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아 마치 자기 시간인 것처럼 행동한다. 성공한 누군가가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 가족에게 감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이는가족이 구성원 중 한 사람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시간적) 욕구를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는 종종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 유명한 TV 진행자 클라우스 클레버 (Claus Kleber)는 65세가 되던 2020년에 어느 인터뷰에서 아내가 "(자신의) 경력에 대한 대가를대신 치렀다"고 인정했다. 의사인 아내는 남편 클레버의 직업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직업을 수행할 수 없었다. 3 이러한 자기 비판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드물며, 과거를 돌이켜볼 때만 그러한 생각을 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시간을 자기 시간으로 생각하거나 가치가 덜 하다고 여기는 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권력의 차이는 바로 이렇게 생겨난다.
우리의 시간은 항상 다른 사람의 시간과 연결되어 있는 상호적인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시간을 빼앗거나 그들의 시간을 우리 시간보다 덜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그들의 시간에 대해 아주 형편없는 보수를 지불한다면,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덜 자유롭다. 내가시간을 다루는 방식이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질문해야 한다. 시간 부족에서 벗어날 방법은 개인이나 협소한 집단에서찾을 수 없다. 그러기엔 우리의 시간은 서로 너무 밀접하고 다양한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시간으로 서로 얽힌 관계를 풀어헤쳐 소수가 아닌 다수를 위한 공통의 해결책을 찾아 시간을 재구성할 때, 우 - P46

리는 비로소 정의로운 시간 문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P47

본문 여러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득 활동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재의 사회는 과도한 소득 활동이 저임금 노동자의 서비스에 의존하고 있으며, 하인을 부리는 것을 정상으로 취급하는 계급 사회를 만들어낸다. 『돌봄 선언』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돌봄을 둘러싼 가장 큰 아이러니 중 하나는, 부유층이 보수를 지불해서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고용하지만, 사실 그들에게 가장 많이 의존하는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불공정한 분업은 저임금, 저숙련 서비스 직종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존속될 수 있다. 부유한 국가에서 이러한 일자리를얻으려는 사람들을 계속 공급하려면, 세계의 어느 지역이 영구적으로 위기 상태에 처해있거나 적어도 현저히 가난한 상태여야 한다. 전세계 모든 사람이 잘 살고, 교육받고, 직업을 택하고 그 여건을 형성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삶, 그것이 바로 제국주의적 삶의 방식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 세계적 사회 정의와 세계 평화는 부유한국가의 일상적인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우리 자신의 습관을 바꾸거나 포기하며 새로운 공존 모델을 실현하고자 할 때 정의로운 시간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 어린이집, 사회복지 및 돌봄 분야 근로자가 더 나은 보수를 받게 하려면 세금 등을 통해 공공 예산을 재분배하거나 늘려야 한다. 사회 전체에 걸친 돌봄이 실현된 진정한 돌봄 공동체는 지금까지 무급 돌봄 노동을 피했던 사람들이 돌봄 활동을 더 많이 이행하고, 모든 사람이 돌봄 행위를 삶의 일부로 여길 때에만 공정하게 조직될 수 있다. 경제적 격차가 어떻게 사람들을 억 - P338

압하는지, 나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타인의 착취에 관여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비로소전 세계적으로든 가까운 관계에서든 평등이실현될 수 있다. - P338

노동자의 시간을 점점 더 많이 점령해가면서 삶의 질, 건강, 돌봄,
인간관계, 생태적 균형을 갉아먹는 경제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러한 발전 중심 사고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양립할 수 있을까? 인류학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은 "자본주의 반민주주의적 성향을가지고 있으며,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라고쓰고 있다. 그의 논지는 노조가 잘 조직되어 있는 부문의 근로자들이 근로시간 단축 등을 통해 기업 이윤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몫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통해 뒷받침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노동조합 설립을 막아서고 있다. - P336

시간 정의를 바로 세우는 정책에서는 ‘일‘이 무분별한 성장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의 기반과 미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기여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에겐 아이와 돌봄 책임이 환영받는 시간 문화, 삶을 긍정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시간 문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시간 문화는 사람들이 앞으로 더 큰 돌봄 공동체 속에서 모이고, 돌봄을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참여하는 사회적과제로 조직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

