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네 단계





관심의 계단


만약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어깨 위에 소리없이 내려앉는

한 점 먼지에게까지도 지대한 관심을 부여하라.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하찮은 요소까지도 지대한 관심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의 계단으로 오르는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해의 계단


이해의 나무에는 사랑의 열매가 열리고, 오해의 잡초에는 증오의 가시가 돋는다

.

.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결함도 내면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아름답게 해석될 수 있는 법이다. 걸레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외형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비천하기 그지없지만, 내면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숭고하기 그지없다.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 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기 위해 자신의 살을

헐어야 한다. 이해란 그대 자신이 걸레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존중의 계단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대가 간직하고 있는 사랑이

깊어지지 않고, 그대가 간직하고 있는 사랑이 깊어지지 않으면 그대가

소망하고 있는 행복은 영속되지 않는다.










헌신의 계단


신이 인간을 빈손으로 이 세상에 내려보낸 이유는, 누구나 사랑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신이 인간을 빈손으로 저 세상에 데려가는 이유는, 한평생 얻어낸

그 많은 것들 중 천국으로 가지고 갈 만한 것도 오직 사랑밖에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신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빛을 만드신 이유는,

그대로 하여금 세상만물이 서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게 하여

마침내 가슴에 아름다운 사랑이 넘치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글 ; 이외수

그림 ; 한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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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Maverick 22에게-철학책 읽기에 관해 2

 

3) 자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측면, 사실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측면이 남았는데,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는다는 것은 그 책에 나오는 단어들을 세심하게 따져가면서 읽는다는 걸 뜻하지. 여기에서 나는 개념이나 범주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단어라고 말했는데, 그건 개념이나 범주로 환원될 수 없는 단어에 고유한 물질성(따라서 비순수한 역사성) 같은 게 있기 때문이지. 


우리 수업과 관련된 예를 하나 들자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에서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지.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représent.”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마지막 단어 “représent” 또는 그것의 동사원형인 “représenter”를 “표상한다”라든가 “표상하다”로 번역해서 사용하지. 그런데, 수업 시간에도 말했듯이, 이 단어를 이렇게 “표상한다”나 “표상하다”로 번역하게 되면, 이 단어가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정의에 사용된 이유, 또 이 단어가 이데올로기 개념의 정의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지. “représent”을 “표상한다”로 번역하게 되면, 이데올로기는 기껏해야 인식론적 측면에 따라 이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렇게 되면 이데올로기가 “상상적 관계를 표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지. 사람들은 여기에서 엉뚱하게 비약해서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으로 인식론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고, 그에게 이데올로기는 과학의 대립물이기 때문에, 알튀세르는 과학주의자다라는 멋진(?)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내곤 하지. 이런 생각은 실제로 상당히 널리 퍼져 있는데,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알라딘 서평 중 하나에서도 이런 생각을 볼 수 있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논문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유명한 호명 테제를 들 수 있지.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지. “Idéologie interpelle les individus en sujets.” 이 문장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끝에서 두 번째 단어인 “en”이지. 이 단어는 다른 나라 말, 가령 영어에는 그에 해당하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불어에 고유한 어휘지. 그래서 영어 번역자나 주석가/비판가들이 이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지. 하나는 “as”로 번역하는 것이고([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의 영역본에는 바로 이렇게 번역되어 있지), 다른 하나는 “into”로 번역하는 거야(몇몇 주석가들이 이 번역을 택하지). 전자의 경우라면 이 테제는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서 호명한다”고 번역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라면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번역될 수 있지.


그런데 이 두 가지 번역 각각의 경우에 원래의 테제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달라지게 되지. 전자처럼 “주체로서” 호명한다고 번역하게 되면, 이것은 이미 이데올로기 이전에 주체를 주체로 구성하는 어떤 담론 또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왜냐하면 이 경우 이데올로기가 수행하는 기능은 이미 구성되어 있는 주체 내지는 주체의 기능을 개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 되므로, 이 때의 주체로서의 주체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영역, 다른 담론 또는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 벌써 구성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 


반대로 후자처럼 “into”로 번역하는 경우에는, 바로 이데올로기 자신이 개인들을 주체로 구성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함축하지.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 두 번째 번역이 이데올로기의 고유한 기능을 해명하는 데 좀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런 번역이 과연 전적으로 충실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  


