지만 난 이들의 명예에 관심이 없단다. 그들은 정말 높은 자리에 있어. 돈도 많고, 훌륭해."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 후에 더 많은 실체가 드러났지만, 처음 대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고도 충분할 만큼 그리 보였다. 한술 더떠 경아는 지우에게 뭔가 신비스러운 기운까지 느껴져서 경아쪽에서 지우에게 마음이 많이 기울었다.  결국 둘은 절친이 된다. 그리고 많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 재벌, 권력가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경아는 지우 곁을 지켜준다. 단지 지우에겐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후원자만 있을 뿐이었다.


 

성장속에서도 계속 건드려지는 어릴 적 상처

 

경아와 지우의 공통점은 어릴 적 내면의 상처가 매우 깊다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 모두의 관심사다. 어른다운 어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어릴 적 상처가 아물지 않은 탓이다. 누구나 마음 안에 어린 아이가 살고 있다. 그 어린 아이의 모습이 곧 현재 나를 표현해준다. 지우 곁에 있길 원하는 사람은 지우를 치료했던 정신과 의사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지우가 글로 남긴 것을 토대로 한다.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무서웠습니다. 그렇게 정신병원 침대 위에서 문득 느꼈습니다.(...) 이 축적된 불안의 덩어리를 쓰고 싶었습니다. 아름다운 문장의 기교나 재치가 없더라도, 그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편모 슬하에서 자란 지우. 그 어머니곁엔 늘남자가 있었지만, 모두 오래 함께 하진 않았다. 단지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뿐이었다. 지우가 열한 살때, 육이오가 터졌다. 지우에겐 더 깊은 몸과 마음의 상처가 남은 시기였다. 엄마는 죽고 양부모를 만난다.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그리고 정신병원에서 담당의사인 재우를 만난다. 재우는 지우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인지 연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우는 재우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지우 마음엔 정리 되지 못한 어수선함이 가시가 되어 박혀있다. 그 자리에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사랑과 결혼

 

사랑이 더 깊어져서 닻을 내리고 싶을 때 결혼을 하게 된다. 혼자 생각하고 행동하던 삶이 이젠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시간과 공간이다. 말이 쉽지 현실은 어렵다. 재우는 미국으로 떠나면서 하필이면 무늬만 부부 사이인 재우의 숙부집에 기거를 부탁하고 떠난다. 지우와 숙부 사이에 깊은 사연이 만들어진다. 아름다운 결말을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재우의 숙부와 지우가 동반 자살을 기도했으나 지우는 깨어난다. 이 시점부터 템포가 빨라진다.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으나, 재우의 아내는 그녀 자신도 정숙하지 못한 주제에 지우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댄다. 지우의 파멸을 위해 혼신을 기울인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민준(재우의 숙부)부부 사이엔 아들이 하나 있다. 열 아홉살 데카당스다. 부모의 일탈된 행동을 보며 더욱 삐뚤어져간다. 소설 후반부엔 그 아버지가 자살하고 난 후 지우의 꿈 속이라는 설정이지만, 부정한 어머니를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처절하게 공개한다. 요즘 '이혼 법정'은 문턱이 닳을 정도이지만, 사회적 이목 때문에 이혼을 못하고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겉과 안이 완연히 다른 한 가정을 보며 사랑과 결혼이 각자의 삶 속에 약도 될 수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소설의 제목인 [창부의 이력서]보다 더 관심이 가는 이 책의 이력

 

저자 최희숙은 이 소설을 20대에 썼다. 이 작품은 1965년경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본다. "나는 이 책이 세상에 던져짐으로써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원하기보다는 얼마나 많은 공격이 들어올까를 각오한다. 이 책은 나의 네 번째 딸이 된다." 저자는 이 책의 주제를 '여자는 모두 창부의 기질을 가졌고, 거기에 놀아나는 사내들은 얼간이'라 했다. 문학적 진리의 의미에서 그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한국 사회의 현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단지 이 한마디 때문에 1965년 1월 10일자로 모 신문에 연재되려다 부녀자들의 아우성에 1회도 실리지 못한 채 사고(社告)로써 중단된다. 그 후로도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들 중 누구도 작품을 본 사람도 없이 단지 작가의 한 마디 '여자는 모두...'에 흥분했다. 작가는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절(寺)로 피신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때는 받아들이지 못한 내용을 지금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슨 사연인가? 그때가 더 도덕적이고, 지금은 아닌가? 그때는 솔직하지 못했고, 지금은 솔직한가? 그때보다 사람들의 이해력과 포용력이 더 좋아졌나?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 책 속에서

 

"전 사람들을 이해 할 수가 없어요. 결혼은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나 동거생활은 악의 씨처럼 생각하는 걸요. 둘이 다를 게 뭐 있어요? 결혼도 따지고 보면 국가가 인정한 독점적인 사창(私娼)이 아니고 뭐예요."

