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에서 우리가 놓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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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연출한 << 타이타닉 >> 은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 불쾌했던 경험 " 으로 남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불쾌한 감정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몰랐다. 밤샘 작업을 하고 난 터'라 친구가 억지로 나를 극장으로 끌고 나온 것에 대해 뿔이 났을 수도 있고, 중간중간 조느라 흐름이 끊겼을 수도 있고, 깨어 있을 때에는 졸음을 참느라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은 상기된 얼굴로 기쁨을 감추지 않았지만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극장을 나왔다. 친구는 종로3가 둘둘치킨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며 내가 지루하게 본 이유를 작품성이 아니라 내 졸음에서 찾으려고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잠을 자느라 집중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집중할 수 없어서 잠을 잤노라고 말했다. 하여튼 나는 << 타이타닉 >> 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명절 특선으로 << 타이타닉 >> 을 방영하길래 작정하고 영화를 시청했다. 보면서 아, 했다. 내가 이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를 발견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싫어할 구석을 지금에서야 발견한 것인지도. 캐서린 윈슬렛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스케치북을 보는 장면이 있다. 스케치북 대부분은 한 여자의 누드화'다. 살짝 질투를 느낀 캐서린 윈슬렛은 디카프리오에게 매력적인 누드 모델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여자와 침대에서 뒹구는 사이가 아니냐는 행간을 깔고 있다.
하지만 가난한 화가인 디카프리오는 당황한 기색이 없다. 믿을 구석이 있다는 자신감이 읽힌다. " 오, 오해는 마세요. 그녀와 나는 모델과 화가의 관계일 뿐입니다. " 캐서린 윈슬렛은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그러자 디카프리오가 말했다. " 다음 장을 넘겨보세요. 그녀는 다리가 하나 없는 모델입니다. " 그는 웃으면서 말한다. 장애인을 내가 사랑할 리 없는 것 아니냐는 표정이다. 캐서린 윈슬렛도 스케치북의 다음 장을 넘겨보고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도 그처럼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애를 가진 여자를 사랑할 리 없지. 나는 이 장면에서 경악했다. 장애의 아픔 앞에서 그토록 해맑게 웃다니. 캐릭터의 윤리성에 대해 딴지를 걸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이 장면은 누가 봐도 불필요한 설정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 장면이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장면에서의 비윤리성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비단 감독뿐만은 아니다. 영화 << 타이타닉 >> 에 대한 수많은 리뷰가 쏟아졌지만 이 문제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평론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아픔을 느꼈으리라. 영화 << 귀여운 여인 >> 이 가난한 여자가 과시적 소비를 마주했을 때의 곤경을 다룬 것이라면, << 타이타닉 >>은 반대로 부유한 여자가 3등실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을 다룬 영화'다. 얼핏 보기에는 상류층 여자인 캐서린 윈슬렛이 3등실 문화에 동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치유를 위해 그것을 소비할 뿐이다.
지첵은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케이트 윈슬렛은 상류층 여자로 정신적으로 고민과 혼동 속에 있고, 그녀의 자아는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기능은 그녀의 자아 재구성을 돕는 것입니다. 그녀의 자아 이미지를 말 그대로, 그가 종이에 그립니다. 이건 가장 인기 있던 옛 제국주의자 신화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상류층 사람들이 활력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하류층과 접촉할 필요가 있다고 여깁니다. 기본적으로 기들에게서 삶의 에너지를 빠는 흡혈귀 식으로 무자비하게 착취하여 활기를 되찾아, 그들의 고립된 상류층 생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그렇기에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비겁한 작품이다. 흑인 여자는 거울에서 " 흑인 여자 " 를 보지만, 백인 여자'는 거울 속에서 백인 여자가 아니라 단순히 " 여자 " 를 본다. 전자는 흑인'이라는 결핍을 인식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주류 백인 사회에 속한 백인의 피부색은 결핍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인종, 젠더, 장애, 계급에 둔감한 이유는 그가 성공한 백인 남성이기에 그렇다. 만약에 그가 다리 하나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면 캐서린 윈슬렛과 디카프리오가 다리 없는 누드 모델의 데생을 앞에 두고 해맑게 웃는 장면을 연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류의 무지, 망각, 무감각은 항상 비주류의 고통을 양산하는 주범이다.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페미니즘 서적을 읽다 보면 내가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줄기차게 여성을 차별했다는 사실이 덜컹, 걸린다. 그때는 몰랐던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보니 주류로서의 내가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전과 그후의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류근의 시'다.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는 <<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 >> 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언뜻 세계와 불화하는 듯도 하다. 가진 자와 성공한 자들에 비해 처량하고 궁상맞은 자신의 신세를 노래한다. 그러나 ‘죄라고는 사랑한 죄 밖에 없는, 가난하고 불쌍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낭만적인 나’의 서사 밑엔 늘 여자가 방석처럼 깔려 있다. 그는 세계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한탄하지만, 여성을 착취하는 세계의 메커니즘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 시절에 여자가 ‘밥 혹은 몸’이었듯, 그의 시에서도 여자는 ‘밥 혹은 몸’이다. 야만의 세계를 꼭 빼 닮은 야만의 시에 여자의 자리는 없다.
시인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에 대해 정색을 하고 < 문단과 여혐 > 이라는 민감한 글을 썼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거울이다. 남자는 거울을 통해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기보다는 사람을 본다. 모든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