어쨌든 “en”의 사례는 얼핏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단어가 개념의 이해에 어떤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지. 물론 (지젝을 포함한) 대부분의 알튀세르 주석가/비판가들(특히 국내의 ‘논평자들’)은 이런 차원의 문제가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지. 가령 우리가 이런저런 철학책들, 특히 유럽철학 관련 책들을 읽다보면 흔히 접하게 되는 것이 “주관성의 형이상학”이나 “자기의식의 철학”이라는 표현이지. 전자는 하이데거에서 유래하고 후자는 헤겔에서 유래하는 표현인데, 지금은 거의 관용적인 용법이 되었지. 그런데 헤겔과 하이데거는 이처럼 “자기의식의 철학”이나 “주관성의 형이상학”은 근대철학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간주하고 있고, 또 이러한 근대철학의 특성을 창시한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라고 말하지.


그런데 우리가 데카르트의 저작을 실제로 읽어보면(사실 데카르트의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지. 읽더라도 (가벼운) 소설책 읽듯이 하거나), 위와 같은 표현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저작에는 그런 표현에 부응할 수 있는 개념 또는 단어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다시 말해 데카르트의 저작에는 “콘스키엔치아conscientia”, 곧 우리가 흔히 쓰는 “의식”이라는 단어가 거의 나오지 않고(한 차례를 제외하면), 또 “수브옉툼subjectum”이라는 단어, 곧 우리가 쓰는 “주체/주관”이라는 단어도 별로 사용되고 있지 않고, 그 의미도 근대적인 “주체/주관”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고대와 중세철학의 용법에 따라 사용되고 있지.


그러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지. 데카르트는 실제로는 “의식”이나 “자기의식”, 또는 “주체”라는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왜 데카르트가 “자기의식의 철학자”고 “주관성의 형이상학자”지? 이 질문은 얼핏 보기에 매우 유치하고 사소한 질문 같지만, 어떻게 다루어나가느냐에 따라 지금까지 근대철학을 바라보는 관점과는 매우 상이한 관점을 낳을 수 있는 질문이지. 실제로 발리바르 같은 사람은 지난 1980년대 중반부터 이런 질문을 탐구해서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관점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해오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의식” 개념은 데카르트가 아니라 (랄프 커드워스와) 로크가 발명한 개념이고, 근대의 “주체” 개념은 칸트의 창안물이라는 점을 엄밀한 문헌학적 고증과 철학적 논증을 통해 밝혀내지. 아직도 탐구가 진행 중에 있지만, 이건 참 근대철학 전반을 새롭게 고찰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결론이지.

 

이제 그만 이 글의 결론을 내릴 때가 됐군. 어쨌든 나는 독자들이 이런 의문을 독자적으로 제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독자적인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고, 적절한 훈련을 거친다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해. 또 독자들이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철학책이 좋은 책이고, 또 학생들에게 그런 걸 가르쳐주는 선생이 좋은 선생이지.


그런데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으려면, (1)과 (2) 같은 측면을 잘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3)과 같이 텍스트에 나오는 단어들에 주목하는 것도 꼭 필요하지. 철학책, 철학 텍스트는 의미론적으로 잘 정의되고 규정된 개념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이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사용하는 숱한 단어들로도 이루어져 있는데, 이 단어들은 앞의 “en”이라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개념들의 차원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철학자의 논변의 숨은 차원(푸코라면 “비사고”라고 하겠고, 정신분석가들이라면 “무의식”이라고 하겠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지.


