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와 공작새
모두 다 이세돌을 응원했을 때, 나는 알파고를 응원했다. 한 돌, 두 돌, 세 돌..... 경우의 수가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알파고가 유리한 포석으로 좌표를 선점할 때마다 나는,
가시는 길에 영광 있으라. 기계가 인간을 밀어내고 세상을 지배할 것이란 공포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SF 영화의 팔 할은 기계 문명화 사회를 다룬다. 인간이 기계에 대해 우려하는 지점은 " 무오류성(자동화 시스템)의 오류 가능성 " 이다. 예를 들민 무인 자동 운전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운전대를 기계에게 맡기다니, 믿을 수 있냐 ? 한술 더 떠, 이거 실화냐 ? 이럴 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기계에게 운전대를 맡겨서 사고가 날 확률과 인간에게 운전대를 맡겨서 사고가 날 확률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위험할까 ?
적어도 기계는 전화 통화를 하느라 딴눈 팔거나, 홍준표처럼 낮술 먹고 오락가락하거나, 밤술 먹고 가로등을 향해 돌진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무인 자동 운전 시스템이 보다 더 안정적이다. 인간은 " 인간의 오작동 " 에 대해서 무지할 뿐더라 무례하다. 인류 멸망이 지구 멸망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인간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은 인류 멸망이 지구 멸망이라고 인식한다. 만약에 이세돌이 알파고를 이겼다고 해서, 다시 말해서 인간 지성이 인공 지능을 이겼다면, 인공 지능이 인간 지성을 압도하는 사회보다 더 희망적일까 ? 인간 지성의 오류는 인공 지능의 오류보다 치명적인 경우가 많다.
굳이 머나 먼 나라의 히틀러 총통 각하 님을 호명할 필요는 없다. 가까운 나라의 이명박과 박근혜 대통령 각하 님'도 있으니 말이다. 트럼프와 두테르테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었으며 보우소나르(브라질), 호퍼(오스트리아), 르펜(프랑스)의 발광 다이오드적 극성도 지적 에러가 낳은 현상'이다. 안철수 신화의 핵심은 멘토(링) 정치'다. 멘토 신화의 정점은 김난도였다. 김난도는 청춘을 싸잡아서 환자로 계급 강등시킨 후 위로와 공감 전략으로 어르고 달래거나 때론 타이른다. 김난도가 달달한 지적질로 승부를 건다면 김미경은 밥집 욕쟁이 할머니로 트랜스포머한다.
그런데 멘토는 " 꼰대의 부드러운 버전 " 에 불과하다, 멘토와 꼰대의 핵심은 지적-질'이니까. 믿쑵니까 _ 라고 외치는 멘토를 향햔 멘티의 리스펙트는 다음과 같다. 와와 ! 안철수는 한때 희망교 교주로서 수많은 신도를 거느렸으나 이제는 철저하게 그들에게서 외면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믿쑵니까 ? 돌아오는 대답은 밉습니다 ! 나는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헛웃음만 난다. 사실, 죄가 무슨 죄인가. 오히려 죄는 미워하지 말되 사람을 미워해야 되는 것 아닐까 ? 공작새가 자기 몸집보다도 큰 날개를 가졌지만 정작 날지 못하는 이유는 화려한 날개 때문이다.
화려한 볼거리를 위해 총천연색 깃털의 스펙타클을 키우다 보니 몸집보다 날개가 무거워진 탓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화려한 공작새의 날개는 날개가 아니라 꽁지깃이다. 안철수도 마찬가지다. 그가 한때 대중에서 선보였던 화려한 날개는 알고 보면 꼬리였다. 꼬리가 길거나 무거우면 정작 날지 못하거나 잡히는 법이다. 그것이 공작 정치의 한계이다. 지록위마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꼬리를 가리켜 날개라 한다. 그때 그 당시, 우리가 열광했던 것은 날개가 아니라 꼬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