 

"당신들 기성 세대부터 세탁하는 겁니다. 위선을 벗어부치고 진실하게 발가벗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우리 젊은 세대들은 당신들의 혁명을 따라갈 겁니다. 우리의 땅에 빛이 뿌려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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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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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바다로 간 것 만큼이나 호랑이가 바다로 갔다는 사실이 궁금점을 유발한다. 고래가 있을 곳은 바다이고, 호랑이가 있을 곳은 산이라는 당위성 때문이다. 그러나 한 생각 바꾸면 억겁의 시간 속에 바닷속 산과 들이 뭍이 되고, 하늘과 함께 호흡하던 산과 계곡들이 바닷물과 어우러져 지내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호랑이가 바다로 가는 것은 아마도 그 조상들의 DNA가 자극을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실 그리고 내 안의 짐승 한 마리

"바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그에 따른 노동이 필요하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이 독자를 바다로 유혹한다.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 바다를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바다에 뛰어들어 그 속살을 봤다고 해서 바다를 그릴 수가 없다. 바다의 얼굴은 변화무쌍하다. 산과 계곡을 돌풍이 핧고 지나가듯 바닷속도 그리하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 '나' 영빈은 지금 제주도에 있다. 원래는 물 위를 걷고 싶었으나, 그것이 여의치않아 우선 바다를 바닷속을 좀 더 알고 싶어 아예 당분간 제주에 머무를 생각이다. 굳이 고교 동창 산부인과 의사가 '양수와 바닷물의 성분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안해줬어도 그는 물이 참 좋다. 바다가 좋다.

 

영빈은 어느 날 실로 9년 만에 우연히 다시 만난 해연과 아파트 이웃에서 친구처럼 애인처럼 때로는 부부처럼(남들 보기에)지낸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쿨하다. 오래 전 그녀를 만났던 그때 사실 그에겐 '상실의 시대'였다. 해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9년전 그녀를 만난 곳은 성수대교위를 지나던 택시 안에서였다. 그가 먼저 타고 나중에 그녀가 합승을 했다. 성수대교가 붕괴되던 그날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었다. 다행히 살아났기에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마도 그 때부터였을것이다. 붕괴되어가는 그의 삶과 무늬만 다리였는지 맥없이 강물로 떨어져내린 성수대교 그리고 부조리한 사회. 그는 해연에게 호랑이를 잡으러간다고 했다. 그는 종종 호랑이와 조우하곤 했다. 컴퓨터 내부에서 만난 적도 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짐승을 한 마리씩 키우고 있지..평소에 잠든 척 얌전히 있다가 못마땅한 일이 생기면 돌연 거칠게 반응하지. 참고, 또 참고, 또 참다가 말이야. 그때부터 주인을 괴롭히는거야..."


 

경계인 또는 또 하나의 디아스포라

 

소설에는 일본인이 두 사람 등장한다. 두 여인이다. 그가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났지만, 알고보니 두 사람이 여고 동창지간이다. 한 사람은 등단하고 한 사람은 아직이지만, 두 사람은 글을 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국계 여성이다.

히데코라는 이름인 줄 알았지만, 아사카와 유미코라고 알게 된 여인과 사기사와 메구무라는 여인이다. 메구무라는 여인 역시 영빈은 우연히 스친 적이 있다. 한국계 여성으로서 일본에 살아간다는 깊은 어려움이 표현된다. 아, 그리고 나중에 두 여인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안타깝다. 작가는 이 두사람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가 여전히 현재와 미래의 진행형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어느 사회든 경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든일입니다. 작가뿐만 아니라 누구든 마찬가지죠.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계인의 입장에 서면 흔히 회색분자나 기회주의자로 몰리게 마련이니까요. 가령 좌와 우가 있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좌가 옳고 우는 옳지 않습니다. 반대로 또 어느 면에서는 우가 옳고 좌는 옳지 않습니다.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좌우의 장점을 택해 문제 해결에 적용시키려고 하죠.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경계인이라 부르지 않고 양쪽에서 모두 기회주의자로 간주하니까요. 말하자면 양쪽에서 흔들어대는 거죠."


