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와 나 




 

 

 

 

                                                                                                     가끔 영화를 보다가 " 영혼이 털리는 경험 " 을 하게 된다. 영화관을 들어갈 때는 꼴뚜기처럼 탱탱한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으나 영화관을 나설 때에는 문어 다리처럼 흐느적거리게 되는 느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 거울 >> ,  왕가위의 << 아비정전 >> ,  데이비드 린의 << 아라비아의 로렌스 >> ,  팀 버튼의 << 비틀 쥬스 >> , 기타노 다케시의 << 키즈 리턴 >> ,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 밀리언 달러 베이비 >> , 차이 밍량의 << 애정만세 >> 를 보고 나면 영혼의 수분이 럭키금성 탈수기처럼 탈탈 털리는 기분이 들어서 극장 밖을 나서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바닥에 주저앉게 된다. 울지 않기 위해서, 울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남몰래 항문에 힘을 주었다. 눈구멍와 똥구멍은 하나이니까. 빔 밴더스 감독이 연출한 << 파리, 텍사스 >> 도 그런 경우'였다.

영화관을 나와서 신촌 굴다리를 걷다가 벽에 붙은,  이 영화 포스터 앞에서 나는 오래 멈췄다. 늦가을 볕에 말린 시래기 줄기처럼 생긴 배우 이름은 해리 딘 스탠튼'이었다. 감독보다 배우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온 경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해리와 나는 초면이 아니었다. 그는 << 관계의 종말 >> , << 딜린저 >> , << 대부 2 >> , << 에일리언 >> 에서 이런저런 단역으로 출연한 배우였던 것이다. 어디 이뿐이랴,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가 출연한 영화가 무려 250여 편이나 된다고 하니 관객인 우리는 기억은 못해도 오고 가다 한 번쯤은 마주쳤을 배우였다.

다만,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을 뿐이다. 주연도 아닐뿐더러 하물며 조연은커녕 주로 단역으로 출연한 배우를 기억하는 것은 낭비에 가까우니깐 말이다(그가 영화에서 줄곧 단역만 맡은 것은 아니었다 비중있는 조연을 연기한 적도 있지만 영화 자체가 그지같았다). 더군다나 그는 메소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도 아니었다. 이래저래 명배우로서 성공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배우였다. 그는 백만장자를 연기해도 거지처럼 보였고, 엘리트 과학자를 연기해도 거지처럼 보였고, 보안관을 연기해도 거지처럼 보였다........               

그런 배우를 원톱 원맨쇼에 가까운 영화의 주연으로 발탁한 영화가 << 파리, 텍사스 >> 였다. 모험에 가까운 캐스팅은 대성공이었다. 목석에 가까워서 표정이 읽히지 않는 그의 얼굴은 영화 속 주인공인 트래비스1)와 잘 어울렸다.  그 후,  나는 그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그가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를 일부러 찾아서 보았고, 그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그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곤 했다. 그것은 마치 " 히치콕 영화 " 에서 히치콕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을 발견할 때 느끼게 되는 즐거움과 비견될 만했다. 그런 그가 2017년 09월 15일, 91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나는 진심으로 백만장자를 연기해도 거지처럼 보였던 이 배우를 사랑했으며 그의 음악을 좋아했다. 눈물이 난다.

 

 

 

 

 

 

 

 

 

                              

 

 

1) 영국 롹 밴드 < 트래비스 > 는 영화 << 파리, 텍사스 >> 의 주인공 이름 트래비스에서 따왔다. 실제로 해리 딘 스탠튼은 배우이자 음악가이기도 했다. << 파리, 텍사스 >> 의 주제곡도 그가 불렀다.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삽입곡을 직접 부르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영화만큼은 예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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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7-09-18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8 16:34   좋아요 0 | URL
좋은 배우였죠. 이 배우 볼 때마다 저는 찰스 부코스키가 연상됩니다..

ICE-9 2017-09-18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분의 부고를 듣고 좀 충격을...
이로써 ‘스트레이트 스토리‘에 형제로 나왔던 분들이 다 돌아가셨군요.
그 영화에서의 해리옹도 참 좋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9 12:37   좋아요 0 | URL
그래요. 스트레이트 스토리에서도 해리가 나왔죠. 이분은 30대나 80대나 얼굴이 똑같습니다.
한결같이 루즈핏으로 일관했던 분이셨죠.. 루저의 루즈 핏이라니.

yamoo 2017-09-19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런 분도 있었군요. 에이리언에 나왔다면 저도 분명히 봤겠지요. 3-4번 봤으니...헌데 이름과 얼굴이 도통 생각나지 않다가 사진 보니, 전혀 모르는 배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19 18:37   좋아요 0 | URL
이분의 특징이 어디서 본 것도 같은데.. 첫반응이 대부분 이런 식이죠. 좋은 배우였어요.. 얼핏 보면 맥시코 배우 같기도 하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