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이야기 바벨의 도서관 28
레옹 블루아 지음, 김계영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바다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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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 보르헤스가 말했다. 레옹 블루아는 우주는 일종의 신성한 암호문이고, 그 안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의 단어, 문자 혹은 단순한 구두점이라고 생각했다고. 그의 상상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지옥에 있고, 모든 인간은 자신의 동료를 고문할 책임을 맡은 악마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단어, 문자, 구두점들이 모여서 이뤄진다. 그래서 개연성도 없고 선악의 심판도 없다. 우연이 남발하거나 초자연적인 어떤 힘에 묶이거나 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허브차>는 우연히 듣게 된 자신을 향한 범죄 이야기이다.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던 어머니가 허브차에 독을 타다니. < 그 집 늙은이>나 <최후의 소각>은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이야기이고, <순교자>는 어머니가 자식과 사위를 해치는 이야기이다. <하찮은 생각>은 아무리 봐도 너무 하찮다. 4명이 어떻게 한 몸이 될 수 있는가. <플뢰르 씨의 종교>는 씁쓸하다. 말 그대로 최고신을 '돈'으로 여기는 플뢰르 씨는 돈을 너무나 숭배하여 돈을 쓰지를 못한다. 그는 수백 가구를 도왔으나 정작 자신은 가난하고 죽은 뒤에는 구두쇠로 욕만 먹었다. <은빛 각막>은 볼 줄 아는 이가 죄인이 되는 세상이고,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살인자라는 직업이 실수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다!>는 좀 가슴 아팠다. 언뜻 근친상간이 비치기도 한다. <어느 치과 의사의 형벌>은 범죄로 이룬 행복이 예기치 않은 살인을 불러오는 이야기이다. <카인의 가장 아름다운 습득물>은 마치 옛날 영화 <텔 미 썸씽>이 생각나다고나 할까. 가장 흥미진진했던 이야기는 <롱쥐모의 포로들>이었는데, 카프카의 <성>이 생각났다. 끝내 도달하지 못한 성과 끝내 벗어나지 못한 롱쥐모... 


레옹 블루아는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검은 유머'를 가장 잘 구사하는 작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이야기들이 너무 단편적인데다 지금 현실이 더 검은 유머 같아서 말이다.


아쉽게도 <플뢰르 씨의 종교>와 <은빛 각막>은 표지 제목이 서로 바뀌어 있었고, 간혹 오타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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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조해진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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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비정전>을 떠올린다. 더운 열기와 습기를 가득 품은 녹색의 잎들이 바람에 흽쓸리면서도 자리를 지키던 장면과 영원히 기억될거라는 '1분'을 말하는 아비가 생각난다. 그렇게 여름은 물기 가득한 아비의 뒷모습까지 이어지며 지나가버린다.


보통 여름은 찬란하다. 모든 생명들이 활짝 피어나고 생기 넘치게 움직인다. 이상 기후로 평균 기온이 올라가고 폭염이 자주 찾아오기 전, 여름이라는 계절은 그야말로 놀고 즐기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여름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쏟아붓는 비와 시큼한 물비린내 같은 계절이다. 열차에서 얼른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기차칸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민과 수는 축축한 여름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민은 공인중개사사무소에서 일하는 보조원으로 매물 혹은 전세로 나온 물건(物件)을 둘러보며 그 안의 삶을 엿본다. 30분씩 다른 삶을 살아본다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 남의 옷을 걸쳐 어색하기만 한 그 모습을 보며 씁쓸했다. 민은 잃어버린 혹은 처음부터 알지 못한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망해버려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하게 된 어느 가구점을 알게 되고, 문 닫힌 그 가구점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수는 자신의 이름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목수인 아버지가 가구점을 열었고, 망했다. 아버지는 충격으로 얼굴 반쪽이 마비 된 채 침잠해있다. 경비일을 하기는 했으나 일주일만에 해고 되었다. 그 상태에서 엄마는 식당일을 하고, 수와 여동생은 온갖 알바를 닥치는대로 하며 대출금을 갚기 급급하지만 불어난 빚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수가 박선호란 이름을 도용하여 취직한 쇼핑센터에는 연주가 있었다. 연주는 자신만의 까페를 차리는 게 목표지만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민은 회계사다. 사실 난 그 사실에서 조금은 아쉬웠다. 민은 지금은 죄책감을 뒤집어 쓰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난도질 되어 결국에는 자신을 잃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겉은 괜찮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본연의 일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 선배의 사무실에서 같이 일할지 아닐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종우는 다르다. 종우는 아마 회계법인에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실패한 내부고발자이니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실패한 것만은 아닐지 몰라도 세월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짊어지게 했다. 사실 그 아픔은 저 위에서 사인 한 번으로 수많은 이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사람들의 몫이어야 하는데. 사람이 아닌 돈에 공감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민이 한 행동은 괜찮은 것이었을까? 사랑이라는 이유로, 곧 결혼할 사이라는 이유로 종우를 평가하고 판단해도 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만 또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감당할 수 없다면 바꾸려고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민은 다른 이들의 삶을 살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며 또 잊어버리고 싶어하며.


