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
김유정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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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물과 바람, 구름을 다스리는 상서로운 존재다, 동양에서는. 그리고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오르면 마침내 용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용이 대학원에 다닌다면? 그것도 100년 동안이나 말이다. 미래창조인공지능융합과학 파트에서 공부하는 7년 차 방장인 은진은 어느 날 교수님으로부터 날벼락 아니 용을 맞았다. 100년 전부터 이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인간과는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그 존재는 문학부나 법학부, 생물학부 등을 다녔더랬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름도 어려운 미래창조인공지능융합과학부로 들어왔다. 


우리가 생각하는 용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존재, 자연현상 중 물과 관련된 것들을 부릴 수 있는 존재였다. 용의 기원 중 하나가 토네이도, 용오름이라는 설이 있는 걸 보면 더 더욱 그렇게 느낄 수 있는데, 이런 자연현상이 이제 과학적으로 밝혀진 지금 세상에서 용은 어떤 존재일까. 


김유정 작가는 <용의 만화경>에서 용이란 존재를 또 다시 상서롭고 초현실적인 존재로 그려놓았다. 인간은 태고적부터 자연현상이든 그 무엇이든 이해하고자 했고,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이야기들을 만들어 왔다. 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명이 안 되면 그것은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3차원을 넘어선 존재인 용은 여전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용이 있으니 이무기도 있었다. 물론 옛 이야기에서 나오는 그런 이무기는 아니었지만. 욕심이 많아 여의주를 두 개 물고 있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아니라 애초에 용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좀 마음이 아프다고나 할까. 그런 존재들과 함께 대학원 생활을 하게 된 은진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인간의 무한한 호기심이 충족될 날이 올까 싶지만, 그래도 이런 다정한 존재들이 함께라면 좀 더 따뜻한 미래를 꿈꿔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김이삭 작가의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이다. 1849년, 프랑스는 청나라로부터 상하이에 있는 땅을 빌렸다. 임대료는 없었다. 이 조계지는 1943년 일본 괴뢰정부 왕징웨이 정권에게 넘어가면서 사라졌다. 영화 <무명>이 왕징웨이 정권 시기의 이야기인데,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남의 나라 분열이나 내 나라 분열이나 열불 터지는 건 비슷했다. 하지만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은 뭔가 좀 더 상큼했다. 요즘은 좀비가 대세인데, 여기는 '강시'가 나온다. 명나라가 망하자 남쪽으로 도망쳤던 리쯔는 300년이나 지나 되살아났다. 그리고 '양놈'을 먹으며 살아간다. 옛 상해(라오상하이)에서 식인자(아니, 리쯔는 강시니까 식시자인가)는 강시인 리쯔만이 아니었다. 저 먼 나라 영국의 뒷골목에서 살인을 일삼던 잭 더 리퍼 같은 이도 있었고, 나쁜 짓을 하는 이들을 잡아 샤오롱빠오로 만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탐욕이 부패한 위정자들에게 고통받던 이들을 또 다른 방식으로 짓밟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갔다.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하며. 약자들의 연대는 생각보다 단단했고, 따뜻했다. 그 연대가 곧 바스라진다 하더라도 연대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으로 남을만큼.


세 번째 이야기는 한켠 작가의 <어느 날, 잔멸치>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겪은, 겪고 있는, 겪을 끔찍한 무기력증을 겪는 (소)진의 이야기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서울에 살 수 있을만큼 여유를 가지지 못한 그녀는 경기도에서 출퇴근을 해야 했다. 왕복 4시간은 사람을 지치고 지치게 했다. 다니는 회사에서 자신이 속해 있던 사업부가 해체되면서 자신의 설자리가 막막해진 진은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안주로 나온 잔멸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처절한 눈빛이 자신과 닮아서였을까, 주머니에 넣어 온 잔멸치는 다음 날 인어가 되었다.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불안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아무것도 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딱 한 달만 병원 신세 질 정도로만 다쳤으면 하고 바라고 차라리 죽으면 출근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건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작고 무능하고 초라해서 아무도 자신을 바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은 한없이 진을 갉아먹었다. 누군가는 승진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은 느낌. 하다 못해 일도 잘 못한다는 생각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잔멸치들이 떼를 지어 있는 모습은 멋진 벨루가보다 빛나고 아름다웠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잔멸치 인어는 진과 같은 높이에서 머리를 빗겨 주었다. 화려함이나 소박함이 멋짐의 기준이 아니듯, 진이 자신만의 모습을 찾고 삶의 의지를 회복하였으면 좋겠다. 삶은 계속되니까.