시간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원 중 하나다. 모든 사람에겐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 외에 자신에게 중요한 일에 대해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무언가를 바꿀 힘이 전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를지배하고 있는 시간 질서는 ‘살아 있는 민주주의‘라는 관념과 모순된다. 따라서 시간 정의 문제를 미루는 것은 정치적으로 태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우리 시간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고, 평가 절하되며, 착취당하고 있다. - P339

아이와 노인, 일이 우리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시간이 늘 부족한 이유는 큰 책임을 져야 하거나 해야 할 일이 많을 때 우리가 서로를 충분히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은 결코 혼자서 통제할 수 없다. 단둘이서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에 대한 이러한 설계상의 결함을 언제든 고칠 수 있다. 서로 힘을 합치면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돌봄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건 자녀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이며, 이는 분명 더 활기차고 사랑스럽고 미래 지향적인 일이다.
또한, 우리는 모두가 좋은 소득 활동을 하도록 할 수 있고, 꺼리는 일은 보다 공정하게 분배하고 나쁜 일자리가 애초에 만들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녹초가 된 근로자가 집에서 홀로 자기를 돌보는것만으로는 노동 조건을 개선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근무조건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계와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 P343

자녀를 가질 적절한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자녀를 가질 준비가 되었는지를 고려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작가 톰스코카(Tom Scocca)는 ‘진정한 생물학적 시계(Real Biological Clock)를 부모가 된 후 이론적으로 자녀와 함께 보낼 수 있는 햇수로 설명했다. 스코카는 아이를 낳기에 적절한 시기를 찾기 위해 내가 죽어갈 때쯤이면 아이들은 몇 살 무렵일까?라는 어려운 질문을 던져볼것을 제안한다. "우리가 자녀의 삶에서 멀어지는 시기가 언제인지, 자녀의 삶의 어느 단계에 우리가 세상을 뜨게 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족과 사회의 가치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요인을 통해 자녀와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 자녀에게 물질적으로 무언가를 제공하는 부모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 P253

자녀를 위해 많은 시간을보내는 것이 나에게 중요한가? 자녀와 함께 보내게 될 그 시간은 내인생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 나중에 내 자녀가 부모가 되면 나는 조부모가 되어 그들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자녀가 아직 대학을 다닐 때내가 그들의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 되지는 않을까? 등 다양한 문제를 고려할 수 있다.
톰 스코카는 자녀가 없는 삶보다는 가족을 구성해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살면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고 얼마나 많은 것이 변하는지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의 시간 감각을 점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직 가정을 꾸리지 않은 사람들이나 자녀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돌봄 책임이 없는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자유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가 왜 지금까지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과 자유를 함께 생각하지 못했는지를돌아보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자녀가 없어야만 자유롭다면, 이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 아닐까?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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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잉 홈
문지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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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혁 작가의 책은 <고잉 홈>이 처음이다. 이 책을 사고 얼마 되지 않아 독립서점인 '우연한 서점'에 들렀다가 나이책을 샀다. 내 나이에 꽂혀 있던 책을 뽑아 들고 계산을 한 후 포장을 열었다. 문지혁 작가의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였다. 피식 웃음이 났더랬다.


<고잉 홈>은 책표지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이기도 하고, 무언가 아련해지는 기분이 들어 쓸쓸해졌다. 여러 단편들을 읽는데, 십여 년 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노력 끝에 자격증을 땄는데 그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니. 예전에 수능 끝나고 대학만 가면 끝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대학 갔더니 앞이 막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인생이 그런 것인지 끝은 없었다. 손에 쥔 자격증은 말 그대로 자격증일 뿐, 나는 또 다시 선택을 해야 했고, 경험을 쌓아야 했다. 정말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동기들이 막말로 "꼬마요정도 개업하는데 누구든 못해" 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래서였을까. 안정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으나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특히 <나이트호크스>는 읽는 데 다른 의미로 마음이 아팠다. 줄어드는 통장 잔고 앞에서 병원에 가는 것이 무서워 약국으로 가자는 아내의 말을 수용하는 '비겁'해지는 마음이 말이다. 그 뿐인가, <뜰 안의 볕>의 늘봄처럼 이 선택이 맞는지 확신도 없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마음도 공감이 갔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비주류인 늘봄처럼 나 역시 내 업종에서는 그런 상태였으니. 내가 선택한 길이 맞는지, 잘 하고 있는지 늘 물음표를 가진 채 그렇게 지내왔다. 어떤 때는 뿌듯했지만 나 자신에게 실망스러울 때도 많았다. 나는 <골드 브라스 세탁소>의 영처럼 반듯한 길에서조차 길을 잃는 사람이었고, <고잉 홈>의 현처럼 나에게 일어날 사실이었으면 하는 일을 상상했다. 


