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와 효도르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차 유리가 검은 코팅이 된 검은 색 그랜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랜저가 출세한 남자를 상징하는 오브제'였다. 그랜저의 경적이 가볍게 울렸다.
나에게 보내는 신호 같기에 다가갔더니 창문이 열리면서 오늘 만나기로 했던 그녀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 타세요 ! " 내가 차 안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하자 여자는 말했다. " 아빠 차예요. " 차가 멈춘 곳은 외진 곳에 넓은 정원이 있는 한정식집이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 요리집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곳이 정치인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 귀뜸을 해주었다. 그녀의 직업은 조리사로 청와대 조리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요리집에는 메뉴판은 있으나 가격 표시는 없었다. 가격 보고 요리를 정하는 식당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날 먹은 요리는 한상차림이 아니라 한정식 코스 요리여서 종업원이 들락날락거렸다.
촌놈인 내가 이런 자리에 앉아 있으니 여간 불편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직업 정신을 발휘해서 최고급 요리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술 한 잔 사겠다는 제안에 선뜻 응했더니 이렇게 부담스러운 장소인지는 몰랐다. 대접이 고맙기는커녕 불쾌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계산을 할 때 엿들은 바로는 음식값으로 대략 30만 원 정도가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으나 태연한 척 내색은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백수였고 연애에 실패했으며 통장에는 20만 원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고급 요리집에서 그녀에게 투사한 불쾌한 감정은 내 자격지심이었던 셈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계획에도 없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전도연과 하정우가 출연한 << 멋진 하루 >> 였다.
멋진 하루
많으면 많고 적으면 적은 돈 350만 원.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떼인 그 돈을 받기 위해 1년 만에 그를 찾아나선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희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빌린 350만원을 갚기 위해 돈을 빌리러 나선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병운이다. 어느 화창한 토요일 아침, 초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희수는 경마장에 들어선다. 두리번두리번, 경마장을 헤매는 희수. 마침내 병운을 발견한다. 병운과 눈을 마주치자 마자 내뱉는 희수의 첫마디. “돈 갚아.” 희수는 서른을 훌쩍 넘겼다. 그리고, 애인도 없다. 직장도 없다. 통장도 바닥이다. 완전 노처녀 백조다. 불현듯 병운에게 빌려 준 350만 원이 생각났다. 그래서 결심한다. 꼭 그 돈을 받겠다고. 병운은 결혼을 했고, 두 달 만에 이혼했다.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하고 빚까지 졌다. 이젠 전세금까지 빼서 여행가방을 들고 다니는 떠돌이 신세다. 한때 기수가 꿈이었던 병운은 경마장에서 돈을 받겠다고 찾아온 희수를 만나게 된다. 병운은 희수에게 꾼 돈을 갚기 위해 아는 여자들에게 급전을 부탁한다. 여자관계가 화려한 병운의 ‘돌려 막기’에 기가 막히는 희수지만 병운을 차에 태우고 돈을 받으러, 아니 돈을 꾸러 다니기 시작한다. 한때 밝고 자상한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병운을 좋아했지만, 대책 없는 그를 이제는 더 이상 믿을 수가 없다. 1년 전엔 애인 사이, 오늘은 채권자와 채무자…… 길지 않은 겨울 하루, 해는 짧아지고 돈은 늘어간다. 다시 만난 그들에게 허락된 ‘불편한 하루’가 저물어 간다.
네이버 영화 소개에서 발췌
이 영화에는 잊지 못할 장면이 있다.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 남들에게는 스투디움인데 나에게는 푼크툼인 장면이 나온다.
하정우는 전철 안에서 전도연에게 말한다. " 어느 날인가 티븨에서 효도르를 봤어. 생긴 거나 몸매는 착한 옆집 아저씨 같은데, 수줍은 표정으로 링 위에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다가 경기가 시작하니까 사람이 막 변하더라고. 난,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싶더라고....... 링에서는 천하무적인데 밖에서는 불쌍한 사람 도와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근데..... 꿈에 저 사람이 나왔어. 글쎄, 한국말을 하더라고. 너 괜찮아. 많이 힘들지. 막 그러는 거야. 그 말에 나...... 막.... 가슴이 벅차서 내가 그에게 말했지. 당신만 있으면 난 괜찮아. 그리고는 한동안은 정말 신기하게도 괜찮아지는 거야. "
그 철없는 이야기에 전도연은 전철 안에서 소리없이 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전도연이 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괜찮아 ? 많이 힘들지 _ 라고 말해주는, 이 형식적인 위로가 때론 위로가 된다는 사실. 하찮은 위로에 위안을 얻는 그런 날. 영화를 본 탓일까. 그날 내 꿈에 효도르가 나왔다. 하정우의 말처럼 생긴 거나 몸매는 착한 옆집 아저씨 같은데 가까이 다가오면 위협적인 사람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그는 이제 곧 나에게도 다가와서 유창한 한국말에 " 너 괜찮아. 많이 힘들지 ? " 라고 말하리라. 그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심 기대에 찬 시선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러시아 말로 이노무새끼저노무새끼시모노새끼자지깔까 _ 라고 하더니 지나쳐갔다. 라이터( зажигалка 좌지깔까) 있냐 ? 뭐 그런 소리 같긴 하다만........ 시발놈, 어따대고. 피식, 웃음이 났다. 꿈이라는 게..... 참, 그래요. 후후 ■
내 꿈 장면은 재미를 위해 조미료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