더 나아가 우리가 개념에서 단어들의 차원으로 내려오게 되면, 철학 텍스트가 지닌 또다른 탐구의 층위를 발견하게 되지. 곧 개념들이나 논변의 의미론적 질서에 가려서 드러나지 않는 통사론적이거나 화용론적 차원, 또는 수사학적 차원이 바로 그것이지. 가령 우리가 스피노자의 󰡔윤리학󰡕 같은 책을 읽을 때는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논변들을 분석하고, 개념들의 의미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스피노자가 별 의미없이 사용하는 듯이 보이는 단어들의 빈도와 용법(가령 1부 속성에 대한 정의에 나오는 “구성하다constituo”라는 단어가 󰡔윤리학󰡕 전체에, 또 각각의 부에서 몇 번이나 사용되고 있고, 그 용법들은 어떤 것인지)을 살펴보면, 실체와 속성의 관계를 비롯한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문제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헉,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좀 어려운 문제에까지 도달했는데, 어쨌든 결론은 다음과 같은 거야.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으려면 논변에 주의해야 하고 맥락에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꼼꼼하고 창의적으로 책을 읽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단어들의 차원, 기록/글쓰기의 차원에까지 내려가서 책을 읽어야 한다. 너무 어렵다고?? 이 모든 걸 한꺼번에 다하려고 하니까 어렵겠지. 또 철학책에 있는 ‘모든 논변, 모든 맥락, 모든 단어들을 일일이 까발려야 하는 건가?’하고 생각하니까 어렵게 느껴지겠지. 그러지 말고 이 책에 나와 있는 하나의 논변이라도 한번 재구성해서 검토해보자, 이 개념, 이 논변의 맥락이라도 한번 살펴볼까? 또 이 단어가 궁금한데, 한번 검토해볼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어보라구. 실제로 이런 식으로 책을 한번 읽어본다면, 지금까지 읽었던 것과 새로운 차원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테니까.  


어쨌든 나는 이 세 번째 항목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좀 했다구. 중요하긴 중요하지만, 이건 사실 번역본(국역본이든 외국어 번역본이든)을 읽는 독자들로서는 실행하기가 좀 힘든 것이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뭐 내가 이런 걸 잘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다만 이런 측면이 중요하다, 그러니 이런 측면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 정도지. 어쨌든 나중에라도 더 공부를 하게 되면, 이런 점들에 유념하면서 책을 읽으면 책을 좀더 꼼꼼히 읽을 수 있을 거야.


매버릭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걸로 대신할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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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Maverick 22에게-철학책 읽기에 관해 1

 

Maverick 22의 질문


<선생님, 철학책을 꼼꼼히 읽는다는 것이 어떻게 읽는 것인지 궁금해요;;

저는 자꾸 읽다가보면 앞에 내용까먹고, 행간도 잘 못 읽고 해서 걱정인데ㅜ.ㅜ>

 


balmas의 답변


앗, 어려운 질문이네 ... (삐질삐질)


그냥 지나가다 한 마디 던졌을 뿐인데 ... (무슨 TV 광고 문구 같다 ... -_-;;;)


ㅎㅎㅎ 철학책을 이렇게저렇게 읽어라라고 말하는 건 좀 주제넘은 일이기는 한데, 그래도 한두 마디 조언을 해주자면,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철학책을 꼼꼼히 읽는다는 건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지.



1)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기란 일차적으로 그 책에서 전개되는 논변을 꼼꼼하게 따져 본다는 걸 뜻할 수 있지. 다른 책들과 구분되는 철학책의 고유한 특성은 아무래도 논변 중심의 책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거야. 사실 철학이야 사실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 아니고 무언가를 예측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는 학문도 아니고, 타당한 논리적 형식을 갖추어서 자신의 주장의 타당성, 정합성 또는 객관성을 보여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학문이니까, 이렇게 논변을 중심으로 하는 건 당연하지. 그래서 객관적인 타당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진리주장은 계급적 이해관계나 권력관계 등을 포함하기 마련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론조차도 그런 주장을 위해서는 이런 형식의 논변을 포기할 수 없지(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버마스 같은 사람들에 동조할 수밖에는 없다는 얘기는 아니지. 그의 주장을 넘어서는, 또는 적어도 그의 주장과 다른 주장을 제시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거든).

  

  따라서 철학책을 꼼꼼하게 읽는다는 건 그 책에서 제시되는 주장과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거들, 예증들, 또 이를 위해 다른 이론들, 주장들에 대해 제기하는 반론들을 꼼꼼하게 따져본다는 걸 뜻하지. 그리고 좋은 철학책, 좋은 철학논문, 좋은 철학적 글일수록 이런 것들이 밀도 있고 참신하게 제시되기 마련이지.


