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환경불량 거주자의 반란 :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
[ -살이 ] 라는 접사는 " 어떤 일에 종사하거나 어디에 기거하여 사는 생활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 인데, - 살이'라는 접사가 붙는 단어'치고 좋은 의미는 없다. 감옥살이, 셋방살이, 곁방살이, 종살이, 타향살이......
그런데 이 접미사는 경제적 곤궁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시집살이, 신접살이'처럼 심리적 회폐1)도 적용된다. 그러니까 뜨거운 아랫목에 엉덩이를 지져도 왠지 눈보라아아~ 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 같은 좌불안석의 삶이 " - 살이 " 이다. 조의연 판사가 이재용 구속 수사 영장 청구를 기각하면서 밝힌 기각 사유 중 하나는 " 피의자의 주거 및 생활환경 고려 " 였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으리으리한 대저택에 살던 황제가 1.5평 감옥살이를 견딜 수 있겠냐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천만 시민이 주말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풍찬노숙하는 상황에서도 조 판사는 의연하게 한 개인의 럭셔리한 라이프를 위해 섬세한 배려를 한 것이다.
조 판사의 의연한 태도를 달리 말하자면 가막소는 주거환경이 럭셔리하지 않는 놈들만 가는 곳이 된다. 이 뉴스를 접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영화는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 식스 센스 >> 와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 디 아더스 >> 였다. 두 영화 모두 곁방살이를 해야 하는, 아아...... 집 없는 설움에 대한 하우스 푸어의 불안을 다룬다. 대한민국은 세금을 내지 않으면 한겨울에도 도시가스와 전기를 끊는 나라'이다. 누군가는 당연한 것 아니냐_고 반문하겠지만, 프랑스와 북유럽 선진국은 평생 세금을 내지 않아도 도시가스나 전기를 끊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가스나 전기를 절연하는 행위는 곧 빈곤 생활자의 " 삶의 절연 " 으로도 연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의 생활환경을 그토록 걱정하는 법이 가난한 자의 생활환경에는 그토록 냉정하다는 사실이 절망스럽다. 다음은 영화 << 디 아더스 >> 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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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방'을 얻어 셋방살이'를 해본 사람은 한결같이 집 없는 설움'에 대해 말한다. 주인이 유세 떠는 꼴을 보면 < 집 > 이 있다는 사실은 세(勢)가 있다(有)는 말과 뜻이 통한다. 으리으리한 집을 가진 놈은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꾀죄죄한 집을 가지고 있는 놈은 나름대로 꾀죄죄한 권세를 부린다고 할 수 있다. 가진 거라고는 불알 두 쪽이 전부인 맨발의 청춘은 주먹 불끈 쥔다. 열심히 일해서 집 하나 장만하리라. " 샛방 " 에서 새'는 사이의 준말'이니 샛방이란 방과 방 사이에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니깐 엄밀히 말하면 샛방은 방과 방 사이에 있는 짜투리 공간이다. 홍길동 아버지가 양반이랍시고 길동에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게 한 것과 같이, 집주인은 셋방살이하는 이에게 방을 방이라 부르지 못하게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다시 한 번 주먹 불끈 ! (페니스는 세우지 마라) 하지만 서러워 마라. 예수도 샛방처럼 방과 방 사이에서 태어난 꾀죄죄한 셋방살이 세입자가 아니었느냐. 곳과 곳 사이가 곳간庫間'이듯, 마구간馬廐間 또한 사이(間) 공간'이다. 예수는 바로 틈새 ( 間 ) 에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태어난 성인이었다. 그는 우주를 통치할 만한 권세를 가졌으나 구름 위 높은 성을 버리고 가장 좁고 낮은 틈새에서 태어나 인간이 가진 죄를 안고 희생을 선택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쪽팔려 할 필요 없다. 샛방과 비슷한 말이 곁방'이다. 길동 아버지가 호부呼父를 허락하지 않듯이 곁방 또한 호방(呼房)을 허락하지 않는다. 곁이란 메인 요리'가 아닌 스끼다시'요, 고상하게 말하자면 타자'다. 비주류, 변두리, 짜투리'에 속한다. 속담에 " 곁방 년이 코 곤다 " 는 말이 있다.
