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서
꿈속에서 나는 추운 겨울날 지하철역 앞에서 보온이 가능한 아이스박스를 옆에 두고 무엇인가를 팔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꿈을 꾸자마자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나는 1인칭 화자가 아닌 3인칭 시점으로 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앞으로는 꿈속의 나를 " 너 " 라고 지시하겠다). 마치 내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처럼 말이다. 눈보라가 흥남부두처럼 휘날릴 때는 성냥팔이 소년을 보고 있는 환영에 시달렸다. 울었다. 페루애, 이 박복한 인생아 ! 살아서는 치질로 고생하더니 꿈속에서는 한겨울에 김밥을 팔고 있구나. 그때였다. 손님이 다가와 주문을 하자 너는 보온 박스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너가 팔고 있는 것은 편지였다 !
- 오늘 새벽에 쓴 편지이니 따듯하고 맛을 좋을 겁니다.
- 고마워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당근은 뺏어요. 대신에 사랑이라는 낱말을 듬뿍 넣었습니다.
- 호호. 고마워요.
주인과 손님은 이런 식의 오고가는말풍선을 주고받았다. 하하. 편지를 판다 ?! 너는 그런 식으로 편지를 팔고 있었다. 가격은 1000원이었다. 그래, 이런 게 꿈이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문득 실제로 누군가가 따스한 편지를 판다면 ? 나는 한 남자가 날마다 같은 장소에서 불특정 다수를 생각하며 쓴 편지를 살 용의가 있다. 누군가가 예쁜 손글씨로 당신을 응원한다거나 어제 읽은 책을 이야기하며 당신도 읽어보시겠어요 _ 라고 쓴 몇 장의 편지지를 1000원에 판다면 기꺼이, 기꺼이 ! 편지가 필요할 때가 있다. 페이스북 400자와 트위터 200자가 제공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지 뒷면에 남는 글의 중력이 그리울 때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에 30장을 팔아서 하루를 살 수 있다면 그런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은 날개를 단 짐승이라 상상을 펼치면 펼칠수록 높이 날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상상은 어떨까.
㉠ 그는 날마다 역 앞에서 그 전날 쓴 편지를 1000원에 판다. 바람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언어 장애가 있어서 그가 말을 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 직장 때문에 그 역을 지나쳐야 하는 그녀는 호기심 삼아 편지를 산다. ㉢ 편지는 수신인을 친구로 설정하고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내용은 그 남자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여서 자신이 키우는 개와 화분에 심은 꽃 그림과 이야기 따위이다. 시시한 이야기다. 그래도 편지를 산 것에 대해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호기심을 해결했으니까. ㉣ 그것을 계기로 그녀는 아침마다 그를 만나면 눈인사를 나눈다. 김밥을 산 것이 아니라 편지를 받은 사이이니까. ㉤ 그 인연을 계기로 가끔씩 그 남자의 편지를 사서 읽는다. 어느 날은 이런 내용이 있었다. " 나야, 어떻게 지내 ? 당신이 삽목한 베고니아 잘 자라. 신기해. 잎을 베어서 화분에 심었는데 잎이 되고 꽃이 된다는 시실. 보고 싶다. 친구 " ㉥ 다음 해, 그녀는 직장을 옮긴다. ㉦ 그녀는 십 년째 사귄 남자와 헤어진다. ㉧ 꽃집을 지나치다가 문득 편지를 파는 남자가 키운다는 은베고니아 꽃이 궁금하여 꽃집에서 은베고니아 화분을 산다. ㉨ 독감에 걸린 그녀. 혼자서 끙끙 앓고 있다가 문득 편지를 파는 남자가 궁금해진다. 그가 키운다는 개는 잘 자라고 있을까, 꽃은 ? ㉩ 한 달 후, 삽목한 은베고나이에서 꽃이 피었다. ㉪ 아픈 몸을 이끌고 그를 찾아간다. ㉫ 그는 여전히 편지를 팔고 있다. ㉬ 그녀는 그에게 1000원을 내민다. ㉭ 그가 말한다. " 이제 돈은 필요 없습니다. "
조금 늦었지만 2017년을 정리한다. 그해 내가 읽은 최고의 책은 페르난도 페소아의 << 불안의 책 >> 이다.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도스토옙스키의 << 지하생활자의 수기 >> 가 생각났다. 불안의 책이 스토너의 melancholia 이라면 지하생활자의 수기 속 주인공은 ADHD 환자의 melancholia 이다. 만약에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그것은 신이 당신에게 내린 선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초콜릿은 아직 개봉하지 않은 초콜릿이다. 다음 주말에는 편지를 써서 역사(驛舍) 앞에서 편지를 팔아볼 생각이다.
편지 있어요, 편지 사세요. 여기 갓 지은 편지 있습니다.
본문과 상관없는 글 ㅣ 내가 술을 마시는 횟수는 한 달에 5번이다(금,토,일 중 하나를 선택한다. 밖에서 술을 마실 계획이 없으면 주로 금요일에 마시고 술 약속이 있는 경우는 금, 토, 일 하루를 선택한다). 평균 5주가 한 달이니까. 그런데 이번 달은 4주여서 1번 정도는 내가 원하는 날짜에 술을 마실 수 있다. 그러니까 이틀 연속으로 마실 수도 있다. 그 점을 생각하니 너무 행복해졌다. 그래, 시바 ! 이런 게 인생이다. B컷 하나 올린다. 마음에 드는 사진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