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여고 그 계집애



 

첫사랑, 박남철

 

첫사랑

 

                                    박남철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엔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

 




 

펼친 부분 접기 ▲




 

 


 


                                                                                                  " 당진 " 이라는 지명이 호명될 때마다 < 충남 당진 여자 > 라는 시를 쓴 " 장정일 " 이 생각1)나듯이, " 포항 " 이라는 단어는 " 박남철 " 을 생각2)나게 만든다.

그래서 지진과 관련해서 최근 일주일 동안 포항이라는 단어가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장악할 때마다 나는 박남철 시인을 떠올리고는 했다. < 첫사랑 > 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포항여고 그 계집애는 " 그날 밤 얻어맞았다 /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 눈물도 안 흘리고 왜 /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 얻어맞았다 " 시인은 " 고등학교 " 에 다니는 남성 화자가 "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 포항여고 그 계집애 " 를 왜 때리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체 맥락을 짚고 나서 유추하자면 :

폭력의 발단은 여자가 남자에게 답장 형식으로 띄운 " 심각한 편지 " 속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사귀자는 메시지를 전달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거절 의사(가 담긴 편지)로 추정된다. 나는 이 시에 나타난 여성 혐오와 남성 폭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이 폭력은 문학적 수사'인가 ?  첫사랑이라는 서정적 멜로에 대한 반어법인가 ?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에티튜드는 에포케, " 판단 중지 " 였다.  판단 중지와 함께 그 이후로는 박남철 시를 읽지 않았다. 그의 시를 읽기에는 뭔가 찜찜했기 때문이다. 박남철 시인을 다시 마주보게 된 계기는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해에 출간되었던 <<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  라는 제목의 노혜경 산문집을 뒤늦게 읽다가 그 책에서 박남철이라는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산문집에서 박남철 사건을 자세하게 다룬다. 노혜경은 남성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데 아무 거리낌없는 박남철뿐만 아니라 남성 문인이 중심이 된 문단 전체에 뿌리내린 공범의식을 폭로한다. 비로소 나는 < 첫사랑 > 이라는 시에 내포된 남성 폭력을 정당화하는 악의 순환 고리'를 읽을 수 있었다. 포항여고 그 계집애에게 호감을 가진 화자는 사귀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지만 거절당한다.

이에 화가 난 남자는 그 여자를 죽도록 때린다. 이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은 시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내세운 방법은 자해'다. 때린 만큼 맞겠습니다 !                           " 책상" 를 화자-몸에 대한 비유로, " 모서리 " 를 화자의 뾰족한 심성으로 활용한 시인은 " 면도칼 " 로 " 나를 함부로 깎 " 는다.  그리고는 " 눈물을 흘 " 린다. 이 행위는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내리치며 속죄를 구하는 종교 의식'을 닮았다. 하지만 이러한 시인의 전략은 기만적이다. 그는 여자에게 가한 " 가해 " 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 자해 " 라는 코스프레를 연출했을 뿐이다.


그것은 속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애가 중심이 된 자기 연민'이다. 죽도록 맞은 여자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죽도록 때린 자신이 더 불쌍한 것이다. "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 눈물도 안 흘리 " 는 여자에 비해 폭력 가해자인 " 나는 자꾸...... 눈물을 흘리 "며 참회한다고 고백하지만 사실은 자기 방어를 위한 연출이다. 여기에는 때린 놈보다 맞은 놈이 발 뻗고 잔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꼼꼼하다. 이러한 태도는 데이트 폭력 가해 남성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데이트 폭력 가해자들은 항상 피해 여성 앞에 무릎을 꿇고 나서 죽을 죄를 지었다고 참회하지만 이 참회가 기만적이라는 사실은 모두 다 알고 있다.

이 시가 비판받아야 되는 이유이다. 이후, 나는 박남철 시인에 대한 비판 글을 올렸는데 수위 조절에 실패하다 보니 법적 분쟁까지 가게 되었다. 오고가는 서류 끝에 합의에 이르기는 했으나 이 경험은 훗날 면역력을 기르는 계기가 되었다. 모 시인이 박남철과 똑같은 태도로 법적 대응 운운하며 나를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경험이 축적된 상태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굉장히 문학적인 문장을 구사하여 그 작가에게 메시지를 띄웠다. 하드보일드하게, 남성적 언어를 구사하며. 지금 생각해도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내가 그 시인에게 보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 조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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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26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할 말을 잃었네요...... 아 이 시 봐....

곰곰생각하는발 2017-11-26 11:24   좋아요 0 | URL
이 박남철 시인이게는 묘한 구석이 있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여성 혐오와 남성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수다맨 2017-11-27 0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남철 시는 타인에의 가학과 모멸이, 자기애와 자기방어와 자기연민으로 전환될 때 급격히 밀도가 떨어져 버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독자놈들 길들이기‘처럼 사람들, 군중들에 대한 야유와 냉소를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그들로부터의 비난과 멸시를 당당히 감수하겠다는 태도를 보일 때 그의 시는 일종의 귀족주의(바꾸어 말하면 마루야마 겐지 식의 후카시!)를 획득하게 된다고 봅니다. 그의 시가 나름의 문학성과 작품성을 가지는 경우가 바로 이런 때이지요.
저는 다행히도 고인과는 인연도 악연(!)도 없어서인지 박남철 시를 괜찮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의 실제 삶(그리고 몇몇 누추한 작품들)이야 폭력적/야만적이라는 얘기를 여러번 듣기는 했지만 그러한 얘기만으로는 박남철이라는 인간을, 시인을 간단히 요약하기란 어렵다고 봅니다.
저는 박남철이 자신이 현실에서 저지른 폭력과 야만을, 자신이 느끼는 남루와 좌절을 (자기애나 자기방어라는 프리즘을 전혀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그리하여 여성 혐오나 인간 경멸과 같은 세간의 정당한 비판에 전혀 연연해하지 않을 때, 상당히 읽을만한 시를 쓴다는 생각이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1-27 09:2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박남철 시는 여타 다른 시인보다 솔직하다는 생각은 듭니다. 시란 본질적으로 허구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전 양가적입니다. 박남철 시인에게 말이죠.
제가 시를 공부한 것도 아니고 문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어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12월 오면 망년회 한번 해야죠..

2017-11-27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8 0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8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7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7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7-11-29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미~ 박남철 시인을 까서 법정까지 갔나보군요! 어떻게 그런일이..@_@

근데 마지막 단어...조까..에서 뿜었습니다..ㅋ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7-11-29 20:10   좋아요 0 | URL
내가 조까 라고 했던 시인... 결국 감빵 가셨습니다.. 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