셋방살이하는 주제에 밤에 코를 골아서 집주인이 잠자리를 설친다는 뜻인데, 속뜻은 제 분수도 모르는 것들이 까분다는 뜻이다. 예수라면 이 말을 듣고 주먹 쥐고 불끈 쥐며 소리쳤을 것이다. " 개똥 같은 소리 하지 마쇼 ! " 월세 꼬박꼬박 내니 공짜로 더부살이하는 것도 아닌데 좀 까불면 어떤가 ? 이명박 시절 오야붕 믿고 하는 꼴이 장관이었던 유인촌이었다면 " 승질 뻗쳐서 증말 ! " 이라고 한소리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디 그런가. 쥐 죽은 듯 살아야 한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 디 아더스 > 는 곁방살이하는 주제에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코를 고는 눈치 없는 유령에 대한 이야기'다. 니콜 키드만은 끊임없이 자기가 사는 집에 유령이 침입해서 한밤중에 시끄럽게 군다고 의심하지만 반전은 따로 있었다. 유령은...... 니콜 키드만'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비롯한 가족이 오래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저택의 집주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곁방살림을 차린 꼴이다. 이 초라한 몰락, 그녀는 서럽게 운다. 자신이 그토록 지켜려고 했던 가족이 유령이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셋방살이'에 대한 설움이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왔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 쥐 죽은 듯 숨 죽이며 조용히 살아온 나날에 대한 회한과 설움이리라. 영화 제목 " 디 아더스 " 는 말 그대로 중심에서 벗어난 타자'이며, 사이'이고, 곁'이다. 그들은 입 다물고 조용히 살아야 하는 존재'다, 유령은 그런 존재다. 이와 유사한 영화 < 식스 센스 > 도 곁방살이하는 설움에 대해 말한다. 죽은 자는 무조건 방을 빼야 한다. 그것이 게임의 룰'이니깐 ! 곁방살이'를 하니 그는 잠을 잘 때에도 속 시원하게 코를 골며 잘 수 없다.
들킬세라 유령처럼 뒤꿈치를 들며 다녀야 한다.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유령은 기본적으로 더부살이'를 해야 하는 존재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두 영화 모두 중심이 아닌 변방 지역 출신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점이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는 칠레에서 태어났고, 나이트 샤말란은 인도 태생이다. 그들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구름 속 성'에 초대된 이방인, 디 아더스'다. 이렇듯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와 나이트 샤말란이 중심에서 밀려나 " 사이 " 에 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데에는 집 없는 설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집 없는 나그네 설움이라니. 이 구조를 대한민국으로 확대하면 슈퍼 갑인 정치가, 대기업, 지방 토호들은 집주인이고 대한민국 서민은 샛방이거나 곁방에 사는 세입자'다. 집주인인 주류 권력자가 곁방살림을 차린 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입 다물고 조용히 살라는 주문이다.
코를 골지 말 것, 뛰어다니지 말 것, 세입자 외에는 사람을 불러들여서 떠들지 말 것, 하여튼 입 다물고 조용히 살 것 ! 이명박 정권 이후 우리는 할 말을 할 때 조심하게 된다. 국가 조직의 뒷조사가 두렵고, 가진 자가 허위 사실 및 명예 훼손으로 날리는 법원 출두서가 두렵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주류 권력자는 언제나 곁방 년이 코를 골면 괘씸하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이 파업 노동자에게 백 억원의 손해배상청구서를 날리는 이유는 곁방 사는 년이 시끄럽게 코를 골아서 집주인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렸다는 이유다.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파업 노동자는 벼랑 끝에 몰리고 자살을 선택한다. 좆같지만 그게 현실이다. 오래 전 일도 아니다. 곁방살이를 하던 세 모녀가 방과 방 사이'에서 자살을 선택했다. 그들은 유령처럼 쥐 죽은 듯 살았다.
주인은 세 모녀가 평소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다는 말과 함께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는, 착한 이웃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이 말이 꽤나 아팠다. 쥐 죽은 듯 살아야 좋은 곁방살이인가 ? 곁방 년이 코를 골면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 세 모녀 이야기는 묘하게 영화 < 디 아더스 > 와 겹친다. 주인공인 니콜 키드만도 두 자녀를 보호하던 어미였다. 그녀는 죽은 듯, 조용히 살았다. 유령처럼......
ㅡ 집 없는 설움 전문

주거환경이 불량한 이'라면 튀어나와라. 그러니까 방바닥에 엉덩이를 지지다가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가스보일러 온도를 낮춘 경험이 있거나 창문을 열면 스카이뷰 대신 우뚝 솟은 건물에 뷰가 방해를 받거나 항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집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튀어나오라는 얘기다.
1) 최순실 유행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