 

잡느냐, 벗어나느냐

 

낚시 소설은 아니지만, 제주도로 낚시를 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참고서적으로도 훌륭할 정도다. 꼭지에 이런 메모도 종종 붙는다. "물때 4물. 음력 2월 28일. 양력 4월 17일. 오전 간조시각 새벽 3시 29분. 만조시각 9시 52분. 더 없이 맑은 토요일 아침." 제주도는 물론 주변 섬들의  이곳 저곳 낚시 포인트와 물고기 이야기가 어류도감처럼 펼쳐진다.

 

 

트라우마 그리고 힐링, 다시 일어서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서적으로 근거리는 영빈과 해연의 가족 그리고 시간적으로 멀게는 일제시대부터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까지 이어진다. 영빈이 낚시 나선 길에 들르는 단골 국수집 아주머니는 제주 4.3 사태 피해자의 가족이다. 그녀는 외부 사람에게 매우 배타적이다. 그 상처는 여전히 아프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 그것에 잡혀 있다보면 한발도 못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문을 열고 닫는 것이 나의 의지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해연은 영빈이 잡아온 꽤 많은 고기를 욕조에 담가놓자 그 안에 들어가서 힐링 타임을 갖는다. 영빈은제주도에서 호랑이를 몇 번 만났다. 소설 끝무렵 영빈은 자신의 낚싯중에 걸린 꽤 큰 참돔과 돌돔을 그냥 바다로 다시 보내줬다. 잘한 일이었다. 해연의 뱃속에는 새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제주에 있던 영빈을 보러 내려왔던 해연과 최초로 신호교환(?)을 나눈 뒤 일어난 일이었다. 소우 쿨한 커플이 핫해질 것이다.

 

그리고 호랑이는 산으로 보내야 별일 없다. 무엇이든 있을 곳에 있으면 그 자체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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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스 이야기 - 세계 거물들은 올해도 그곳을 찾는다
문정인.이재영 지음 / 와이즈베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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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럼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고대 로마 시대의 공공 집회 광장에서 유래한다. 이곳에서 포럼 디스커션(forum discussion)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 행하던 토의 방식의 하나로 사회자의 지도 아래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연설을 한 다음, 그에 대하여 청중이 질문하면서 토론을 진행하는 형식으로 흔히 줄여서 포럼이라고 쓰고 있다. 현시대에는 화려하기 짝이 없는 국제회의에서부터 크고 작은 단체가 진행하는 갖가지 회의까지 포럼이라는 이름아래 모인다.

 

 

 

2. [다보스 포럼]은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1월 하순 스위스 동부 그라우뷘덴 칸톤(州)의 해발고도 1천575m 알프스 산맥 자락에 있는 조그만 마을 다보스에서 개최하는 연차 총회를 의미한다.

 

3. 1971년 다보스포럼이 생기기 전만해도 국제사회에서 '포럼'이라는 형식의 회의 자체가 그리 익숙한 틀이 아니었다고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모여 비공식대화를 나눈다는 개념이 더욱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4. 이 책은 제목에서 시사해주고 있듯이 [다보스 포럼]에 대한 이야기다. 다보스 포럼은 탄생후 40년이 지난 지금 명실공히 지구촌을 통틀어 가장 많은 주목을 맏는 국제회의이다. '다보스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5. 이 책엔 두 사람의 필진이 참여했다. 한 사람은 수년간 교수 요원으로 다보스포럼에 참여해온 외부 전문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포럼을 준비하는 주최 측 요원으로 일하며 현장을 지킨 내부자이다.