우리 수업과 관련해서 본다면, 알튀세르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주장하는 테제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논거들이 무엇인지, 또 다른 이론들에 대해 제기하는 반론이 무엇인지 따져보면서 책이나 글을 읽으면, 그의 주장, 그의 논의를 좀더 꼼꼼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또 지젝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지젝은 좀 독특한 논변 방식을 구사하긴 하지만, 그의 책이나 글에도 역시 나름대로의 주장과 논변, 예증, 반론들이 담겨 있으니까, 그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책을 읽어보면,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알튀세르에 대해 지젝이 어떤 반론들을 제시하고 있고, 또 그의 반론들에 대해 알튀세르의 관점에서 제시할 수 있는 재반론은 어떤 게 있을까? ㅎㅎㅎ 그런 걸 생각해보라구. ^o^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사실 철학책이 논변 중심으로 되어 있지만, 그 방식은 철학자들마다, 또는 철학책들마다 상당히 다르지. 그리고 좋은 철학자들일수록 독창적이고 고유한 자신의 논변 방식을 갖고 있지. 예컨대 플라톤의 대화편들이나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 데카르트의 󰡔성찰󰡕에서 볼 수 있는 내면적인 사유 흐름의 탐구,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관통하는 ‘기하학적’ 논변 방식, 또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 같은 책에서 볼 수 있는 담담하고 건조한 분류와 서술 등등. 철학자들의 문체, 스타일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이런 의미에서지. 지나친 비유들의 남발이나 멋부리는 수식어들을 나열하는 것, 또는 주관적인 감정의 토로들로 점철된 글을 훌륭한 문체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적어도 철학자의 문체, 스타일은 그런 것과는 다르지.


이렇게 좋은 철학자들일수록 논변의 내용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논변 스타일도 빼어나기 마련인데, 때로는 그 철학자의 논변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변의 스타일을 이해하는 게 본질적인 조건이 되는 경우가 있지. 데카르트의 󰡔성찰󰡕이나 스피노자의 󰡔윤리학󰡕 같은 고전은 물론 그렇거니와, 우리의 수업과 관련된 예를 들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 논문이 그렇지. 이 논문, 특히 “이데올로기에 대하여”라는 절에 나오는 고유한 논변 방식을 감안하지 못할 경우 알튀세르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지. 그 때문에 지젝을 포함한 많은 주석가들/비판가들이 엉뚱한 오해에 빠지기도 하지.


그래서 때로는 철학자의 주장이나 논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의 논변 내용만이 아니라 논변 방식, 논변 스타일을 잘 이해하는 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지.  

   

2) 그 다음 꼼꼼하게 읽기의 두 번째 의미는, 맥락 속에서 읽기를 의미하지. 이건 다른 학문에 비해 철학책 읽기에 더 많이 요구되는 사항이기도 해. 왜냐하면 다른 학문들과 구분되는 철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반복, 되풀이에 있거든. 다시 말해 철학에서 이전의 철학들과 절대적으로 단절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지. 철학사에서 볼 때 항상 시대마다 새로운 이론, 새로운 문제설정, 또는 (푸코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에피스테메가 끊임없이 출현하지만, 이러한 새로움은 항상 철학사 전통의 되풀이를 전제하는 새로움이지.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좋다면, 철학에서 무언가 새로운 주장을 제시한다는 것은, 철학사의 전통과 새로운 관계맺음의 방식들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이 때문에 철학, 철학적 사고는 다른 학문들에 비해 자신의 역사, 곧 철학의 경우는 철학사에 대한 연구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지.


가령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는 철학일수록[이런 새로움에 대한 주장은 어떻게 보면 근대철학, 특히 헤겔 이후의 철학에 고유한 특징이지. 헤겔이 자신의 철학에 이르러 철학이 완결되었다고 주장한 만큼, 정말 새로운(그만큼 종말론적인) 주장을 제시한 만큼, 그의 후배 철학자들은 더욱 더 새로운(따라서 더욱 더 종말론적인) 주장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겠지? 이런 새로움에 대한 주장에 담겨 있는 고유한 이데올로기는 한번 연구해 볼 만한 주제지] 과거의 철학에 대해 격렬하고 단호하게 단절의 선을 긋기 마련이지. 또는 좀더 교묘한 경우라면 과거의 철학을 자신의 철학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경우든지 간에 새로운 철학은 과거의 철학과 관련을 맺게 되고, 자신의 새로움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철학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한계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게 되지. 더욱이 철학이 언어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데리다의 의미에서) 기록écriture을 전제하고 그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철학이 주장하는 새로움은 실은 항상 이미 되풀이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 


그래서 철학책을 꼼꼼히 읽기 위해서는 이 철학자의, 이 주장이 어떤 맥락 속에서 제시된 것인지, 어떤 흐름과 결부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이건 다시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지.


