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에서 우리가 놓친 것 




http://m.media.daum.net/m/media/culture/newsview/20160915074328294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연출한 << 타이타닉 >> 은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 불쾌했던 경험 " 으로 남아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불쾌한 감정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몰랐다. 밤샘 작업을 하고 난 터'라 친구가 억지로 나를 극장으로 끌고 나온 것에 대해 뿔이 났을 수도 있고, 중간중간 조느라 흐름이 끊겼을 수도 있고,  깨어 있을 때에는 졸음을 참느라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은 상기된 얼굴로 기쁨을 감추지 않았지만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극장을 나왔다. 친구는 종로3가 둘둘치킨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며 내가 지루하게 본 이유를 작품성이 아니라 내 졸음에서 찾으려고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잠을 자느라 집중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집중할 수 없어서 잠을 잤노라고 말했다. 하여튼 나는 << 타이타닉 >> 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 명절 특선으로 << 타이타닉 >> 을 방영하길래 작정하고 영화를 시청했다.  보면서 아, 했다. 내가 이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를 발견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싫어할 구석을 지금에서야 발견한 것인지도. 캐서린 윈슬렛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스케치북을 보는 장면이 있다. 스케치북 대부분은 한 여자의 누드화'다. 살짝 질투를 느낀 캐서린 윈슬렛은 디카프리오에게 매력적인 누드 모델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여자와 침대에서 뒹구는 사이가 아니냐는 행간을 깔고 있다.

하지만 가난한 화가인 디카프리오는 당황한 기색이 없다. 믿을 구석이 있다는 자신감이 읽힌다. " 오, 오해는 마세요. 그녀와 나는 모델과 화가의 관계일 뿐입니다. " 캐서린 윈슬렛은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그러자 디카프리오가 말했다. " 다음 장을 넘겨보세요. 그녀는 다리가 하나 없는 모델입니다. " 그는 웃으면서 말한다. 장애인을 내가 사랑할 리 없는 것 아니냐는 표정이다. 캐서린 윈슬렛도 스케치북의 다음 장을 넘겨보고는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녀도 그처럼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애를 가진 여자를 사랑할 리 없지. 나는 이 장면에서 경악했다.  장애의 아픔 앞에서 그토록 해맑게 웃다니.  캐릭터의 윤리성에 대해 딴지를 걸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이 장면은 누가 봐도 불필요한 설정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 장면이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장면에서의 비윤리성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비단 감독뿐만은 아니다. 영화 << 타이타닉 >> 에 대한 수많은 리뷰가 쏟아졌지만 이 문제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평론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아픔을 느꼈으리라. 영화 << 귀여운 여인 >> 이 가난한 여자가 과시적 소비를 마주했을 때의 곤경을 다룬 것이라면, << 타이타닉 >>은 반대로 부유한 여자가 3등실 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을 다룬 영화'다. 얼핏 보기에는 상류층 여자인 캐서린 윈슬렛이 3등실 문화에 동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치유를 위해 그것을 소비할 뿐이다.

지첵은 이 영화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케이트 윈슬렛은 상류층 여자로 정신적으로 고민과 혼동 속에 있고, 그녀의 자아는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기능은 그녀의 자아 재구성을 돕는 것입니다. 그녀의 자아 이미지를 말 그대로, 그가 종이에 그립니다. 이건 가장 인기 있던 옛 제국주의자 신화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상류층 사람들이 활력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하류층과 접촉할 필요가 있다고 여깁니다. 기본적으로 기들에게서 삶의 에너지를 빠는 흡혈귀 식으로 무자비하게 착취하여 활기를 되찾아, 그들의 고립된 상류층 생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그렇기에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비겁한 작품이다. 흑인 여자는 거울에서 " 흑인 여자 " 를 보지만,  백인 여자'는 거울 속에서 백인 여자가 아니라 단순히 " 여자 " 를 본다.  전자는 흑인'이라는 결핍을 인식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주류 백인 사회에 속한 백인의 피부색은 결핍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인종, 젠더, 장애, 계급에 둔감한 이유는 그가 성공한 백인 남성이기에 그렇다. 만약에 그가 다리 하나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면 캐서린 윈슬렛과 디카프리오가 다리 없는 누드 모델의 데생을 앞에 두고 해맑게 웃는 장면을 연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류의 무지, 망각, 무감각은 항상 비주류의 고통을 양산하는 주범이다.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페미니즘 서적을 읽다 보면 내가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줄기차게 여성을 차별했다는 사실이 덜컹, 걸린다. 그때는 몰랐던 것을 지금에 와서 다시 보니 주류로서의 내가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전과 그후의 평가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류근의 시'다.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는 <<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 >> 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언뜻 세계와 불화하는 듯도 하다. 가진 자와 성공한 자들에 비해 처량하고 궁상맞은 자신의 신세를 노래한다. 그러나 ‘죄라고는 사랑한 죄 밖에 없는, 가난하고 불쌍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낭만적인 나’의 서사 밑엔 늘 여자가 방석처럼 깔려 있다. 그는 세계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한탄하지만, 여성을 착취하는 세계의 메커니즘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 시절에 여자가 ‘밥 혹은 몸’이었듯, 그의 시에서도 여자는 ‘밥 혹은 몸’이다. 야만의 세계를 꼭 빼 닮은 야만의 시에 여자의 자리는 없다.