 

6.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내부자였던 이재영 의원이 회고하는 '안에서 본 다보스포럼'이다. 포럼의 탄생 배경에서부터 WEF의 조직체계와 운영방식,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소개하며 다보스포럼의 성공 요인과 앞으로 극복해나가야 할 과제를 분석했다. 2부는 지난 5년간 패널로 참석해온 문정인 교수가 쓴 '밖에서 본 다보스포럼'이다. 3부는 이러한 안과 밖의 시각을 조각퍼즐처럼 입체적으로 그러모으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7. 포럼의 사상적 기반은 슈밥 교수의 '다중이해관계자 이론'에 기초한다. 기업 환경에 대한 내용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이론은 기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 개인 및 집단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환경 속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무리 언어가 다르고 습관과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지라도 기본적인 개념은 '서로 상호작용하는 환경속에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8. 그렇다면 다보스포럼과 반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견해는 어떤가? 무수한 비판들을 '존재적 비판'과 '기능적 비판'으로 나누어본다. 먼저 존재적 비판은 다보스포럼의 핵심 사상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포럼의 사명, 회원 구성, 운영 방식'등 전반적인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9. 학계에서도 다보스포럼이 세계화를 주도한다는 비판은 이어진다. [문명의 충돌]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은 '다보스 문화'라는 표현을 만들어 모든 국제적인 집단을 이끌거나 세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점유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다보스 사람'으로서 다보스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한다고 지적했다.

 

10. 비난과 달리 비평이나 비판은 성장의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다보스 포럼]이 명실공히 지구인의 나눔과 공유, 발전의 자리가 되길 소망한다. 국제화 시대에 [다보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특히 다음 세대들이 깊은 관심을 가져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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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노멀 - 디지털 혁명 제2막의 시작
피터 힌센 지음, 이영진 옮김 / 흐름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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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나돌면서 아날로그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아우가 형을 밀어내듯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그렇게 가고 있다. 후배가 선배를 앞서간다. 디지털 후배는 아날로그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안다. 비효율적이고 비능률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조금만 더 봐드리지요. 그 자리에 넘 오래 버틸 생각은 하지 마십시요!"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이 책의 키워드인 디지털과 아날로그 라는 단어에 떠오른 단상이다.

 

2. 저자 피터 한센은 유럽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미래학자. 기술이 사회와 기업 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연구하는 선도적 사상가로 소개된다. 책은 총 9장으로 되어있다. 뉴노멀 시대의 도래, 한계들, 새로운 원칙들, 고객 전략, 정보 전략, 경영, 혁신, 기술 전략 그리고 뉴노멀 그 너머를 향해 등이다.

 

3. "이젠 디지털도 식상하다. 새로운 시대가 온다." 이를 디지털 혁명의 두 번째 여정이라고 표현한다면, 뉴 노멀(New Normal) 즉, '새로운 일반화'가 될 것이라 한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의 환경은 계속 디지털화되어 왔고, 여정의 절반을 넘어선 지금부터는 디지털이 표준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이 시점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세상이 디지털화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공통된 특성을 띠게 될 것이다."

 

4. 디지털 혁명의 두 번째 여정에서는 조직을 부각시키고 차별화하는 일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한다. 첫 번째 여정에서는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생소하고 진기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리 힘들지 않게 경쟁우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뉴 노멀 시대엔 기술에 대한 접근이 일용품화되어 버리기 때문에 차별화하려면 조직의 다른 역량에 주력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5. 디지털 이민자(digital immigrants)와 디지털 원주민(digital natives)을 구분하는 실험 방법엔 미소와 함께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디지털)카메라 하나를 올려 놓고 "이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디지털 카메라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이는 디지털 이민자이고, 그냥 '카메라입니다"라고 답하면 디지털 원주민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디지털 원주민이라면 평생 아날로그 카메라를 사용해보지 않았을 테니 '그냥' 카메라라고 답한다.

 

6. 아마도 이 책을 읽게 되는 독자 대부분이 아날로그 시대를 거쳐왔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가 오기 전의 시간들을 회상하며 '차라리 그때가 좋았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좀 더 솔직해지자. 변화의 시간과 흐름에 합류하지 못하는 만큼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향수병에 젖어 있진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 '디지털'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면 할수록 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보인다고 할 정도인데 이 상황에 아날로그 운운하는 것은 분위기가 넘 고풍스럽다. 박물관으로 보내질지도 모르니 조심할 일이다.

7. 자, 그렇다면 디지털 이후 세대는 완벽할까? 디지털을 당연시 여기는 세계를 뜻하는 뉴노멀은 멋진가? 저자는 뉴노멀 시대의 한계점을 열거한다. (정보의)길이,깊이, 가격, 인내심, 프라이버시,인텔리젠스 나아가선 조직의 한계점이 예상된다는 이야기다.