<뷰잉>은 다른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는데 떠밀리듯 하게 되는 일들이 가끔 상처로 남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뷰잉은 일종의 장례식장이다. '나'는 그냥 맹 선생님이 들렀다 가야 한다 해서 가게 되었는데, 막상 관을 보고 떨게 된다. 시체를 본 적 없어서. 나는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나는 시체를 만져본 적도 있는데라고 말했다. 남편에게 "시체 만져본 적 있어? 진짜 냉기가 장난 아냐, 저세상 차가움이야."라고 했더니 남편이 "냉동고에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라고 답했다.


난 온기가 사라진 시체라서 그렇게 차가운 줄 알았는데, 어쩌면 냉동고에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다 다시 노아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 역시 떠밀리듯 학원에서 강사 아르바이트를 했던 때가 기억났다. 교회 집사님이 원장선생님이었는데, 난 하루만에 짤렸다. 애들에게 신앙심을 흔드는 이야기를 했으니까. 내가 안 믿는다고 애들한테 그렇게 이야기할 건 아니었는데. 원장 선생님은 맹 선생님, 아니 심 선생님 같은 분이 아니었다. 그런 분이었다면 나는 달라졌을까.


<핑크 팰리스 러브>는 버리지 못한 미련과 하지 못한 이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잘 만나고 얼마나 잘 헤어지고 있을까. 일로 만나든 사랑으로 만나든 어떤 이유로든 만나고 헤어지며 그 인연을 끝내기까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까. 흔들리는 삶에서 과거를 마주할 때 비겁함과 우유부단함은 얼마나 큰 후회를 남기게 될까.


<크리스마스 캐러셀>과 <우리들의 파이널 컷>은 잃어버림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이를 잃어버리고 아버지를 잃어버린다. 입양아인 에밀리와 지적장애인인 아버지는 다르지만 이별을 잘 마무리했기에 사랑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동반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자녀 살해는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는 장인어른을 만나러 가는 여정을 이야기한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호철은 미국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입양한 딸 조이를 결혼시킨 후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아지자 조이와 사위는 비록 코로나 시기이지만 아버지와 장인어른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그 여정에서 사위는 이호철에 대해 생각한다. 그가 살아낸 세월은 험난했고, 그는 용감했다.   


그들에게 '홈'은 어떤 곳일까. 그곳은 미국에서 정착하여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고, 한국일 수도 있다. 낯선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교회든 어디든 한인 공동체를 찾는다. 소속감이란 생존과 직결되니까.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떠난 곳에 적응하지 못하여 돌아온다 하여 결코 실패한 건 아니다. 그저 또 다른 경험을 했을 뿐이고, 삶이라는 여행에서 여행지 하나를 추가한 것이다. 그러니 불안과 이별 안에서 너무 종종거리지도 아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그러했으면 좋겠다. 

게시물 사건 이후 수는 교회에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그가 나타나지 않으리나는 건 영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준 하드커버 원서 <The Book of Daniel>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의 흔적이 집에 남아 있는 건 불결하게 느껴졌다. 돌려주려는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나타나면 책을 세로로 세워 그의 머리를 내려찍을 작정이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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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9-02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단편집 좋았는데 리뷰를 쓸 수 있을지 ㅎㅎ

꼬마요정 2024-09-02 22:30   좋아요 1 | URL
자목련 님 리뷰 완전 기대돼요💕👍🏽 리뷰 좋을 것 같아요!!! 아니 이미 좋아요 ㅎㅎ

희선 2024-09-05 0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지혁 작가 책을 처음 보고, 다른 곳에서 문지혁 작가 책을 사게 돼서 신기했겠습니다 소설은 제목과 반대일 때가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소설 속에서는 안 좋다 해도 소설이 끝나고 나서는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걸지도... 좋아질지 모르겠지만...


희선

꼬마요정 2024-09-07 23:36   좋아요 1 | URL
네!! 신기했어요. 문지혁 작가 책이 딱 나오니까 어멋 하게 되더라구요 ㅎㅎㅎ 소설 속에서는 안 좋아도 소설이 끝나고 나서는 좋아지면 좋겠어요. 이 책 재미있게 봤습니다. 우울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사는 인물들이 인상적이었어요. 불안하지만 답이 정해져 있으면 그것 또한 재미가 없겠지요. 삶은... 참 어렵습니다.
 