네 번째 이야기는 이필원 작가의 <남극노인>이다. 처음엔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를 비튼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병약한 소년이 신기한 소녀를 만나고 죽어서 소녀를 순장해 달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따뜻한 존재와의 조우를 다뤘다고나 할까. 


밤하늘을 올려다 봤을 때 남극성을 찾을 수 있을까. 옛 이야기에 남극노인이 나타나면 그 시대는 태평성대하다고 했다. 또 남극성의 화신으로 사람의 수명을 다룬다고도 했다. 옥순이 할멈네 손자인 '나'는 곧 죽는다고 했다. 병약하여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했고, 맞벌이하는 부모는 '나'를 계속 볼 수 없어 잠시 할머니에게 가 있도록 했다. 그리고 '나'는 버림받았다는 생각과 곧 죽는다는 생각으로 삐뚤어진 아이였다. 할머니는 모든 병은 신이 준 것이라며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린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나에게 다가온 건 오래된 홍살문 아래에 있던 이상한 누나였다. 그 누나가 만져주자 메스껍던 속이 나아지고 열이 내렸다. 그리고 할머니가 귀한 손님이라고 반겨주었다. 가을, 겨울을 그 누나와 함께 보냈고 또래가 없던 '나'는 아마 많은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내내 태평하거라.... 마법 같은 주문은 따뜻했다. 세상이 모질어도 어딘가에서 동앗줄이 내려오는가 보다. 그러니 부디 남은 생은 행복하기를. 지금 이 세상에도 남극노인이 모습을 드러내주면 좋겠다.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남극성처럼.


다섯 번째 이야기는 박부용 작가의 <유령 열차>이다. 우리는 3차원에서 산다. 차원이 하나씩 더해지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고 더 많은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4차원만 해도 우리는 이해하지도 구현하지도 못한다. 흔히들 4차원의 축은 '시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4차원에서는 시간이동이 자유롭다고.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이지만 말이다. 


이 이야기는 어느 한 남자의 지식추구라기보다는 탐욕에 가까운 욕망이 불러 온 참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클락스빌'에 사는 아서는 자신의 실험을 위해 '나'를 불렀다. 부유한 저택에서 아서는 아내인 오렌시아와 살고 있었고, 나는 그 곳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며 아서의 이야기들을 들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서는 시장 선거에 출마했고, 네 번째 차원에 대한 연구가 지지부진함을 드러냈다. 나는 아서에게 4차원은 보통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던졌다. 아서는 흥미를 가졌고, 어쩌면 그 말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됐는지도 몰랐다. 시간은 어디서 왔고, 어디서 태어났는가.


오렌시아가 육교에서 사라진 날 이후, 아서는 자신의 연구가 성공했다고 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원하는 물품을 적어내라고 했다. 사람들이 적어 낸 물품은 그 사람들의 거실에 정확하게 '나타났고', 처음에 사람들은 불안해했다. 자신의 집이 침입당했다 생각했기에. 하지만 점점 사람들은 이 '유령열차'가 배송해 주는 시스템에 적응했고,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필요한 물품을 얻을 수 있어 편리하다 생각하게 되었다. 세금 역시 유령열차가 걷었고, 공장 역시 유령열차가 운영했다. 이제 마을에서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았고,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나'는 불안감에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어느 날 신문에서 '클락스빌'을 연상시키는 글을 읽고 말았다. 다시 돌아간 그곳은 처참했다. 보이지 않는 기차에 '치인' 사람들, 보이지 않는 기차가 '치고' 간 건물들... 시간축의 기원은 어디였을까. 그 처참함의 시작은 아서의 탐욕이었을지 몰라도, 끝은 살고자 몸부림치는 생명력이었을지도.


