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람  이     잘    들  린  다  :

 

 

 

 

 

 

 

 

 

 


 

바닥이 잘 보인다


 

 

 


                                                                                                            문태준 시인은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고 말한다. 바닥은 가랑잎이 떨어지는 소리와 바람에 가랑잎이 휩쓸려 굴러가는 소리. 그리고 낙엽을 밟을 때 나는 소리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가을에는 " 바닥이 잘 보인다 " 고 말했지만 이 시각은 청각에서 기원한다. 가을에는, 가을에는 바람이 잘 들린다. 이 계절이 오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군산이라는 소도시에서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서 산 적이 있다. 이삿짐이 오기 전이라 급하게 시장에서 침구류만 장만해서 텅 빈 아파트에서 2주 넘게 지낸 적이 있다. 바닥에 누우면 바람이 바닥을 휩쓸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또르르르륵. 바람의 세기 때문에 바닥에 버려진 코카콜라 캔(으로 추정되는)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부산스럽게 들렸다. 바람이 많은 계절이구나.                               잠 못드는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같았다. 바닥에 누우니 밖에서는 바람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바람이 사납게 구는구나.                           불면증 때문에 졸피뎀을 복용한지도 꽤 오래되었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치다가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그날은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할 만큼 잔잔한 날씨였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안방에 불을 켠 후, 창문을 열어 밖을 보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날씨였다. 창문을 닫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바람이 바닥을 사납게 긁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조용한 밤이었다. 그때였다. 바닥에 버려진 빈 캔이 굴러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12살쯤 되었을까 ? 자정이 넘는 시간에 사내아이 하나가 아파트 단지 내에서 약간 가파른 언덕배기에 서 있었다. 그 아이는 언덕배기 위에서 캔을 굴리는 놀이에 열중했다. 또르르르르르륵륵륵. 조용한 밤이어서 바람이 바닥을 긁는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저 아이는..... 왜 자정이 넘는 시간에...... 그때였다. 아이가 하던 짓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유독 검은 아이였다. 나는 마치 못 본 것을 본 사람처럼 온몸이 떨렸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일에 대한 확신이 없다, 내가 듣고 본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에 대한. 졸피뎀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약의 부작용으로 몽유병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어느 때는 잠에서 깨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화를 내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경험한 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헷갈릴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내가 보았던 그 소리와 그 소년의 형상도 헛것이었는지 모른다. 어제는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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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7-10-24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소도시에 문태준 시인의 강연 소식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서 길을 가다가 눈을 씻으면서 다시 보았습니다♥눈 씻고 다시 볼 수만 있으면 팩트 확인은 가능하지만 제가 만일 곰발님과 같은 경우를 겪었다면..일단 뛰고 보았을거에요ㅋ오늘도 곰발님 명문으로 가을을 전해받네요 고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4 12:44   좋아요 3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집이 가재미‘입니다.
황지우, 최승자 이후 가장 마음에 드는 시집입니다. 문태준 강연 꼭 보세요.

clavis 2017-10-24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지우 시인은..문예진흥원에서 하는 강연을 들었던 이후로 관심이 사라졌어요~ㅋ이유는 불문에 부치옵니다 도서관에서 하는 강연이던데...가재미 시집은 저도 꼭 사보고 싶네용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4 13:01   좋아요 1 | URL
가재미 꼭 읽어보세요. 좋은 시가 많습니다.

syo 2017-10-24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태준은 제가 뻘스트로 사랑하는 시인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4 14:19   좋아요 0 | URL
요즘 신세대 시는 너무 난해해서 거부감이 들더군요.

임모르텔 2017-10-2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덩달아, 저도 문태준시인의 시를 읽고싶군요!
그 소년, 착한소년일 것 같아요... 파장에 공명되어서 ,같이 놀아주러 온 듯~ ㅎ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5 12:07   좋아요 0 | URL
착한소년이란 생각은 못했네요.. ㅎㅎ 이 소년이 일주일 내내 같은 시간에 캔을 굴립니다.
자정 넘어서 말이죠.

하여튼.. 가재미라는 시집 한번 읽어보세요. 아주 좋습니다. 적당히 촌스럽고 적당히 감성적이며 적당히 쉽습니다. 매우 좋은 시집입니다. 양선희의 < 그 인연에 울다 > 라는 시집도 좋습니다. 이 시집도 적당히 감성적이며 적당히 쉽습니다..

최근의 시집들은 난해한데 이 난해가 건설적이라기보다는 그냥 자뻑에 가까운 허세처럼 보여서.. 전 취향이 아니더군요..

임모르텔 2017-10-25 20:04   좋아요 0 | URL
네 ..읽어볼께요. 그 인연에 울다.. 제목이 벌서 짠~한데요..ㅎㅎ 날추워지는데 저체온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