판소리 에스에프 다섯 마당
곽재식 외 지음 / 구픽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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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열두 마당 중 다섯 마당을 소재로 하여 다섯 편의 재미난 이야기들이 나왔다. '마당'은 판소리 곡을 세는 단위로 열두 마당이라 하면 열두 곡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중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적벽가>, <수궁가> 이렇게 다섯 마당만 전해진다. 나머지 일곱 마당은 <배비장 타령>, <변강쇠 타령>, <강릉 매화 타령>, <옹고집 타령>, <장끼 타령>, <무숙이 타령>, <숙영낭자 타령>이라고 한다. 이 책은 <춘향가>, <변강쇠 타령>, <심청가>, <적벽가>, <옹고집 타령> 다섯 편을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첫 번째 이야기는 곽재식 작가의 <춘향가를 가장 재미있게 듣는 법>이다. 춘향가는 너무 잘 알려진 판소리이며, 춘향전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단순하게 보면 선남선녀가 역경을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한다는 이야기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조선시대 사회의 모습이나 정치제제 등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많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신분 제도가 있고, 여성의 정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남성의 성을 만족시켜 줄 기생이라는 존재도 있으며, 지방 관리가 있고, 권력의 힘으로 백성을 짓누를 수도 있다. 과거 제도가 있어 급제를 하면 지방을 감찰하는 관리인 암행어사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불타는 이팔 청춘들은 연애도 한다. 


어느 날 인터넷 미디어 회사의 이차장이 나를 찾아온다. 방송시간 20분 정도 빈다고 그 시간을 채워 줄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소재를 찾다가 교육청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교육청에서 춘향가를 몰입 감상 방법으로 듣는 과정을 정규 교육 과정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자 반대하고 나섰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다른 판소리들보다 춘향가를 몰입 감상 방법으로 정규 교육에서 배웠을 때 사람들의 인성이 더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나는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게 된다. 결국 해답은 몰입 감상 방법이었는데, 굉장히 그럴싸해서 나도 그 방법으로 영화를 보거나 판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그리고 대학원생은 정말 힘든 직업이구나 생각했다. 정말 미래의 어느 날, 사람들은 AI가 명창들의 장점만을 모아놓은 판소리를 듣고, AI가 하는 공연을 보면서 감동 받게 될까. 더 이상 전수 받는 사람이 없어 실전의 위기에 놓인 많은 전통 문화들이 이렇게라도 전승된다면 다행이지 않을까 싶기도.


두 번째 이야기는 김이삭 작가의 <낭인전>이다. <변강쇠 타령>은 옹녀가 맞이하는 신랑마다 죽어나가서 짝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변강쇠를 만나 무사히 결혼을 하게 되고, 이 변강쇠가 마을 장승을 베어다가 땔감으로 쓰는 바람에 죽게 되자 그의 장례를 치르는 내용을 노래한 것이다. 성애의 장면이 많아 아주 야해서인지 노래가 전해내려오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변강쇠는 낭인이 되었다.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여차저차한 이유로 유랑하는 사람도 낭인, 늑대인간도 낭인이다. 장승들은 추노꾼처럼 낭인을 사냥하는 자들이다. 또 신랑을 잃은 옹녀는 마을에서 쫓겨나고, 장승들에게 쫓기던 변강쇠를 만났다. 운명의 남자였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보호받지 못하고, 기근이나 고리대로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유랑하다 죽었다. 조선 후기, 하층민의 삶은 팍팍하다 못해 처참했으나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괴력난신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었다. 원작은 장승을 땔깜으로 만들어서 변강쇠가 죽었는데, 이 이야기는 어떠할까. 이번에는 우리 변강쇠가 질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왜냐? 옹녀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으니까. 


세 번째 이야기는 김청귤 작가의 <해사>이다. 심청이는 아버지를 위해 아니 정확하게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준다는 스님에게 공양미 삼 백석을 바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이 이야기나 효녀 지은 이야기가 효를 행하는 자식의 훌륭한 표본으로 전해내려 오는 것을 보면 좀 무섭기도 하다.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종이 되는 것이 정말 진정한 효일까?


