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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에스에프 다섯 마당
곽재식 외 지음 / 구픽 / 2023년 3월
평점 :
판소리 열두 마당 중 다섯 마당을 소재로 하여 다섯 편의 재미난 이야기들이 나왔다. '마당'은 판소리 곡을 세는 단위로 열두 마당이라 하면 열두 곡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중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적벽가>, <수궁가> 이렇게 다섯 마당만 전해진다. 나머지 일곱 마당은 <배비장 타령>, <변강쇠 타령>, <강릉 매화 타령>, <옹고집 타령>, <장끼 타령>, <무숙이 타령>, <숙영낭자 타령>이라고 한다. 이 책은 <춘향가>, <변강쇠 타령>, <심청가>, <적벽가>, <옹고집 타령> 다섯 편을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첫 번째 이야기는 곽재식 작가의 <춘향가를 가장 재미있게 듣는 법>이다. 춘향가는 너무 잘 알려진 판소리이며, 춘향전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단순하게 보면 선남선녀가 역경을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한다는 이야기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조선시대 사회의 모습이나 정치제제 등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많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신분 제도가 있고, 여성의 정절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남성의 성을 만족시켜 줄 기생이라는 존재도 있으며, 지방 관리가 있고, 권력의 힘으로 백성을 짓누를 수도 있다. 과거 제도가 있어 급제를 하면 지방을 감찰하는 관리인 암행어사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불타는 이팔 청춘들은 연애도 한다.
어느 날 인터넷 미디어 회사의 이차장이 나를 찾아온다. 방송시간 20분 정도 빈다고 그 시간을 채워 줄 원고를 청탁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소재를 찾다가 교육청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교육청에서 춘향가를 몰입 감상 방법으로 듣는 과정을 정규 교육 과정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자 반대하고 나섰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다른 판소리들보다 춘향가를 몰입 감상 방법으로 정규 교육에서 배웠을 때 사람들의 인성이 더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나는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게 된다. 결국 해답은 몰입 감상 방법이었는데, 굉장히 그럴싸해서 나도 그 방법으로 영화를 보거나 판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그리고 대학원생은 정말 힘든 직업이구나 생각했다. 정말 미래의 어느 날, 사람들은 AI가 명창들의 장점만을 모아놓은 판소리를 듣고, AI가 하는 공연을 보면서 감동 받게 될까. 더 이상 전수 받는 사람이 없어 실전의 위기에 놓인 많은 전통 문화들이 이렇게라도 전승된다면 다행이지 않을까 싶기도.
두 번째 이야기는 김이삭 작가의 <낭인전>이다. <변강쇠 타령>은 옹녀가 맞이하는 신랑마다 죽어나가서 짝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변강쇠를 만나 무사히 결혼을 하게 되고, 이 변강쇠가 마을 장승을 베어다가 땔감으로 쓰는 바람에 죽게 되자 그의 장례를 치르는 내용을 노래한 것이다. 성애의 장면이 많아 아주 야해서인지 노래가 전해내려오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변강쇠는 낭인이 되었다. 마을에서 쫓겨나거나 여차저차한 이유로 유랑하는 사람도 낭인, 늑대인간도 낭인이다. 장승들은 추노꾼처럼 낭인을 사냥하는 자들이다. 또 신랑을 잃은 옹녀는 마을에서 쫓겨나고, 장승들에게 쫓기던 변강쇠를 만났다. 운명의 남자였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보호받지 못하고, 기근이나 고리대로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유랑하다 죽었다. 조선 후기, 하층민의 삶은 팍팍하다 못해 처참했으나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괴력난신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었다. 원작은 장승을 땔깜으로 만들어서 변강쇠가 죽었는데, 이 이야기는 어떠할까. 이번에는 우리 변강쇠가 질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왜냐? 옹녀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으니까.
세 번째 이야기는 김청귤 작가의 <해사>이다. 심청이는 아버지를 위해 아니 정확하게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준다는 스님에게 공양미 삼 백석을 바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이 이야기나 효녀 지은 이야기가 효를 행하는 자식의 훌륭한 표본으로 전해내려 오는 것을 보면 좀 무섭기도 하다.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종이 되는 것이 정말 진정한 효일까?