 


시인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에 대해 정색을 하고 < 문단과 여혐 > 이라는 민감한 글을 썼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거울이다. 남자는 거울을 통해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기보다는 사람을 본다. 모든 문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16-09-18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타이타닉 봤는데 하도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이 없네요.
근데 보면서 이 영화는 작품에 비해 너무 고평가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게 또 어찌보면 허리우드의 힘이기도 하죠.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더럽게 허세 부리는. 그래서 제가 허리우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고.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메리칸이라고 하잖아요. 전 이게 더 문제라고 봐요.
곰발님이 말한 옛 제국주의.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재투성이 아가씨와 왕자의 이야기는 영원한 이야기 법칙이잖아요.
싫으면 보지 말아라. 그게 주류들의 속성이고.

근데 류근이 그런 사람이란 게 참...

곰곰생각하는발 2016-09-18 19:58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청탁 운운은 기자가 엄청나게 오버를 한 것이라 봅니다. 친분이 있다 보니 지나가는 말로 툭툭 내뱉은 것일 수도 있으니 시인 입장에서는 뿔이 날 만합니다.

그런데 기자가 지적한 류근의 시적 자아`는 비판을 받을 구석이 있긴 하죠. 개인적으로 류근 시를 좋아했지만 불편했던 대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죠. 그의 시의 세계는 여자가 방석처럼 기본적으로 깔려 있잖아요. 다시 그 시를 생각하면 걸끄러운 겁니다..

clavis 2016-09-18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악
문제는 거기서 부터 시작. . 이 자쉰감 넘치는 결말. . 아주 시적입니다. 제가 너무 빠수니같은 찬양을 올려대서 반곰발 세력이 형성될까 걱정이네요^^

무튼, 저는 나쁜남자라는 영화를 보면서 ㅇㄷㅈ기자가 그 영화를 평하면서 참 나쁜 한 남자를 보았다고 했는데 저도 공감했습니다. 그 남자, 누군지 아시겠지요? 감독입니다, 감독!

그런 영화, 왜 만드는거여요
그 장면, 왜 집어넣은 건지. .
곰곰 생각하게해주심 감사드림돠

곰곰생각하는발 2016-09-19 09:27   좋아요 1 | URL
저를 너무 찬양하시지 마십시오.
저의 친애하는 적들이 사방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ㅎㅎ
하튼 타이타닉 보다가 저 장면 보고 깜짝 놀랐네요..


+

김기덕 감독 말씀하시는 거군요 ? ㅎㅎㅎ
저는 기덕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도 있는데 나쁜남자에 대해서는 동의를 못하겠더군요..




수다맨 2016-09-19 0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류근의 시를 읽어보지 않아서ㅡ최근에는 시집을 사거나 읽어야 할 필요성을 그다지 못 느끼겠더군요ㅡ 뭐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기자가 약간은 오버한 감도 있고, 좀 더 짜임있고 성실한 칼럼을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저 칼럼은 (저만의 추측입니다만) 류근 시의 맹점이라 할 만한 부분을 제대로 건드린 것 같습니다. 저 기자의 말을 정리하자면 시인은 빈자의 만감萬感을 재치와 위트 있게 표현할 줄 알지만, 그러한 표현의 바탕에는 여성을 성적/물질적 존재로 한정짓고 격하하려는 무의식이 숨어 있다, 뭐 이런 거겠지요. 주류 문예지의 평론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날카롭고 독한 말투라는 점에서, 독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칼럼이란 형식이 필자에게 적잖은 집필의 자유를 허하기는 하지만) 저 칼럼을 다 읽고 나니 어딘가 두서없고 애매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차라리 작심하고 실명을 거론하면서 류근과 문단을 제대로, 찬찬히 저격(!)하는 글을 썼으면 더 좋았을 듯합니다. 기자가 시인(들)의 이름을 가리고 비판을 하려다 보니까 청탁 얘기, 류근 시의 문제, 문단 내의 남녀차별, 김현 시인의 제언, 세계의 착취 메커니즘과 같은 얘기들이 갈피 없이 섞이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져서요. 물론 이런건 어디까지나 기술적인 문제에 가깝지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9-19 09:30   좋아요 0 | URL
칼럼이다 보니 원고지 제약도 있고 하기에 어차피 겉핥기 식으로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ㅎㅎ. 그런데도 위 기자의 문제 제기에는 딱히 할 말이 없더군요. 예리한 지적이기는 했습니다. 사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윤대녕 식 소설이거든요. 왜 남자 주인공이 권태에 빠지면 여행을 가고 거기서 뮤즈를 만나 섹스를 하고 병을 치유하고 돌아오는 서사.. 이게 참.. 진짜 여자를 방석처럼 깔고 가는 거거든요. 일종의 착취죠.... 이걸 이제는 바로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윗 칼럼도 아마 지면을 달리 해서 쓰라고 하면 제대로 쓸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