심청은 그렇게 바다에 던져지고 행복했을까. 아버지의 눈이 떠지는 게 심청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까. 이 이야기에서는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청이는 연구실에서 섹스를 하다가 약품이 눈에 들어가 눈이 먼 연구원 아버지 때문에 바다로 가게 되었다. 바다가 위험해진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좁아지고 있던 터라 식량이 급속도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게 급했고, 넓어지고 있는 죽음의 바다를 연구하는 것이 급했다. 식량이 급속도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약품을 연구하던 청이의 아버지는 실패했고 빚더미에 올랐다.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청이를 죽음의 바다로 내몰았다. 연우라는 연인을 두고 청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바다로 가는데...


그렇게 간 바다에는 의외로 돌고래도 있었고, 거대한 해사도 있었다. 인간이 바다에 오면 돌고래도, 해사도 모두 위험해질 것이라 예상한 청이는 그들의 존재를 숨겼다. 로켓 같은 것이 몸에 박힌 해사는 청이에게 그 이물질을 제거해줄 것을 부탁했고, 청이는 그 청을 들어주고 로켓을 파괴하도록 하면서 둘은 친해졌다. 사람은 어디 있든 정서적 안정이 정말 중요하다. 빛도 없는 깊은 바다 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있으면 어떤 사람이든 미치지 않을까. 그래서 청아. 다행이야, 너가 행복해져서.


네 번째 이야기는 전혜진 작가의 <눈 딱 감고 적벽강에 다이브>이다. 적벽구에서 거의 30년을 국회의원으로 지낸 전설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유장락. 그는 민한당이었고 민한당이 분열을 거듭한 끝에 몰락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위당의 동영탁과 신의당의 왕천봉을 제치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고 세상을 떠났다. 무주공산 이 곳에 누가 공천을 받아 올 것인가. 로사 언니는 동오당의 손권지영을 지지했지만 선거 알바는 국위당의 조아만 사무실에서 했다. 돈을 잘 준다는 이유였다. 유장락이 손에 쥐고 있던 이 곳에서 돈과 인플루언서의 힘으로 조아만의 지지율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제갈영과 유현덕 변호사의 등장으로 선거판은 조금씩 흔들리게 되고, 연환계는 승기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게 되는데... 


정치인들의 권력 싸움이나 오판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고통받는 것은 백성들이다. 불타는 적벽에서 수없이 죽어나간 병사들은 자신들이 죽을만큼 큰 죄를 지었는지, 여기서 왜 죽어야 하는지 알았을까. 때로 역사는 비정했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박애진 작가의 <호수의 여신>이다. 옹고집 타령은 옹고집전과 내용이 유사할 것이라고 한다. 실전되어 전해내려오지는 않지만 옹고집전과 유사하다면 내용은 모두가 알고 있다. 옹고집이 욕심이 많고 고집이 너무 세서 화가 난 도승이 볏짚으로 가짜 옹고집을 만들어 그를 깨우쳐 착하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박애진 작가는 그런 옹고집이 아니라 뚝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하다. 레전드 가수인 호수는 팬들이 선물해 준 별 '호수'에 칩거한 채 가끔 콘서트만 열고 있다. 범우주항공국은 돈을 받고 별들을 팔았는데, 만약 구매한 별들 중 지성체가 있다면 소유권은 사라지고 환불도 못 받는다고 명시했었다. 다행히 호수의 별에는 지성체가 없었고 호수는 그 별을 소유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웜홀이 발견되었다. 웜홀은 우주 탐사에 큰 획을 그었는데, 행성 호수 근처에 두 번째 웜홀인 도스가 발견되었다. 범우주항공국이든 웜홀관리국이든 별을 팔 때는 언제고 이제는 사유지인 행성 호수에 우주선 정비소를 짓게 해 달라고 호수를 조르고 있는 판국이었다. 호수는 절대 거절을 시전 중이었고, 이 상황에서 교섭자로 제레미를 내세웠다.


제레미는 이 일을 맡아 진행하면서 호수에 대해 알게 되고, 호수의 팬인 안나를 알게 되었다. 가수와 팬은 서로에게 진실했고, 어느 면에서는 아주 닮아 있었다. 레전드 가수였던 호수는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아흔일곱 살이었고, 말 그대로 팬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여기서 떠남은 죽음이었다. 그리고 500번 째 콘서트에서 앙콜을 외친 단 한 명의 팬이 103세의 안나였다.  