심청은 그렇게 바다에 던져지고 행복했을까. 아버지의 눈이 떠지는 게 심청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을까. 이 이야기에서는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청이는 연구실에서 섹스를 하다가 약품이 눈에 들어가 눈이 먼 연구원 아버지 때문에 바다로 가게 되었다. 바다가 위험해진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좁아지고 있던 터라 식량이 급속도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게 급했고, 넓어지고 있는 죽음의 바다를 연구하는 것이 급했다. 식량이 급속도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약품을 연구하던 청이의 아버지는 실패했고 빚더미에 올랐다.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청이를 죽음의 바다로 내몰았다. 연우라는 연인을 두고 청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바다로 가는데...
그렇게 간 바다에는 의외로 돌고래도 있었고, 거대한 해사도 있었다. 인간이 바다에 오면 돌고래도, 해사도 모두 위험해질 것이라 예상한 청이는 그들의 존재를 숨겼다. 로켓 같은 것이 몸에 박힌 해사는 청이에게 그 이물질을 제거해줄 것을 부탁했고, 청이는 그 청을 들어주고 로켓을 파괴하도록 하면서 둘은 친해졌다. 사람은 어디 있든 정서적 안정이 정말 중요하다. 빛도 없는 깊은 바다 속에서 홀로 고독하게 있으면 어떤 사람이든 미치지 않을까. 그래서 청아. 다행이야, 너가 행복해져서.
네 번째 이야기는 전혜진 작가의 <눈 딱 감고 적벽강에 다이브>이다. 적벽구에서 거의 30년을 국회의원으로 지낸 전설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유장락. 그는 민한당이었고 민한당이 분열을 거듭한 끝에 몰락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위당의 동영탁과 신의당의 왕천봉을 제치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고 세상을 떠났다. 무주공산 이 곳에 누가 공천을 받아 올 것인가. 로사 언니는 동오당의 손권지영을 지지했지만 선거 알바는 국위당의 조아만 사무실에서 했다. 돈을 잘 준다는 이유였다. 유장락이 손에 쥐고 있던 이 곳에서 돈과 인플루언서의 힘으로 조아만의 지지율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제갈영과 유현덕 변호사의 등장으로 선거판은 조금씩 흔들리게 되고, 연환계는 승기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게 되는데...
정치인들의 권력 싸움이나 오판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고통받는 것은 백성들이다. 불타는 적벽에서 수없이 죽어나간 병사들은 자신들이 죽을만큼 큰 죄를 지었는지, 여기서 왜 죽어야 하는지 알았을까. 때로 역사는 비정했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박애진 작가의 <호수의 여신>이다. 옹고집 타령은 옹고집전과 내용이 유사할 것이라고 한다. 실전되어 전해내려오지는 않지만 옹고집전과 유사하다면 내용은 모두가 알고 있다. 옹고집이 욕심이 많고 고집이 너무 세서 화가 난 도승이 볏짚으로 가짜 옹고집을 만들어 그를 깨우쳐 착하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박애진 작가는 그런 옹고집이 아니라 뚝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하다. 레전드 가수인 호수는 팬들이 선물해 준 별 '호수'에 칩거한 채 가끔 콘서트만 열고 있다. 범우주항공국은 돈을 받고 별들을 팔았는데, 만약 구매한 별들 중 지성체가 있다면 소유권은 사라지고 환불도 못 받는다고 명시했었다. 다행히 호수의 별에는 지성체가 없었고 호수는 그 별을 소유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웜홀이 발견되었다. 웜홀은 우주 탐사에 큰 획을 그었는데, 행성 호수 근처에 두 번째 웜홀인 도스가 발견되었다. 범우주항공국이든 웜홀관리국이든 별을 팔 때는 언제고 이제는 사유지인 행성 호수에 우주선 정비소를 짓게 해 달라고 호수를 조르고 있는 판국이었다. 호수는 절대 거절을 시전 중이었고, 이 상황에서 교섭자로 제레미를 내세웠다.
제레미는 이 일을 맡아 진행하면서 호수에 대해 알게 되고, 호수의 팬인 안나를 알게 되었다. 가수와 팬은 서로에게 진실했고, 어느 면에서는 아주 닮아 있었다. 레전드 가수였던 호수는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아흔일곱 살이었고, 말 그대로 팬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여기서 떠남은 죽음이었다. 그리고 500번 째 콘서트에서 앙콜을 외친 단 한 명의 팬이 103세의 안나였다.
개발 논리는 막강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들이 있었단 걸 기억하면 좋겠다. 사람들이 살던 터전이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에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지는 않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