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부의 이력서
최희숙 지음, 김홍중 엮음 / 소명출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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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민경아가 오리엔탈 나이트클럽에서 그녀 오지우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침침한 맨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어쩐지 무척 고독하고 슬퍼 보였다. 이 소설의 첫 부분이다. 그렇게 나- 경아는 대학동창 지우를 다시 만났다. 2년 만이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간다.

 

 


외모의 화려함, 내면의 스산함

 

소설에는 표현이 안 되었지만 지우는 퀸카였다. 재벌 딸이나 권력가의 무남 독녀 외동딸같은 분위기가 났다. 지우 스스로 이런 말도 하긴 했다. "우리 아버진 X당의 최고 간부야. 우리 엄마도 X당의 선전부장이고, 또 부녀회 회장이기도 해. 하지만 난 이들의 명예에 관심이 없단다. 그들은 정말 높은 자리에 있어. 돈도 많고, 훌륭해."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 후에 더 많은 실체가 드러났지만, 처음 대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고도 충분할 만큼 그리 보였다. 한술 더떠 경아는 지우에게 뭔가 신비스러운 기운까지 느껴져서 경아쪽에서 지우에게 마음이 많이 기울었다.  결국 둘은 절친이 된다. 그리고 많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 재벌, 권력가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경아는 지우 곁을 지켜준다. 단지 지우에겐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후원자만 있을 뿐이었다.


 

성장속에서도 계속 건드려지는 어릴 적 상처

 

경아와 지우의 공통점은 어릴 적 내면의 상처가 매우 깊다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 모두의 관심사다. 어른다운 어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어릴 적 상처가 아물지 않은 탓이다. 누구나 마음 안에 어린 아이가 살고 있다. 그 어린 아이의 모습이 곧 현재 나를 표현해준다. 지우 곁에 있길 원하는 사람은 지우를 치료했던 정신과 의사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은 지우가 글로 남긴 것을 토대로 한다.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갈지 무서웠습니다. 그렇게 정신병원 침대 위에서 문득 느꼈습니다.(...) 이 축적된 불안의 덩어리를 쓰고 싶었습니다. 아름다운 문장의 기교나 재치가 없더라도, 그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편모 슬하에서 자란 지우. 그 어머니곁엔 늘남자가 있었지만, 모두 오래 함께 하진 않았다. 단지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뿐이었다. 지우가 열한 살때, 육이오가 터졌다. 지우에겐 더 깊은 몸과 마음의 상처가 남은 시기였다. 엄마는 죽고 양부모를 만난다.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그리고 정신병원에서 담당의사인 재우를 만난다. 재우는 지우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인지 연민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우는 재우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지우 마음엔 정리 되지 못한 어수선함이 가시가 되어 박혀있다. 그 자리에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사랑과 결혼

 

사랑이 더 깊어져서 닻을 내리고 싶을 때 결혼을 하게 된다. 혼자 생각하고 행동하던 삶이 이젠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시간과 공간이다. 말이 쉽지 현실은 어렵다. 재우는 미국으로 떠나면서 하필이면 무늬만 부부 사이인 재우의 숙부집에 기거를 부탁하고 떠난다. 지우와 숙부 사이에 깊은 사연이 만들어진다. 아름다운 결말을 기대하기 힘들어진다. 재우의 숙부와 지우가 동반 자살을 기도했으나 지우는 깨어난다. 이 시점부터 템포가 빨라진다.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으나, 재우의 아내는 그녀 자신도 정숙하지 못한 주제에 지우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댄다. 지우의 파멸을 위해 혼신을 기울인다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민준(재우의 숙부)부부 사이엔 아들이 하나 있다. 열 아홉살 데카당스다. 부모의 일탈된 행동을 보며 더욱 삐뚤어져간다. 소설 후반부엔 그 아버지가 자살하고 난 후 지우의 꿈 속이라는 설정이지만, 부정한 어머니를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처절하게 공개한다. 요즘 '이혼 법정'은 문턱이 닳을 정도이지만, 사회적 이목 때문에 이혼을 못하고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겉과 안이 완연히 다른 한 가정을 보며 사랑과 결혼이 각자의 삶 속에 약도 될 수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소설의 제목인 [창부의 이력서]보다 더 관심이 가는 이 책의 이력

 

저자 최희숙은 이 소설을 20대에 썼다. 이 작품은 1965년경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들어본다. "나는 이 책이 세상에 던져짐으로써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원하기보다는 얼마나 많은 공격이 들어올까를 각오한다. 이 책은 나의 네 번째 딸이 된다." 저자는 이 책의 주제를 '여자는 모두 창부의 기질을 가졌고, 거기에 놀아나는 사내들은 얼간이'라 했다. 문학적 진리의 의미에서 그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한국 사회의 현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단지 이 한마디 때문에 1965년 1월 10일자로 모 신문에 연재되려다 부녀자들의 아우성에 1회도 실리지 못한 채 사고(社告)로써 중단된다. 그 후로도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들 중 누구도 작품을 본 사람도 없이 단지 작가의 한 마디 '여자는 모두...'에 흥분했다. 작가는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절(寺)로 피신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때는 받아들이지 못한 내용을 지금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슨 사연인가? 그때가 더 도덕적이고, 지금은 아닌가? 그때는 솔직하지 못했고, 지금은 솔직한가? 그때보다 사람들의 이해력과 포용력이 더 좋아졌나? 이 문제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 책 속에서

 

"전 사람들을 이해 할 수가 없어요. 결혼은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나 동거생활은 악의 씨처럼 생각하는 걸요. 둘이 다를 게 뭐 있어요? 결혼도 따지고 보면 국가가 인정한 독점적인 사창(私娼)이 아니고 뭐예요."

 

"당신들 기성 세대부터 세탁하는 겁니다. 위선을 벗어부치고 진실하게 발가벗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우리 젊은 세대들은 당신들의 혁명을 따라갈 겁니다. 우리의 땅에 빛이 뿌려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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