부모로부터 받은 가난은 끊어내기 어렵다. 예전에는 운 좋게 부모님이 왕족이어서 왕족이 되고, 운 나쁘게 부모님이 노예라서 노예가 되었다면 지금은 운 좋게 부잣집에서 태어나면 부자가 되기 쉽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죽어라 노력해야, 혹은 노력해도 부자가 되기 어렵다. 그렇게 연주나 수가 내리받은 가난은 노파의 오르골처럼 품에서 놓아버릴 수 없는 무엇이고, 드리워진 그물처럼 빠져나가기 어려운 무엇이다. 


그렇게 힘들고 지친 젊은 영혼들끼리 상처를 주고 치료 받으며 그렇게 삶을 살아간다. 아비는 영원히 기억될 1분을 우리에게 줬지만, 이들은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들을 살고 있었다. 축축하고 숨 쉬기 어려울만큼 습도 높은 여름이 지나가듯 그들의 삶에도 위안이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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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2-11-29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름은 종종 청춘으로 상징되는 이미지인 것 같아요. 가을이 중년, 겨울이 노년, 그럼 봄은? 청소년일까요?

삶의 고단함을 다룬 소설인가봐요. 우리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지탱하며 살아가야하지요. 꼬마요정님의 글을 읽으니 이 소설이 궁금해지네요. 보관함에 담아놓을게요.

꼬마요정 2022-11-29 21:14   좋아요 0 | URL
네 삶이 쉽지 않네요. 고단하긴 한데 그래도 그들은 젊으니 또 기회가 있겠죠? 그렇게 믿고 싶어집니다. 여름이 청춘인데 비가 와서ㅠㅠ 민에게 닥친 아픔은 그래도 자신의 선택이지만, 수와 연주는 아니라서 더 아팠어요.

책읽는나무 2022-11-29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조해진 작가와 김혜진 작가랑 한 번씩 헷갈리더군요. 이름이 비슷해서인지?
팟캐스트에서 조해진 작가의 목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차분하고 단아한 목소리였어요.
소설도 그런 느낌이려나? 생각 드네요^^

꼬마요정 2022-11-29 21:19   좋아요 1 | URL
팟캐스트도 했군요. 저는 조해진 작가 책 처음인데 잔잔한 것 같으면서도 무게가 있네요. 말씀처럼 차분한 것 같아요. 김혜진 작가는 단편 하나 본 것 같아요. 우리나라 작가들 너무 좋아요^^
 
드립백 콜롬비아 엑셀소 디카페인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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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껍데기가 마음에 든다. 귀여운 고양이들이 발랄하게 밝게 있어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본투리드 그림인 듯. 커피는 산미보다는 단맛이 좀 더 강하고 목으로 넘기고 나면 뭔가 말린 과일 같은 것이 입 안을 맴도는 것 같다. 디카페인이니 일반 커피 보다 몇 잔 더 마셔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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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랑 x 알라딘] 투명 북마크 -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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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는 언제 봐도 예쁘다. 읽고 있는 책은 왜 점점 많아지는지… 이 북마크도 자주 쓰려면 읽던 책 빨리 읽어야겠다. 나한테 책을 빨리 읽게 해 주는 기능이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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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28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투명해서 활자가 가려지지 않아서 좋은 것 같습니다
전 북마크 꼽아 놓은 채로 책장에 넣기에
항상 북마크가 부족 ㅎㅎㅎㅎ

꼬마요정 2022-11-29 14:59   좋아요 1 | URL
스콧님 북마크 많이 필요하시겠어요 ㅎㅎㅎ
제가 좋아하는 북마크는 이제 품절되어서 없거나 사은품으로 받은 것들도 있어서 늘 찾는답니다. 근데 북마크 욕심은 또 왤케 많은 걸까요ㅠㅠ 책이랑 북마크랑 막 사 모으는 나쁜 버릇... 언제쯤 고칠 수 있을까요?
 
[너듀나듀] 스티키메모 행성 -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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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공간이 있어서 간단한 메모가 편하다. 무엇보다 예쁘다. 그 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을 적을 때 뭔가 기분이 좋다. 도서관에서 빌릴 책 목록을 적어두고 폰 뒤쪽에 붙이기도 하는데 쓰임새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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