 

8. 이 책에서 펼치는 논지가 개인이 아닌 기업의 방향에 치중하고 있지만, 아무리 거대한 그룹일지라도 결국은 개개인의 집합체이므로 참고를 해야 할 부분이 많다. 뉴노멀의 새로운 원칙들을 살펴본다. 1) 디지털 고장에 대한 허용치는 0이다. 2) '충분히 훌륭한'기술이 '완벽한'기술에 앞선다.  3) 완전책임 시대를 구현한다.

 

 

9. 시대가 변한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질과 방향성도 달라진다는 말이 된다. 각 기업은 '소비자들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바라고 있다. 기업 마인드와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 뉴노멀 시대에 생존하려면 개개의 소비자들이 자기가 맞춤화된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뉴노멀 시대에 성공하려면 새롭게 떠오르는 경향들을 파악한 뒤, 이를 활용해 고객들의 디지털 경험을 도구로 이용할 수 있어야한다는 견해가 뒤따른다. 이래 저래 공부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트렌드도 잘 읽어야하고, 여론에도 민감해야 한다.

 

10. 여러가지 이야기 중에서 지금 당장 적용해 볼 부분이 눈에 띈다. '휴지통을 자주 활용하라'. "아마도 컴퓨터에서 가장 활용이 안 되는 기능이 휴지통일것이다. 휴지통은 1984년 매킨토시에 가장 처음 등장했다. 그 시대의 사양은 무엇인가를 드래그해서 휴지통에 집어넣어 파일을 삭제하는 정도만으로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휴지통은 더 재미있게 만들어져야 했다. 그랬으면 아마 더 많이 활용했을텐데.." 우리가 만들어내는 정보는 쓰나미 수준인데, 버리는 것은 매우 인색하다. 아니, 관심이 없다고 해야겠다. 저자는 우리의 IT옷장이 너무 거대해지고 복잡해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오래된 것들을 못버리는 탓이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옷장을 정리 할 때 1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었으면 재활용함으로 던지듯이 문서나 파일도 그리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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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걸음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0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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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기 전 어둠의 기록

 

하늘빛이 동트기 전에 가장 어둡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시간적 이미지는 바로 동 트기 전 그 어둠의 시간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시간을 이겨내지 못한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죽었으나 산 사람처럼

 

살아 있는 자뿐 아니라, 죽은 자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사로잡고 있구나!    - 마르크스, 『자본론1』서문에서

 

“마르크스도 신은 아니지!” 마르크스가 서두를 연다. 쇠 우리 안에 갇혀 노란 횃대 위에 앉아 깡마르고 기다란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말라빠진 기다란 두 팔도 축 늘어뜨린 채 마치 늙은 매 같은 ‘너’는 추호도 망설임 없이 이런 말을 던진다. “마르크스는 이미 우리에게 숱한 고통을 안겨줬어!”

 

이 소설의 서술자(화자)는 ‘너’는 누구인가? 그의 존재감을 파악하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다. 소설은 쇠 우리 안에 갇힌 서술자가 쏟아 내놓는 언어의 기록이다. 월요일 오전, 시내 제8중학(우리나라의 중고등과정) 고3 교실이 묘사된다. 직무에 충실한 물리교사 팡푸구이가 수업 중에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교단 위에 엎어졌다. 학생들이나 교사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장례미용사 리위찬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여인이다. 카리스마와 팜프마탈의 소유자다. 그녀의 남편 장츠추 역시 제8중학 물리교사다. 팡푸구이와 장츠추의 집은 서로 얇은 벽하나 사이를 두고 이웃해있다. 두 사람의 얼굴은 서로 닮았다. ‘아름다운 세상’ 장례미용사 리위찬은 어렸을 때부터의 행적이 그려진다. 알뜰한 살림을 꾸려나가는 경제 감각이 있는 여인이기도하다. 그녀는 어려서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리위찬의 어머니는 비록 지금은 병상에 누워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지내지만, 한창때는 온 도시를 주름잡던 풍류미인이었다. 이 모녀 사이엔 공통의 비밀이 있다. 역시 소설에선 한 역할을 단단히 하는 왕 과장(나중에 부시장이 됨)이다. 이미 그에겐 예쁘고 상냥한 아내와 천진난만하고 활발한 아이가 있었다. 그러나 모녀는 왕 과장을 공유한다. 그 반대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어쨌든 저자는 공직자와 권력자들의 성적으로 심히 부적절한 관계를 도마 위에 올린다.