첫째, 맥락 속에서 읽는다는 건 그 철학자의 저술의 맥락을 검토한다는 걸 뜻하지. 대개의 철학자들이 여러 편의 저작들과 논문들, 또는 글들을 남기고 있고, 또 대개의 경우 처음에 저술된 글이나 책과 나중에 저술된 것들 사이에는 연속성만큼이나 불연속성도 존재하기 마련이지. 그래서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청년 마르크스와 장년 마르크스의 단절과 연속성의 문제가 제기되고, 하이데거의 경우에도 소위 사상의 전회(Kehre)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많이 논의되곤 하지. 알튀세르나 라캉 또는 지젝의 경우도 그렇고.


어떤 철학자의 주장이나 논변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런 전후 맥락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이지. 그의 주장이나 논변이 공백 상태에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이론적 소여(所與)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차이, 다름에 대한 이해는 그 주장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많은 것을 밝혀주기 때문이야. 따라서 지금 읽고 있는 이 철학자의 이 책의 논의가 어떻게 해서 제시된 것인지, 이 논의의 배경이나 전제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는 것은 단순히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논의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


둘째,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읽는 어떤 철학자의 책은 좀더 큰 맥락 속에 들어 있게 마련이지. 또 철학의 논의가 철학사의 반복과 분리될 수 없다면, 이 철학자의 책은 그것이 몸담고 있는 좀더 광범한 철학사의 맥락을 어떤 식으로든 되풀이하게 마련이지. 따라서 우리가 그 맥락을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구분하든,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구분하든, 현상학과 분석철학으로 구분하든,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로 구분하든 간에, 어떤 철학자의 책을 좀더 정확하게, 꼼꼼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철학자의 책을 철학사의 맥락에 포함시켜서 이해하는 게 필요하지.


그리고 사실 대개의 철학적 논변에는 다른 철학자, 특히 철학사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논의가 들어 있기 마련이야. 가령 알튀세르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을 논의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물론이거니와 프로이트나 라캉, 파스칼, 스피노자 같은 사람의 논의에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준거하고 있지. 마찬가지로 지젝 역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기 위해 마르크스나 프로이트, 라캉은 물론이거니와 헤겔, 카프카,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들에 준거하고 있지. 그래서 알튀세르의 논의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튀세르가 준거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논의되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특징을 이해하는 게 필요하고, 이를 쇄신하기 위해 알튀세르가 활용하고 있는, 프로이트에서 라캉에 이르는 정신분석의 흐름, 더 나아가 그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던 당대의 프랑스 철학과 정치의 맥락(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대립 등)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겠지.


또 더 나아가 가능하다면 파스칼 철학의 특징 같은 것도 이해해둔다면 도움이 되겠지. 사실 이 점은 알튀세르와 지젝의 이론적 차이점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쟁점 중 하나지. 두 사람 모두 파스칼의 논의에 준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파스칼을 이해하고, 또 활용하는 방식에는 재미있는 차이점이 있거든. ^_^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져버렸는데, 어쨌든 중요한 건, 어떤 철학자의 책이나 글에 대한 이해의 문제는 그 책이나 글에서 전개되는 논변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항상 맥락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 대한 이해는 그 철학책이나 글을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 이 점을 이해하면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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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즈마리 > [스크랩] 성매매, 생존권 투쟁?

[한계레] (2004. 10.)

성매매, 생존권 투쟁?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은 (‘창녀’가 아니라) 포주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나쁜 남자〉는, 남성의 분노와 ‘사랑’(폭력)은 모든 여성을 ‘매춘’여성으로 만들 수 있는 권력임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주장을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남녀 주인공이 트럭을 타고 다니며 성매매를 한다. ‘일’은 여성이 하는데, ‘손님’은 남자에게 돈을 치른다. ‘원조 교제’(청소녀 성매수)부터 기지촌 성산업에 이르기까지, 성매매의 형태는 너무나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따라서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의 성산업에서 여성은 몸을 파는 것이 아니라 팔리는 상품이다. 성산업이 왜 ‘여자 장사’라고 불리겠는가?


