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기한 수컷들이 펼치는 엄살의 향연 :
문학 속 한국 남자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을 접은 결정적 계기는 윤대녕 소설 때문이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학에게는 미안한 소리이지만 학을 뗐다. 그의 특정 소설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윤대녕 소설은 줄거리가 모두 대동소이해서 그게 그거니까. 이 획일성이 작가의 일관된 정신 세계'라면 할 말은 없다만 내 눈에는 멘탈 표절로 보인다. 평단은 세련된 도시적 감수성과 신선한 문체 운운하며 엄지를 척, 올리고 감탄할 때마다 나는 중지를 척, 올리며 반항했다.
주례사를 남발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남진우 평론가가 << 은어 낚시 통신 >> 을 두고 " 안개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휘황한 불꽃나무, 윤대녕의 소설은 이 성소(聖所)에 도달하기 위한 기나긴 도정이며 이 성소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현실 저편 일상 저편에 자리잡고 있는 그 무엇이 홀연히 이 진부한 사실의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 삶은 무의미한 반복 혹은 추락의 과정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불꽃으로 고요히 타오른다. 일상의 나태한 의식으로는 인지되지 않는 낯선 세계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 라고 평가했을 때는 아연실색했다.
비단 이 소설집'뿐만 아니라 다른 소설들도 성격이 대동소이해서 다른 평론가들의 비평도 대부분 시원(始原)을 찾아 떠나는 문학 여행이라든지 성소(聖所) 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게 중평이었다. 비평이라고 하기에는 자격 미달이어서 하마평이 적당할 텐데, 하마평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러서 벼룩평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미안해, 벼룩 ! 최순실이 < 의상실 > 에서 옷 고르는 재미에 빠져 있다면 윤대녕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은 < 의욕상실 > 에 빠져 있다. 돈이나 벌려고 직장인이 되었나 자괴감에 빠질 무렵, 남자는 현대 카드 하나 손에 쥐고 춘천 청평사, 부여 무량사, 땅끝 해남, 제주도 성산포'로 떠난다.
개불처럼 히마리 없던 남자는 이 여행을 통해 원기를 충전한다. 문든 이런 의문이 들었다. 윤대녕 작품 세계를 장소애(토포필리아)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한가 ? 혹자는 청평사, 무량사, 성산포가 평론가들이 말하는 성소나 시원이겠구나 지레짐작하겠지만, 아니올시다. 그곳은 여행지(로컬리티) 가 아니라 처녀지(處女地)다. 그러니까 윤대녕 소설에 등장하는, 히마리 없는 남자가 여행을 통해 원기를 회복하는 곳은 지(地)가 아니라 여성의 체(體)다. 박근혜가 관저에서 서면(?) 보고를 받았다면 소설 속 묘령의 여자는 모텔에서 도시적 감수성과 세련된 표준어로 구사하는 남자의 서면 보고를 받는다.
소설 속 남자들이 자주 써먹는 수법이 자기 연민이다. 나는 외롭고, 나는 아프고, 나는 지치고, 나는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내가 윤대녕과 평론가를 싸잡아서 비판하는 대목은 한국 사회가 여성을 소비하는 싸구려 방식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커녕 적극적으로 옹호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여성의 몸을 로컬리티(locality)에 빗대어 문학적 감수성으로 풀어내는 방식은 꽤나 로 컬리티(low quality)하다. 유식하게 말해서 그렇지, 무식하게 풀어서 말하자면 " 시바, 졸라 촌스럽다야 ~ " 그들은 여성 - 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피로할 때 먹는 비타민C이거나 박카스F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출판사 사장이라면 윤대녕 소설 띠지를 다음과 같이 만들 것이다. 남성이여 ! 피로할 때 떠나라, 원기 회복엔 묘령의 여자. 아침에 먹는 사과보다 맛있습니다. 절찬리에 판매 중 ! 충남 보령군 음성읍 절찬리에서는 안 팔아요, 팔아요, 요, 요, 요, 요, 요, 요........ 이 싸구려 남성 판타지에 질려서 더 이상 윤대녕 소설 따위는 읽지 않는다. 차라리 순문학보다는 장르문학이 느끼하지 않아서 좋다. 튀김 문학보다는 차라리 스시 문학이 낫다. 과연 여성의 몸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비하며 위대한 성소(聖所)이자 시원(始原)일까 ? 문제는 윤대녕만의 판타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박범신의 << 은교 >> 도 마찬가지다.
문학적 감수성으로 포장된 서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여성 숭배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여성 숭배가 아니다. 오히려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차기 일쑤다. 여자 옆에 끼고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사장님일수록 평소에는 여성 비하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것과도 같은 모순'이다.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탐나는 여성 육체이지 평범한 여성 육체가 아니다. 이처럼 體를 食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할수록 여성 육체는 숭배받는다. 바로 이런 남자 때문에 바바라 크루거는 " 당신(여성)의 몸은 전쟁터 " 라고 폭로한다. 한국 문학 속 남성은 대부분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 어디가 아픈 남자들이다. 나 아프다고 징징거리기 일쑤다.
박진성 시인의 성폭행 사건으로 시작된 따라지 시인들의 범죄 수법을 보면 소설 속 남성 캐릭터에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깜짝 놀라게 된다. 요샛말로 빼박캔트'다. 성폭력을 저지른 시인들이 자신의 몸을 곧 죽을 몸으로 상정한 후 상대 여성에게 섹스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시인들을 보면서 자기 연민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던 나를 반성하게 된다. 그동안, 내 삶도 저렇게 추했구나 _ 라는 자괴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