 

일찌감치 장례 미용직에 배치된 리위찬은 처음엔 그 일이 몹시 마땅치 않은 듯 했지만, 이내 적응이 되어 특급 장례사로 시의 모범 노동자로 나아가선 ‘삼팔홍기(三八紅旗) -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 부녀연합회가 ’4대 현대화‘에 이바지한 여성에게 수여하는 명예로운 칭호-의 기수가 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장례미용사를 스토리 전면에 내세웠을까.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설을 하지 않는 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나는 장례미용사가 전체적인 스토리를 리드해가는 이유를 작가가 현재와 과거의 중국의 모습 중 감추고 싶은 모습이 많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하긴 어느 나란들 감추고 싶은 역사의 시간들이 없기야하겠냐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시장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중국의 현실은 여전히 덮어두고 싶은 일들, 포장해야 할 일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충분히 사람의 이목을 끌만한 매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중국이 서방세계에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길 원할까. 딱딱하게 굳은 이미지의 공산당 간부의 모습일까? 아니면 리위찬처럼 때로는 사람을 혼미(昏迷)하게 만드는 모습일까? 리위찬은 죽은 자를 산자처럼, 아니 그 이상 더 미화(美化)된 상태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최근 그녀의 작품 중 내세울만한 것은 어렸을 적 그녀에게 성(性)을 지도해줬던 왕부시장이다. 업무 중 급사(急死)한 배불뚝이 부시장을 좀 더 격무에 시달리다 순직한 이미지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한다. 배도 얼굴도 홀쭉하게 만든다. 이 기술은 후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신은 계속 죽은 사람으로 있어야 해

 

물리교사 팡푸구이의 죽음은 제8중학뿐 아니라 도시의 모든 인민교사들에게 동정과 존경을 받는다. 그의 죽음이 스스로 의도한바가 아니었지만 마치 우리의 전태일을 통해 노동자들의 인권밭에 생명력이 부여된 것처럼 팡푸구이를 통해 교사들의 직무여건에 대한 관심과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인민들은 “교사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져라! 중년 교사들의 봉급을 인상하라!”고 외쳤고, 돈 잘 버는 기업과 부유한 개인들에게 의연금을 걷어 ‘중년 교사를 위한 건강기금’을 설립하자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팡푸구이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팡푸구이가 아주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살다보면 늘 돌발적인 사건 때문에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기 십상이지. 이렇게 틀어진 계획은 운명의 변화를 야기하고, 역사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이 날마다 모든 개인의 신상에, 모든 가정에, 모든 나라에 일어나고 있어. 마르크스주의자는 우연성과 필연성으로 이런 현상들을 해석하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운명과 하늘의 뜻으로 이런 현상들을 해석하고..”

 

정신이 든(살아난) 팡푸구이는 장례식장 냉동고에서 탈출한다.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온몸에 석회를 뒤집어쓴 채 집으로 향한다. 문을 두드린다. 온 몸이 하얀 남편이 창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본 그의 아내 투샤오잉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귀신이야!”. 그리고 기절한다.

 

결국 집에도 못 들어갔다. 내 집이 아닌 다른 곳에 갈 데라고는 이젠 한 곳 뿐이다. 동료 교사 장츠추의 집이다. 그의 아내는 시의 모범 노동자이며 장의사의 특급 장례미용사로, 이름은 리위찬이다. 작가는 이미 리위찬의 존재를 앞서 여러 번 언급했음에도 마치 처음인 듯 그녀를 소개하며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에! 팡 선생님, 당신 죽은 거 아니었어요?" 장례미용사가 놀라서 물었다. ”내가 선생님을 냉동고에 들여놓았잖아요?“ 장츠추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팡 선생, 자네 죽은 거 아니었어?“ 이쯤에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죽은 줄 알았더니 다시 살아났다. 더 이상 좋은 일이 있을 수 있나. 에헤라디야~ 하고 말면 이야기도 끝이다. 문제는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소설의 무대가 사회주의체제하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당신이 죽었대도 좋고, 죽지 않았대도 좋아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대도 좋고, 처음부터 죽은 게 아니었대도 좋아요.” 그녀(리위찬)가 말했다. “어차피 선생님 사정이니까. 하지만 시에서는 선생님이 죽은 줄 알아요. 장의사에서도 선생님을 죽은 사람으로 취급하고, 학교에서도 죽었다고 생각하고, 투샤오잉(팡푸구이의 아내)과 팡룽,팡후(아이들)도 선생님이 죽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선생님은 살아 있을 수 없어요.”