여섯 번째 이야기는 전견 작가의 <잠자는 종이 여왕의 궁전 아래에서>이다. <천일야화>에서 셰헤라자드는 죽지 않기 위해, 술탄을 정신차리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 장장 천 일하고도 하루 동안 이야기를 한 끝에 술탄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고,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쉴 새 없이 말하는 통에 아르바이트에서 잘린 '나'는 걷다가 우연히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들어갔다가 그 곳이 헌책방임을 알게 된다. 헌책방 주인은 '나'에게 헌책방에서의 규칙을 알려주고 사라졌다.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로 잠들어 있는 소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소녀는 자신이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꿈에서 깨어나게 되고 그러면 세상이 멸망한다 했다. '나'는 계속 이야기를 했고, 소녀는 잠꼬대로 이야기를 평가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재미없고 형편없는 이야기로 귀결되었고, 그런 평가를 들은 '나'는 내 이야기를 멈추고 책방에 있는 책을 집어들고 읽어주었다. 또 다른 일은 어떤 책무리에 물을 주는 일이었는데, 이틀에 한 번씩 주지 않으면 내 손목만 나뒹굴게 될 거란 말을 들었던 터라 '나'는 잊지않고 꼬박꼬박 물을 주었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 손님이 와서 책을 사 갔다. 물론 남편한테 줄 거라고 했다. 당연히 물을 줘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했다. 그 뒤에 남자 손님이 와서 아내한테 줄 거라고 책을 사 갔다. 남자도 당연히 물을 줘야한다는 말은 필요없다 했다. '나'는 두 손님 모두 다시는 보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막내 동생이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진짜 말이 많았던 녀석인데, 같은 이야기를 엄마한테 한 번, 아빠한테 한 번, 나한테 한 번, 작은 누나한테 한 번 하고 난 뒤 벽에도 하고 곰인형에게도 했다. 어찌나 말이 많은지 진짜 이렇게 말이 많아서 어쩌나 했는데, 지금 내 남편도 참 말이 많고, 여전히 내 동생도 말이 많다. 둘은 서로를 보고 저렇게 말이 많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했다. 


혀가 잘리지 않는 이상 말을 그칠 수 없는 광대처럼 '나'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고, 점점 지쳐갔다. 그동안 누구도 듣지 않아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었는데, 누군가가 계속 들으니 이야기가 고갈된 것이다. 정말로 소녀가 잠이 깨면 세상이 망할까봐 '나'는 열심이었다. 


헌책방에서의 알바는 꿈이었을까. 모두들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세상에서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그 세상이 꿈이 아니고서 무엇이겠는가.  


일곱 번째 이야기는 김선민 작가의 <장갑들>이다. 환경미화원들로 이루어진 비밀단체가 구두들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이다. '청소'가 제대로 된 직업으로 인정받은 건 언제부터일까. 옛날에는 집안 청소는 평민들은 스스로 했고, 양반들은 노비들을 부렸다. 현대에 와서도 집안일은 엄마가 했고, 작은 회사에서는 막내들이 했다. 좀 더 큰 회사에서는 청소용역을 고용하기도 했고. 점점 청소용역업체를 고용하는 일이 어색하지 않게 된 건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순자 씨는 건실한 남편을 무너진 백화점에서 잃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청소일을 시작했다. 성실한 그녀는 남자 화장실을 청소할 때 자신을 지우는 법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밀대 걸레 등 청소용구와 일체화 된 그녀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순자 씨는 마침내 '어머님'의 선택을 받았다.


두 번째 이야기였던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의 연대가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망한 나라의 평범한 백성이 '강시'가 되어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한 '신녀(창녀)'들과 음식점 주인이 연대하여 살인마나 착취하는 양놈들에게 대항하는 모습이 장갑들의 저항과 겹쳐졌다. 청소할 때 사용하는 장갑들이 사용자의 한과 억울함, 화를 빨아들였고, 선택받은 순자 씨는 그 장갑들을 정화했다. 구두들의 대장인 데스크는 시스템 속에 자리잡은 부조리와 착취를 강요했고, 장갑들은 저항했다. 부패와 분열은 어느 집단에서나 일어난다. 하지만 어디에나 희망은 있었다. 큰 일을 위해 작은 일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는 옳지 않았다. 부디 그들의 저항이 순탄하기를.


여덟 번째 이야기는 이나경 작가의 <다수파>이다. 확률은 얼마나 정확할까. 나의 선호도가 모두의 선호도를 대변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다수파는 옳을까. 수도 그룹이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모든 항목에서 다수파를 선택한 아빠 오상식은 신기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아버지를 담당한 사람은 최한기. 한기 아저씨와 아빠는 이 프로젝트의 대장인 그룹의 삼남이 후계 구도에서 탈락하면서 이 일을 잃게 되었다. 


아빠는 언제나 다수파였다. 아빠가 선택한 것이 곧 다수가 되었다. 아빠는 수학여행을 떠난 나에게 시킨대로 가만히 있어라고 했다. 결국 나는 돌아가지 못했다. 아빠는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반성 없는 참사는 비슷한 참사를 거듭해서 부른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참사들을 맞이할까. 정말 다수파가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이 다수파인 척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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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12-02 0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말해야 하다니 힘든 일이네요 본래 말이 많았다고 해도 그걸 일로 하면 힘들 것 같습니다 꼬마요정 님 동생분도 말이 많고 남편분도 말이 많군요 그래도 재미있다면 괜찮을 듯합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