성매매는 도덕이나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집요한 남성 중심 정치권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사안이다. 만일, 여성의 성이 판매된 시간과 그 수치만큼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몸을 판다면, ‘매춘’이 가난과 상관없이 백인 중산층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도 ‘자유로이 선택’하는 직업이라면, 연쇄 살인사건의 주된 희생자들이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아니라면, (성을 파는 여성이 아니라) 성을 사는 남성을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런 존재로 규정한다면…. 이런 상황 이후에야, 성매매는 성별 권력 관계와 관련 없는 문제가 된다. 그전까지, 성매매의 본질은 성 상품화도 아니고, 성 보수주의와 성 자유주의의 대립도 아니다. 성매매는 가장 일상화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일 뿐이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업주와 여성들의 ‘생존권’ 데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특히, 남성들의 질문은 이 법을 지지하는 나의 정치적 입장이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성매매가 ‘직업’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여성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것과 (남성은 그렇지 않지만) 여성에게 성 판매는 사회적 노동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성매매의 폐해는 매매 행위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본인의 선택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인간의 선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부여한 적이 없다. 그리고 언제부터 한국 사회가 그토록 여성의 생계에 관심이 많았는지 묻고 싶다. 여성의 노동권 보장을 바란다면, 성매매를 허용할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의 성차별 근절 노력이 훨씬 효과적인 대책이다.

성매매 반대가 그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매매 제도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종사하는 여성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모든 여성들과 모든 남성들의 삶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성매매와 성폭력이 불가피하다는 편견은, 남성의 성은 억제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근거한다. 남성의 성이 인간의 성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와 인격은 신체로 환원되고, 여성의 외모와 성은 ‘자원’이 된다. 이런 사회는 여성의 지식과 기술보다는, 여성의 몸을 원한다. 이때 여성의 가치는 몸의 상태(‘젊고, 예쁘고, 마른’)에 의해 정해지게 된다. 남성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자원이자 여성 억압의 근원이다.


“18살에서 30살까지 성인 남성들이 무려 12년 동안이나 성관계를 가질 기회가 없어졌다”고 말한 한나라당 김충환 의원은, 성을 사는 것이 마치 일상적 성생활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이 발언은 범법 행위일 뿐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모든 남성을 매춘(買春)남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성매매 근절이 어려운 이유는,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과 업주들의 ‘생존권’ 때문이 아니라, 남성의 성욕은 통제 불가능하다는 오래된 그리고 너무나 강력한 신념 때문이다. 남성의 성이 강력하다는 통념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다. 여성의 성을 사는 것은 남성의 권리가 아니라 남성의 자기 소외, 자기 분열이다. 성매매 근절은 남성의 인간화를 향한 남성의 과제이기도 하다.

정희진 서강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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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즈마리 > '피해자다움'이라는 성역할

'피해자다움'이라는 성역할

글. 정희진(<a href="mailto:out67@chol.com">out67@chol.com</a>) / 여성학 강사, 처녀자리


이중 메시지 속에 살아남기

오랜 기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이혼하려는 여성들이 법정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왜 갑자기 이혼하려고 하는가(남자가 생겼나?)”이다. 하지만, 남편의 초기 폭력을 문제 삼아도, “참을성이 없다”고 비난받기는 마찬가지다. 흉기를 들이대는 강간범을 만났을 때, 소리쳐야 할까? 빌어야 할까? 잘못 소리쳤다가는 죽을 수도 있고, 잘못 빌었다가는 “너도 즐겼지”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피임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피임 준비를 잘하는 여성은 ‘선수’, ‘걸레’ 취급 받기 쉽고, 피임을 못해 임신하면 남자에게 부담 주는 ‘칠칠치 못한 여자’가 된다. 성차별에 저항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로 찍히고, 가만있으면, “여성들이 의식이 없어서 문제다”, “딸들아 깨어나라”며 계몽이 덜 된 인간으로 본다(‘깨어나야’ 할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남성 언어 안에서는, 여성의 저항과 순종 모두 남성 폭력과 성차별의 ‘원인’이 된다.


경찰서나 법정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의 분노나 강한 감정 표현은 과장으로 의심받고, 침착하고자 애쓰면 피해자답지 못한 인상으로 해석된다. 제주도 도지사 성추행 사건의 피해 여성은 ‘너무 똑똑한’ 것이 문제 해결 과정 내내 비난의 구실이 되었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녀는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여자가 어떻게 녹음기를 사용할 수 있나, 누구의 사주를 받았나” 따위의 질문을 받았다. 남성의 구미에 맞는 ‘적절한’ 피해자의 태도는 어떤 포즈일까?