 

결론이 묘하다. 살아 있을 수 없다니. 그럼 제대로 죽으란 이야긴가. 확실한 것은 현재 상황에 팡푸구이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야말로 전국적인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죽어야 산다는 말이 있다. 팡푸구이가 죽음으로 자신은 물론 주위사람들 모두가 덕을 본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가족은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다.

 

 

페이스 오프

 

밤새 그들(팡푸구이, 장츠추, 리위찬)은 머리를 맞대고 하나의 결론을 뽑아낸다. 팡푸구이가 그 자리에 함께 있긴 했으나, 그는 사실 아무 생각이 없다. 바로 옆인 자기집에 가서 자신의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을 뿐이다. 장츠추 부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고비이자, 대목인관계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 장례미용사는 장츠추와 비슷하게 생긴 팡푸구이의 얼굴을 약간 매만져(그런데 사실 약간이 아니었다) 장츠추 대신 제8중학 물리교사로 보낸다. 장츠추는 교사 월급에 목을 매고 사느니 진작부터 장사를 하고 싶다고 노래를 했으니 장사꾼이 되어 돈을 번다. 두 사람이 번 돈을 합한 다음 둘로 나누어 두 집안의 생활비로 쓴다. 부엌에 팡푸구이를 위해 침대를 하나 놓는다. 팡푸구이는 투샤오잉과 계속 동거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등이다.

 

어찌보면 황당한 결론이지만, 어쨌든 세 사람에겐 최상의 합의점이었다. 그러나 희극처럼 시작된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게 될 줄은 세 사람 모두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나 혼자 결정해서 시행해야 할 일은 혹시 잘못 되더라도 나 하나의 실책이나 피해로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럿이 어우러져 결론을 내린 경우 역시 잘 못된 방향으로 나갈 경우에 그 책임을 누가 지느냐다. 서로 상대방의 탓으로 돌릴 가능성이 많다. 내 탓이 아닌 네 탓이다.

 

어쨌든 팡푸구이는 동료교사인 장츠추의 얼굴을 카피한다. 장례미용사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으로 집에서 성형수술을 한다. 그녀가 메스를 댄 것은 단지 죽은 자와 산자의 차이다. 아니 죽었다 다시 살아난 얼굴이다. 얼굴을 칭칭 감았던 붕대를 풀고 맞닥뜨린 팡푸구이와 장츠추는 서로 심한 당혹스러움을 견디지 못한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그 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세 사람 모두 상상조차 못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팡푸구이는 그의 아내 투샤오잉에게 비록 얼굴은 바뀌었지만 '내가 당신 남편이야!'하고 몇 번을 대시했으나 거듭 히스테릭한 반응만 왔을 뿐이다.

 

이 외에도 많은 사건과 인물들의 갈등이 때로는 돌직구로 때로는 매우 서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가히 언어의 예술사다.

 

 

