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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조해진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아비정전>을 떠올린다. 더운 열기와 습기를 가득 품은 녹색의 잎들이 바람에 흽쓸리면서도 자리를 지키던 장면과 영원히 기억될거라는 '1분'을 말하는 아비가 생각난다. 그렇게 여름은 물기 가득한 아비의 뒷모습까지 이어지며 지나가버린다.
보통 여름은 찬란하다. 모든 생명들이 활짝 피어나고 생기 넘치게 움직인다. 이상 기후로 평균 기온이 올라가고 폭염이 자주 찾아오기 전, 여름이라는 계절은 그야말로 놀고 즐기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여름은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쏟아붓는 비와 시큼한 물비린내 같은 계절이다. 열차에서 얼른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기차칸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민과 수는 축축한 여름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민은 공인중개사사무소에서 일하는 보조원으로 매물 혹은 전세로 나온 물건(物件)을 둘러보며 그 안의 삶을 엿본다. 30분씩 다른 삶을 살아본다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 남의 옷을 걸쳐 어색하기만 한 그 모습을 보며 씁쓸했다. 민은 잃어버린 혹은 처음부터 알지 못한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망해버려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하게 된 어느 가구점을 알게 되고, 문 닫힌 그 가구점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수는 자신의 이름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목수인 아버지가 가구점을 열었고, 망했다. 아버지는 충격으로 얼굴 반쪽이 마비 된 채 침잠해있다. 경비일을 하기는 했으나 일주일만에 해고 되었다. 그 상태에서 엄마는 식당일을 하고, 수와 여동생은 온갖 알바를 닥치는대로 하며 대출금을 갚기 급급하지만 불어난 빚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수가 박선호란 이름을 도용하여 취직한 쇼핑센터에는 연주가 있었다. 연주는 자신만의 까페를 차리는 게 목표지만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민은 회계사다. 사실 난 그 사실에서 조금은 아쉬웠다. 민은 지금은 죄책감을 뒤집어 쓰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난도질 되어 결국에는 자신을 잃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겉은 괜찮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본연의 일로 돌아갈 확률이 높다. 선배의 사무실에서 같이 일할지 아닐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종우는 다르다. 종우는 아마 회계법인에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실패한 내부고발자이니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실패한 것만은 아닐지 몰라도 세월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을 짊어지게 했다. 사실 그 아픔은 저 위에서 사인 한 번으로 수많은 이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사람들의 몫이어야 하는데. 사람이 아닌 돈에 공감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민이 한 행동은 괜찮은 것이었을까? 사랑이라는 이유로, 곧 결혼할 사이라는 이유로 종우를 평가하고 판단해도 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만 또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감당할 수 없다면 바꾸려고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민은 다른 이들의 삶을 살아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며 또 잊어버리고 싶어하며.
부모로부터 받은 가난은 끊어내기 어렵다. 예전에는 운 좋게 부모님이 왕족이어서 왕족이 되고, 운 나쁘게 부모님이 노예라서 노예가 되었다면 지금은 운 좋게 부잣집에서 태어나면 부자가 되기 쉽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죽어라 노력해야, 혹은 노력해도 부자가 되기 어렵다. 그렇게 연주나 수가 내리받은 가난은 노파의 오르골처럼 품에서 놓아버릴 수 없는 무엇이고, 드리워진 그물처럼 빠져나가기 어려운 무엇이다.
그렇게 힘들고 지친 젊은 영혼들끼리 상처를 주고 치료 받으며 그렇게 삶을 살아간다. 아비는 영원히 기억될 1분을 우리에게 줬지만, 이들은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들을 살고 있었다. 축축하고 숨 쉬기 어려울만큼 습도 높은 여름이 지나가듯 그들의 삶에도 위안이 찾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