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즈마리 > '피해자다움'이라는 성역할

'피해자다움'이라는 성역할

글. 정희진(<a href="mailto:out67@chol.com">out67@chol.com</a>) / 여성학 강사, 처녀자리


이중 메시지 속에 살아남기

오랜 기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이혼하려는 여성들이 법정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왜 갑자기 이혼하려고 하는가(남자가 생겼나?)”이다. 하지만, 남편의 초기 폭력을 문제 삼아도, “참을성이 없다”고 비난받기는 마찬가지다. 흉기를 들이대는 강간범을 만났을 때, 소리쳐야 할까? 빌어야 할까? 잘못 소리쳤다가는 죽을 수도 있고, 잘못 빌었다가는 “너도 즐겼지”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피임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피임 준비를 잘하는 여성은 ‘선수’, ‘걸레’ 취급 받기 쉽고, 피임을 못해 임신하면 남자에게 부담 주는 ‘칠칠치 못한 여자’가 된다. 성차별에 저항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로 찍히고, 가만있으면, “여성들이 의식이 없어서 문제다”, “딸들아 깨어나라”며 계몽이 덜 된 인간으로 본다(‘깨어나야’ 할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남성 언어 안에서는, 여성의 저항과 순종 모두 남성 폭력과 성차별의 ‘원인’이 된다.


경찰서나 법정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의 분노나 강한 감정 표현은 과장으로 의심받고, 침착하고자 애쓰면 피해자답지 못한 인상으로 해석된다. 제주도 도지사 성추행 사건의 피해 여성은 ‘너무 똑똑한’ 것이 문제 해결 과정 내내 비난의 구실이 되었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녀는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여자가 어떻게 녹음기를 사용할 수 있나, 누구의 사주를 받았나” 따위의 질문을 받았다. 남성의 구미에 맞는 ‘적절한’ 피해자의 태도는 어떤 포즈일까?

 

피해의식은 남성의 전유물

남성은 여성이 성적 주체이기를 바라지 않지만, 동시에 바란다. 가부장제 유사 이래 여성은 언제나 성적 주체였다. ‘성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는’ 남성 젠더 시스템에서, 여자는 남자의 인생을 망치는 존재다. 스릴러 영화의 공식, 남자 주인공을 시험에 들게 하는 팜므 파탈(femme fatale), 요부(妖婦)는 남성의 모순을 여성에게 투사한다. 팜므 파탈은, 남성의 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가 결코 남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다. 남성의 성욕은 무한대라서 어디로 ‘분출’할지 모르지만, 성욕 폭발의 버튼을 누른 사람은 남자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라는 것이다. 이 때 남성은, 대부분의 성폭력 가해자들이 합창하듯, 유혹자 여성의 ‘피해자'가 된다.


원래 피해의식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정치의식으로서 여성의 피해 의식은 근대 이후 여성주의 의식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아주 최근의 현상이지만, 남성의 ‘피해의식’은 수 천 년 전 가부장제와 함께 시작되었다. 여성의 피해의식이 피해자로서의 사회구조적 의식이라면, 남성의 ‘피해의식’은 가해자의 정신 분열, 프로이드식으로 말한다면, 죄의 투사이다. 백인의 피해의식, 자본가의 피해의식, 미국의 피해의식을 보라. 피해의 의미와 내용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 관계의 유동에 따라 구성된다.


여성들은 지금 수천 년 동안 ‘여자라서’ 당연히 해왔던 노동을 거부하고, 너무도 오랫동안 당해왔던 여성에 대한 폭력에 저항하고 있다. 폭력을 당하는 것. 폭력에 순종하는 것. 맞으면서, 강간당하면서 가해자의 앞날을 걱정하고 보살피는 것.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여성의 성역할이었다. 동성애자 인권 담론의 가시화에 따른 이성애자들의 분노와 혼란처럼, ‘권리를 침해당한’ 남성들의 ‘피해의식’은 당연한 것이다.

 

여성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

여성에게 섹스나 모성은 자원이자 억압이다. 남성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작동 기제이다. 여성에게 섹스가 자원(‘꽃뱀’?)이기도 하기 때문에, 억압(성폭력 피해자?)이 아닌 것이 아니라,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실이 바로 성폭력의 원인이다. 남성에게는 모순이지만, 여성에게는 연속선이다. 여성에게 섹스가 자원이자 억압이라는 사실은, 성매매와 성폭력이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섹스의 주체는 오로지 남성이라는 의미이다.


주체와 피해자의 이분법,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의 성별화(gendered)는, 남성 주체의 이해(利害)와 환상 속에서 구성된 ‘침묵하는 피해 여성’이라는 관념을 낳았다. 이분법에서 각각의 범주는 겹칠 수 없는 상호 배타적 것으로 설정된다. 주체 아니면 피해자다. 그래서 여성이 행위자, 주체이면서 동시에 피해를 당한다는 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피해는 곧 피해자화로 연결된다. 피해는 타자화를 동반하지 않지만, 피해자화는 타자화를 전제한다. 피해 여성은 남성주체의 욕망에 의해 규정된다. 남성의 입장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더럽혀진 여자거나 ‘기껏해야’ 무기력한 희생자지, 젠더 계급투쟁의 생존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남성의 시각이 곧 사회의 시각이 된다. 특히,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피해자화는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 진부하면서도 세련된, 가장 오래된 타자화 방식이었다.