개발 논리는 막강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들이 있었단 걸 기억하면 좋겠다. 사람들이 살던 터전이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에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지는 않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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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8-29 04: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판소리와 에스에프가 만났군요 이런 걸 쓰기도 하다니... 판소리는 잘 듣지 않기도 하네요 그런 것도 잘 들으면 재미있을지도 모를 텐데, 전승자가 사라질지도... 그걸 AI가 할까요 요즘은 죽은 사람 목소리를 재현하기도 하니, 죽은 사람뿐 아니라 산 사람도... 그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밤엔 좀 시원합니다 꼬마요정 님 팔월 남은 날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꼬마요정 2024-08-29 23:09   좋아요 2 | URL
예전에 티비에서 판소리 들은 적 있는데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더라구요. 심청가였는데 다 아는 내용인데도 재밌게 보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점점 사라질 것 같은데 그나마 AI가 보존해 준다면 좋겠어요.

죽은 사람 목소리를 재현하기도 하는군요. 그건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희선 님도 남은 팔월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밤이 시원하니 계절이 변하는 걸 느끼네요.
 
우주 대전의 끝 위픽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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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서울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들은 주소를 물으면 보통 **시 ##구 @@동이라고 하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구 @@동 혹은 ##구에 살아요라고만 말한다고. 그런데 이 책의 송진혁은 그렇게 말하면 뭔가 건방져 보인다면서 외국인이 물어보면 대한민국 서울시 ##구 @@동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거기다가 더해 만약 외계인이 물어본다면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처녀자리 은하단 국부 은하군 은하수 은하계 태양계 지구 서울시 ##구 @@동이라고 말해야 정확하고 예의 바른 대답 아니겠냐고. 물론 상대가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이란 이름은 2010년대에 지구 천문학자들이 하와이 말로 붙인 이름인데 외계인이 알겠냐고 말하는 건 한 귀로 흘려들었을 뿐.


아니 그런데 진짜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이란 말을, 지구를 아는 외계인이 있었다.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의 한 구역에 웜홀 연쇄 반응이라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났고, 그 현상은 각기 다른 초은하단들이 서로 전자를 주고 받게 했고, 이런 전기 반응은 100억 년 정도나 계속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 반응이 마치 뇌 속의 시냅스들이 신호를 주고 받는 것 같은 모양이었고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정신체가 되었다. 이 거대한 정신체의 이름은 '우주 골치'였는데, 이 현상을 전 우주에서 거의 처음으로 발견한 솜브레로 은하계의 92,385,213,583번 별 제4행성의 외계인 학자가 붙였다. 물론 우주 골치는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이 이름도 긴 행성의 이름은 '석구'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땅을 돌덩어리라고 생각해서 석구인이었는데, 이들은 우주 골치를 없애기로 마음 먹었다. 우주 골치가 자신들의 소원을 제멋대로 들어줘서 사소한 말다툼을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8억 년 동안 그들은 싸웠고 우주 골치는 점점 힘을 잃어가던 차에 송진혁을 만났다. 아니, 송진혁의 뇌에 들러붙게 되었다.


전 우주를 아우르던 우주 골치가 고작 한 인간의 자그마한 뇌에 들어가다니... 역시 인간의 뇌는 우주였던가. 현명한 사람은 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데, 우주 골치는 그저 피터팬처럼 마냥 아이 같은 존재였을까.


역시, 지구인이든 석구인이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 사람 정도 희생시키는 건 아무 일도 아닌가보다. 사람 목숨이 이익과 비용 개념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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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8-29 0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안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를...