 

피해의식은 남성의 전유물

남성은 여성이 성적 주체이기를 바라지 않지만, 동시에 바란다. 가부장제 유사 이래 여성은 언제나 성적 주체였다. ‘성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는’ 남성 젠더 시스템에서, 여자는 남자의 인생을 망치는 존재다. 스릴러 영화의 공식, 남자 주인공을 시험에 들게 하는 팜므 파탈(femme fatale), 요부(妖婦)는 남성의 모순을 여성에게 투사한다. 팜므 파탈은, 남성의 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가 결코 남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다. 남성의 성욕은 무한대라서 어디로 ‘분출’할지 모르지만, 성욕 폭발의 버튼을 누른 사람은 남자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라는 것이다. 이 때 남성은,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들이 합창하듯, 유혹자 여성의 ‘피해자'가 된다.


원래 피해의식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정치의식으로서 여성의 피해 의식은 근대 이후 여성주의 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아주 최근의 현상이지만, 남성의 ‘피해의식’은 수 천 년 전 가부장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여성의 피해의식이 피해자로서의 사회구조적 의식이라면, 남성의 ‘피해의식’은 가해자의 정신 분열, 프로이드식으로 말한다면, 죄의 투사이다. 백인의 피해의식, 자본가의 피해의식, 미국의 피해의식을 보라. 피해의 의미와 내용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의 유동에 따라 구성된다.


여성들은 지금 수천 년 동안 ‘여자라서’ 당연히 해왔던 노동을 거부하고, 너무도 오랫동안 당해왔던 여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고 있다. 폭력을 당하는 것. 폭력에 순종하는 것. 맞으면서, 강간당하면서 가해자의 앞날을 걱정하고 보살피는 것.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여성의 성역할이었다. 동성애자 인권 담론의 가시화에 따른 이성애자들의 분노와 혼란처럼, ‘권리를 침해당한’ 남성들의 ‘피해의식’은 당연한 것이다.

 

여성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여성에게 섹스나 모성은 자원이자 억압이다. 남성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작동 기제이다. 여성에게 섹스가 자원(‘꽃뱀’?)이기도 하기 때문에, 억압(성폭력 피해자?)이 아닌 것이 아니라,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실이 바로 성폭력의 원인이다. 남성에게는 모순이지만, 여성에게는 연속선이다. 여성에게 섹스가 자원이자 억압이라는 사실은, 성매매와 성폭력이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섹스의 주체는 오로지 남성이라는 의미이다.


주체와 피해자의 이분법,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의 성별화(gendered)는, 남성 주체의 이해(利害)와 환상 속에서 구성된 ‘침묵하는 피해 여성’이라는 관념을 낳았다. 이분법에서 각각의 범주는 겹칠 수 없는 상호 배타적 것으로 설정된다. 주체 아니면 피해자다. 그래서 여성이 행위자, 주체이면서 동시에 피해를 당한다는 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피해는 곧 피해자화로 연결된다. 피해는 타자화를 동반하지 않지만, 피해자화는 타자화를 전제한다. 피해 여성은 남성주체의 욕망에 의해 규정된다. 남성의 입장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더럽혀진 여자거나 ‘기껏해야’ 무기력한 희생자지, 젠더 계급투쟁의 생존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남성의 시각이 곧 사회의 시각이 된다. 특히,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피해자화는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 진부하면서도 세련된, 가장 오래된 타자화 방식이었다.


피해자화는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젠더 사회에서 남자들은 성공을, 여성들은 불행을 ‘경쟁’하는 이유이고, 여성들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상담을 청한 어떤 성폭력 피해 여성은, 칼을 들고 덤비는 성폭력 가해자를 설득하여 임신과 성병 예방을 위해 콘돔을 사용하게 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칭찬했지만, 그녀에게 고소를 적극적으로 권할 수는 없었다. 가부장제 사회의 피해자 각본에서, 이 여성의 뛰어난 행위성과 협상력은 “섹스(강간) 동의”를 의미한다. 남성만이 성의 주체라는 인식에서는, 성폭력에 저항하는 여성은 무성적(asexual)이거나 문란한 여성으로 해석된다. 여성은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있어야만 피해가 인정되고, 피해자로서 ‘권력’을 부여받게 된다.

 

아버지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수기? - 남성 언어로 말하기의 고통

전 세계에서 유래 없이 ‘빠르고 쉽게’ 제정되었던 한국의 성폭력 법제화는, 여성의 고통을 남성의 언어로 재현하는 것의 한계와 남성의 ‘피해의식’이라는 역효과(backlash)의 위력을 확인시켰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성폭력만큼 인식론에서, 방법에서, 관계에서 논쟁적인 이슈도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인식론도 여성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한다.