피해자화는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젠더 사회에서 남자들은 성공을, 여성들은 불행을 ‘경쟁’하는 이유이고, 여성들이 ‘피해자 정체성’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피해자일 때만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상담을 청한 어떤 성폭력 피해 여성은, 칼을 들고 덤비는 성폭력 가해자를 설득하여 임신과 성병 예방을 위해 콘돔을 사용하게 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칭찬했지만, 그녀에게 고소를 적극적으로 권할 수는 없었다. 가부장제 사회의 피해자 각본에서, 이 여성의 뛰어난 행위성과 협상력은 “섹스(강간) 동의”를 의미한다. 남성만이 성의 주체라는 인식에서는, 성폭력에 저항하는 여성은 무성적(asexual)이거나 문란한 여성으로 해석된다. 여성은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있어야만 피해가 인정되고, 피해자로서 ‘권력’을 부여받게 된다.

 

아버지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수기? - 남성 언어로 말하기의 고통

전 세계에서 유래 없이 ‘빠르고 쉽게’ 제정되었던 한국의 성폭력 법제화는, 여성의 고통을 남성의 언어로 재현하는 것의 한계와 남성의 ‘피해의식’이라는 역효과(backlash)의 위력을 확인시켰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성폭력만큼 인식론에서, 방법에서, 관계에서 논쟁적인 이슈도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인식론도 여성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한다.


성폭력 문제는 “여성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 “남성의 언어”, “여성의 관계성과 남성과의 사랑-상처-고통-착취 당함의 공통점과 차이” 가 도대체 무엇인지, 여성주의를 포함하여 기존의 모든 담론과 인식 체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거의 모든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은 논쟁이 폭발, 내연(內燃)하는 장소이다. 성폭력 사건이 가시화되기만 하면,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격렬한 논란에 휩싸인다. 또한 성폭력의 법제화는, 국가의 가부장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상담소 운영 등을 통해 국가 정책의 하부 집행자가 된 여성운동 단체의 이중 역할 속에서, 여성운동의 정체성과 진로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학생이든, 노동자이든, 공무원이든 남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예방 교육에 강의를 가면, 일단, 그들은 자신이 교육 대상, 잠재적 가해자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못견뎌한다. 어느 집단을 가든 남성들은 똑같은 문제제기를 한다. “성폭력 당하는 남성도 많다”, “여성부는 있지만, 남성부는 없다”, “여성 상위가 지나치다. 페미니즘은 여존남비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여당의 ‘친일 과거사 청산’ 주장에 야당이 ‘친북 과거사 청산’으로 대응하는 것과 같은, ‘남자도 성폭력 당한다’ 는 주장은, 여성주의가 기존의 보편성, 객관성, 평등 개념을 해체, 재구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성폭력, 아니 모든 폭력 사건 해결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남성들은 ‘가해자 인권론’으로 맞서고 있다.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여성의 권리 주장, 너무나 어렵고 복잡하다. 자유주의 철학은 평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인 동시에 걸림돌인 것이다.


현재 反성폭력 여성운동은 (기존의 언어에서 본다면) 여러 가지 모순에 직면해있다. 성적 자기결정권 주장과 여성은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다는 주장을 동시에 해야 하고, 성폭력은 섹스가 아니라 폭력인데 동시에 그것은 성적인 폭력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죽어도 잊어지지 않는 죽음과 같은” 성폭력의 극심한 피해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피해 여성은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주장해야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와 젠더 범주의 딜레마

모든 여성은 여성이지만 동시에 여성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 성폭력 반대운동의 결정적인 딜레마는, “여성이기 때문에 성폭력 당한다”는 젠더 범주가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지만, 실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인식론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가부장제에 저항하기 위해 여성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여성을 성별 정체성으로 환원시켜 모든 여성을 동질적인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가부장제 프로젝트에 기능적이다. 성폭력 발생 원인은 물론, 이후 투쟁은, 피해 여성의 사회의식, 자원, 장애 여부, 인종, 사회적 관계망, 학력, 계급, 외모, 나이, 건강 상태, 비혼 여부, 지역 등등의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성폭력의 원인 그리고 젠더 자체가 젠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젠더 인식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 여성의 불행이 젠더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피해자 중심주의’나 ‘성폭력 개념 확장론’은 여성들의 차이를 젠더로 환원한다. 여성주의는, 이제까지의 객관성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했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의 경험이 객관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기존의 객관성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객관성을 상대화하자는 것이다. 객관성이란 권력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며, 권력 관계에 따라 유동한다. 그러나 피해자 중심주의는 마치 모든 피해여성이 동일한 경험을 하며, 피해자의 경험이 그 자체로 객관적인 것 같은 오해를 준다.


같은 성폭력도 여성들은 다른 방식으로 억압받고 다른 강도로 피해를 느낀다. 어떤 여성은 포르노를 보고 성욕을 느끼지만, 어떤 여성은 불쾌할 수 있다. 젠더 범주는 여성을 개인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묶는다. 이때 포르노를 불쾌하기 느낀 여성의 경험은 의미화 되기 어렵다. 남성 사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다는 여성도 있는데, 지나치게 예민한 거 아니냐?” 여성이 느낀 것이 아니라 개인이 느낀 성폭력이 성폭력 피해의 의미를 구성해야 한다. 성폭력 피해 인식의 근거를 젠더가 아닌 여성 개인의 몸에서 찾고, 법 담론 중심의 성폭력 개념을 극복해야 한다. 젠더에 기반 해서 젠더를 해체하기, 어려운 일이다.

 

* 이 글을 퍼가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월간 언니네 (www.unninet.co.kr) 2004년 9월 특집 "피해"라는 날개와 발톱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