희선

꼬마요정 2024-08-29 23:30   좋아요 1 | URL
맞아요.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죄책감 어떻게 할까요ㅠㅠ 누군가의 희생이 해답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적산가옥의 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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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2층집에 살았다. 2층에는 두 가구가 살 수 있었고, 복도 끝에 화장실이 있었다. 나는 동생과 중학생 언니들이 있는 방에서 곧잘 놀았고, 놀다가 책상에 입을 부딪혀 앞니가 깨지면서 피를 철철 흘리는 바람에 그 뒤로 언니들과의 놀이는 끝났다.(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2년 가까이를 앞니 빠진 개우지로 살았다...ㅠㅠ) 언니들의 엄마가 공부해야 하는데 자꾸 내가 놀러간다고 우리 엄마한테 한소리했기도 했고. 지금도 그 언니들이 떠오르는데, 생김새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도 고맙고 좋은 언니들이었다. 그 때 언니들과 무서운 이야기도 곧잘 했는데, 언니들 방문을 열면 복도벽이랑 거의 닿을 듯 했다. 그래서 활짝 열지 않고 복도벽과 직각이 되도록 열면 복도는 아무도 지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날, 우리는 열심히 무서운 이야기를 하다가 무언가 하얀 것이 지나가는 것 같았고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우리가 하얀 것을 보았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귀신이 사는 집은 어떤 느낌일까. 세상에 나와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지박령에 관한 이야기들이 보통 집에 붙어 있는 귀신 이야기가 많다. 물론 귀신이 붙박이 된 곳이 집이 아니라 우물일 수도 있고, 나무일 수도 있지만 보통 집에 붙어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야기가 많다. 적의 재산이었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 이야기 역시 귀신이 사는 집 이야기임과 동시에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2020년대 현운주는 남편 우형민과 함께 외증조모가 남긴 적산가옥에 살게 된다. 외증조모의 유언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1940년대 현운주의 외증조모인 박준영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호남지방 지주와 농민들에게 땅을 빼앗아 그 땅에서 난 곡식을 수출하여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사치품 무역에 뛰어드는 등 손대는 것마다 성공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무역상 가네모토가 이 붉은담장집의 첫번째 주인이었다. 


가네모토가 이사하던 날, 박준영은 피처럼 붉은 1인용 벨벳 소파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소파에 앉아서 어울리는 사람은 가네모토의 부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아들. 박준영은 그 집에 꼭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온갖 보물들이 가득하다는 그 집에 가난한 식민지 조선인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병원에서 간호부로 일하던 준영에게 입주 간호 제안이 들어온다. 붉은담장집이었다. 그리고 준영은 그 곳에서 기괴한 소년 유타카를 만났다. 살아있는 것들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뒤집어 쓰거나 자해를 하여 자신의 피를 뒤집어 쓰는 소년은 작고 가늘었다. 준영은 그런 유타카에게 심술을 부리기도 하지만 양아버지인 가네모토에게 착취당하는 것을 알게 되자 연민을 느끼며 유대감을 쌓아갔다. 


현운주는 일본에서 돌아와 남편과 이 집에 들어온 후 이상한 꿈을 꿨다. 계속되는 꿈 속에서 그녀는 현운주인지 박준영인지 알 수 없었다. 희뿌연 조명 아래 서 있는 것마냥 시야는 늘 탁했고 몽롱했다. 남편이 다정하게 차를 타 주고 끼니를 사 오거나 차려주면서 돌봐주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깨어있을 때면 별채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고 가 보면 아무도 없었다. 


피와 비명이 가득한 채 차갑게 가라앉은 분노와 식지 않은 재가 시간을 삼키면서 그 집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듣고 싶은 목소리와 부드러운 땅콩빵은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처절하면서도 애달픈 시도였다.  


'오직 호러만이 죽은 자가 죽은 입으로 자신의 소리를 낸다.'고 작가는 말한다. 죽은 뒤에 한 말뿐 아니라 죽기 전에 한 말마저 곱씹게 만드는 호러의 힘은 무엇일까. 죽은 자의 억울함이 모두를 죽음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공포일까, 약자라 여겨졌던 이의 마지막 발악이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아버지는 내가 죽일거야."(p.94) 


박준영은 유타카의 이 말을 정말 한참 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유타카의 마지막 목소리는 증손녀인 현운주를 위해 남겨뒀다. 외증조모의 안배에 운주는 어떤 선택을 할까.


유타카가 살았고, 준영이 살았고, 운주가 살았던 그 집은 두 번 타올랐다. 적절한 때에 맞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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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8-29 0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 사람 집이었는데 운주 외증조모인 박준영 집이 된 건가요 광복이 되고 어떻게 하다 그렇게 됐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유령이 나올지... 그런 집에 살면 무서울 것 같기도 하지만, 거기에 살았던 사람 일을 알게 되면 슬플 것 같기도 하네요


희선

꼬마요정 2024-08-29 23:47   좋아요 1 | URL
네, 처음엔 가네모토가 살았어요. 가네모토의 의붓아들이 유타카였구요. 그러고 해방이 되고 가네모토와 유타카가 죽은 뒤 어느 날 박준영의 집이 되었구요. 그 집을 운주에게 물려준 거죠. 저도 그런 집에 살면 무서울 것 같은데, 또 다 이유가 있더라구요. 어쩌면 이것은 약자들의 연대일 수도 있고, 내리사랑일 수도 있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