성폭력 문제는 “여성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 “남성의 언어”, “여성의 관계성과 남성과의 사랑-상처-고통-착취 당함의 공통점과 차이” 가 도대체 무엇인지, 여성주의를 포함하여 기존의 모든 담론과 인식 체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거의 모든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은 논쟁이 폭발, 내연(內燃)하는 장소이다. 성폭력 사건이 가시화되기만 하면,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격렬한 논란에 휩싸인다. 또한 성폭력의 법제화는, 국가의 가부장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상담소 운영 등을 통해 국가 정책의 하부 집행자가 된 여성운동 단체의 이중 역할 속에서, 여성운동의 정체성과 진로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학생이든, 노동자이든, 공무원이든 남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예방 교육에 강의를 가면, 일단, 그들은 자신이 교육 대상, 잠재적 가해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못견뎌한다. 어느 집단을 가든 남성들은 똑같은 문제제기를 한다. “성폭력 당하는 남성도 많다”, “여성부는 있지만, 남성부는 없다”, “여성 상위가 지나치다. 페미니즘은 여존남비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여당의 ‘친일 과거사 청산’ 주장에 야당이 ‘친북 과거사 청산’으로 대응하는 것과 같은, ‘남자도 성폭력 당한다’ 는 주장은, 여성주의가 기존의 보편성, 객관성, 평등 개념을 해체, 재구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성폭력, 아니 모든 폭력 사건 해결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남성들은 ‘가해자 인권론’으로 맞서고 있다.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여성의 권리 주장,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다. 자유주의 철학은 평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인 동시에 걸림돌인 것이다.


현재 反성폭력 여성운동은 (기존의 언어에서 본다면) 여러 가지 모순에 직면해있다. 성적 자기결정권 주장과 여성은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다는 주장을 동시에 해야 하고, 성폭력은 섹스가 아니라 폭력인데 동시에 그것은 성적인 폭력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죽어도 잊어지지 않는 죽음과 같은” 성폭력의 극심한 피해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피해 여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주장해야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와 젠더 범주의 딜레마

모든 여성은 여성이지만 동시에 여성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 성폭력 반대운동의 결정적인 딜레마는, “여성이기 때문에 성폭력 당한다”는 젠더 범주가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지만, 실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인식론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가부장제에 저항하기 위해 여성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여성을 성별 정체성으로 환원시켜 모든 여성을 동질적인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가부장제 프로젝트에 기능적이다. 성폭력 발생 원인은 물론, 이후 투쟁은, 피해 여성의 사회의식, 자원, 장애 여부, 인종, 사회적 관계망, 학력, 계급, 외모, 나이, 건강 상태, 비혼 여부, 지역 등등의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성폭력의 원인 그리고 젠더 자체가 젠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젠더 인식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여성의 불행이 젠더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피해자 중심주의’나 ‘성폭력 개념 확장론’은 여성들의 차이를 젠더로 환원한다. 여성주의는, 이제까지의 객관성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경험이 객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기존의 객관성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객관성을 상대화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이란 권력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며, 권력 관계에 따라 유동한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마치 모든 피해여성이 동일한 경험을 하며, 피해자의 경험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것 같은 오해를 준다.


같은 성폭력도 여성들은 다른 방식으로 억압받고 다른 강도로 피해를 느낀다. 어떤 여성은 포르노를 보고 성욕을 느끼지만, 어떤 여성은 불쾌할 수 있다. 젠더 범주는 여성을 개인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묶는다. 이때 포르노를 불쾌하기 느낀 여성의 경험은 의미화 되기 어렵다. 남성 사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다는 여성도 있는데, 지나치게 예민한 거 아니냐?” 여성이 느낀 것이 아니라 개인이 느낀 성폭력이 성폭력 피해의 의미를 구성해야 한다. 성폭력 피해 인식의 근거를 젠더가 아닌 여성 개인의 몸에서 찾고, 법 담론 중심의 성폭력 개념을 극복해야 한다. 젠더에 기반 해서 젠더를 해체하기, 어려운 일이다.

 

* 이 글을 퍼가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월간 언니네 (www.unninet.co.kr) 2004년 9월 특집 "피해"라는 날개와 발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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