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여고 그 계집애
첫사랑
박남철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 당진 " 이라는 지명이 호명될 때마다 < 충남 당진 여자 > 라는 시를 쓴 " 장정일 " 이 생각1)나듯이, " 포항 " 이라는 단어는 " 박남철 " 을 생각2)나게 만든다.
그래서 지진과 관련해서 최근 일주일 동안 포항이라는 단어가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장악할 때마다 나는 박남철 시인을 떠올리고는 했다. < 첫사랑 > 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포항여고 그 계집애는 " 그날 밤 얻어맞았다 /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 눈물도 안 흘리고 왜 /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 얻어맞았다 " 시인은 " 고등학교 " 에 다니는 남성 화자가 "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 포항여고 그 계집애 " 를 왜 때리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체 맥락을 짚고 나서 유추하자면 :
폭력의 발단은 여자가 남자에게 답장 형식으로 띄운 " 심각한 편지 " 속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사귀자는 메시지를 전달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거절 의사(가 담긴 편지)로 추정된다. 나는 이 시에 나타난 여성 혐오와 남성 폭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이 폭력은 문학적 수사'인가 ? 첫사랑이라는 서정적 멜로에 대한 반어법인가 ?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에티튜드는 에포케, " 판단 중지 " 였다. 판단 중지와 함께 그 이후로는 박남철 시를 읽지 않았다. 그의 시를 읽기에는 뭔가 찜찜했기 때문이다. 박남철 시인을 다시 마주보게 된 계기는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해에 출간되었던 <<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 라는 제목의 노혜경 산문집을 뒤늦게 읽다가 그 책에서 박남철이라는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산문집에서 박남철 사건을 자세하게 다룬다. 노혜경은 남성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데 아무 거리낌없는 박남철뿐만 아니라 남성 문인이 중심이 된 문단 전체에 뿌리내린 공범의식을 폭로한다. 비로소 나는 < 첫사랑 > 이라는 시에 내포된 남성 폭력을 정당화하는 악의 순환 고리'를 읽을 수 있었다. 포항여고 그 계집애에게 호감을 가진 화자는 사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지만 거절당한다.
이에 화가 난 남자는 그 여자를 죽도록 때린다. 이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은 시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내세운 방법은 자해'다. 때린 만큼 맞겠습니다 ! " 책상" 를 화자-몸에 대한 비유로, " 모서리 " 를 화자의 뾰족한 심성으로 활용한 시인은 " 면도칼 " 로 " 나를 함부로 깎 " 는다. 그리고는 " 눈물을 흘 " 린다. 이 행위는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내리치며 속죄를 구하는 종교 의식'을 닮았다. 하지만 이러한 시인의 전략은 기만적이다. 그는 여자에게 가한 " 가해 " 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 자해 " 라는 코스프레를 연출했을 뿐이다.
그것은 속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애가 중심이 된 자기 연민'이다. 죽도록 맞은 여자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죽도록 때린 자신이 더 불쌍한 것이다. "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 눈물도 안 흘리 " 는 여자에 비해 폭력 가해자인 " 나는 자꾸...... 눈물을 흘리 "며 참회한다고 고백하지만 사실은 자기 방어를 위한 연출이다. 여기에는 때린 놈보다 맞은 놈이 발 뻗고 잔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꼼꼼하다. 이러한 태도는 데이트 폭력 가해 남성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데이트 폭력 가해자들은 항상 피해 여성 앞에 무릎을 꿇고 나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참회하지만 이 참회가 기만적이라는 사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이 시가 비판받아야 되는 이유이다. 이후, 나는 박남철 시인에 대한 비판 글을 올렸는데 수위 조절에 실패하다 보니 법적 분쟁까지 가게 되었다. 오고가는 서류 끝에 합의에 이르기는 했으나 이 경험은 훗날 면역력을 기르는 계기가 되었다. 모 시인이 박남철과 똑같은 태도로 법적 대응 운운하며 나를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경험이 축적된 상태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굉장히 문학적인 문장을 구사하여 그 작가에게 메시지를 띄웠다. 하드보일드하게, 남성적 언어를 구사하며. 지금 생각해도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내가 그 시인에게 보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 조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