자, 그렇다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하나. 분필. 소설의 서술자는 쇠 우리 안에 갇힌 채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그는 팡푸구이도 될 수 있고, 장츠추도 될 수 있다고 한다. 소설에선 이어지진 않았으나 후에 팡푸구이의 페이스 오프가 탄로 나면서 지엄한 당과 순진한 인민을 우롱한 죄로 쇠 우리안에 갇혀 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서술자가 오로지 분필만 먹는다는 것이다. 일체의 음식을 모두 거부하고 오직 분필만 먹는다. 청자들은 이야기를 계속 듣기 위해 끊임없이 서술자에게 분필을 공급한다. 색색가지 분필을 먹은 서술자는 그 값을 하기 위해 역시 색깔 있는 이야기도 서슴지 않고 쏟아낸다. 분필은 판서(板書)용이다. 식용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말이 결국 문자로 기록된다는 것은 그가 하는 말이 곧 언어가 아닌 문자라는 것이다. 이는 이 소설의 작가 모옌이 관모예라는 본명이 있지만,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뜻의 모옌이란 필명을 쓰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이 든다. 즉, 서술자는 작가 자신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둘. 리비도.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19금에 가까운 리비도 기운이 덮여있다. 독자에 따라선 자칫 성애(性愛)소설로 비쳐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작가가 매우 서운하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도입부분에 나오는 여주인공(킬러)의 도발적인 성욕(카페에서 처음 본 남자에게 ‘당신 그것 쓸 만하냐 묻는다.’.)을 접하면서 ‘이런, 이런 책이었어?’하고 책을 덮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작가가 그려내는 리비도는 부와 권력집단의 부도덕하고 절제되지 못하는 성(性)을 고발하고 있다. 아울러 인간들의 원초적인 감정과 욕구가 리비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셋.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 지금 중국의 지도부는 급속히 전개되는 자본주의 시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저 좋게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금력(金力)또한 권력(權力)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부분을 예의 주시하면서 염려하고 있다. 큰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진 않지만 정치와 경제력의 결탁이 일부 집단에게만 부의 축적이 이뤄진다는 경제적 불균형도 그려진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영원한 레지스탕스 슬라보예 지젝이 그의 저서 『멈춰라, 생각하라』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오늘날 중국이 겪고 있는 여러 어려움 중 하나.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혁의 목표는 (새로운 지배층인) 부르주아 계급이 없는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 지도자들은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이 담보하는) 안정적 위계질서 없이는 자본주의의 불안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떠한 길을 택하게 될까? 더 일반화하자면, (구)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효율적인 경영자로 재부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그들의 뿌리 깊은 적대감이 부르주아 계급 없는 관리자 체계를 지향하는 최근 자본주의의 추세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다. 양쪽 모두, 과거 스탈린의 말대로 "조직체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넷. 교육현장에 대한 염려. 이 문제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소설 속에 비춰진 교사들의 처우문제와 교육현장은 그래도 우리가 좀 낫지 않나 싶다. 오죽하면 학교를 때려치고 장사를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아이들은 줄줄이 강물로 뛰어들고 있다.

 

다섯. 열세 걸음. 책을 읽기 전에 진작부터 제목에 마음이 머물렀다. 왜 열세 걸음일까? 열세 걸음밖에 못 나간 것이 아니라, 열세 걸음이나 걸어 간 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13이란 숫자가 길(吉)한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답이 나오겠거니 했다. 여덟 걸음에 답이 나왔다. 참새 시리즈의 한 꼭지 같은 글이 실려있다. “...만일 참새가 열세 번째 걸음을 내딛는 걸 보았다가는 앞서의 모든 행운이 죄다 곱절의 악운으로 바뀌어 자네 머리 위로 뚝 떨어져 내린다지 뭔가!”

 

멈춰야 할 때가 있고, 나아갈 때가 있다. 현재 중국은 광속도 정도가 아니라 마하의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작가는 이 점을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디 중국의 상황에만 대입시키랴. 우리는 너나없이 앞만 보고 질주하는 분위기다. 시력 시야 모두 시원찮은 양무리가 앞서가는 양의 꼬리만 보며 모두 절벽 끝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간다더니 딱 그 짝이다. 아무리 높은 산도 한 걸음에서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 내가 살고 남도 살리는 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나는 이리 달려가고 있나 자주 점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담게 된다.

 

여섯. 기다림과 문 두드림. ‘하늘빛이 동트기 전에 가장 어둡다.’는 말을 다시 옮긴다. 소설의 결말엔 마음이 아프다. 좀 더 기다렸으면 어땠을까. 좀 더 지혜롭게 서로 마음을 모아 봤으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이다. 얇은 베니어판 한 장 이웃해있지만, 먼 그대로 살아가는 그네들의 삶이 애달프다. 지독한 어두움은 새벽하늘과 바통 터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왜 생각 못했을까. 좀 더 기다렸으면 좋았을텐데..

 

문 두드림. 소설의 초반(페이스 오프 전까지)엔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는 ‘문 두드림’이 있다. 독자의 의식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고 있다. 작가가 의식적으로 그리하고 있다. 이 역시 우리 살아가며 필요한 부분이다. ‘깨어있음’의 시간을 요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현재 중국의 활동 작가 중 모옌과 함께 옌렌커를 주목하고 있다. 비슷한 나이(옌렌커가 세 살 아래)인 두 작가의 공통점은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써야 하고 읽어야 한다.’  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건필을 빈다. 그저 나는 열심히 읽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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