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의 목숨, 한순간의 쾌락
속초는 생각보다 작은 도시'다. 택시를 타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간다고 했을 때 택시비는 5000원이면 족하다. 그래서 속초에서 머물 때 버스를 탄 기억이 별로 없다 1. 동네가 작다 보니 또래끼리는 한 다리 건너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힌 사이'다. 서로 인사하는 사이는 아니더라도 대충 누군지는 알고 있다. 심지어는 외지인에 속하는 나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내가 자주 가는 단골 식당 이름은 < 바다네 > 였다. 외동아들 이름을 따 지은 식당인데 보수적인 색깔을 가진 동네 사람들은 식당 주인 내외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아내는 식당을 운영하고 남편은 카센터를 운영했는데, 부부는 모두 진보 정당 당원이었다. 부부의 교육관도 튀었다. 외아들인 바다'만 봐도 그렇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바다는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긴 머리에 노란색으로 염색을 했다. 바다는 방과 후 드럼을 배우러 다녔다. 바다의 선택은 아니었다. 부모가 피아노 학원이나 태권도 학원 대신 드럼 학원에 보낸 것이다. 피아노보다는 다른 악기를 가르쳐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이는 말수가 거의 없었지만 나를 잘 따랐다.
거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아이스크림을 사 주고는 했으니까. 아이는 나를 부자라고 생각했다. 아이스크림을 사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부자라는 것이다. 피식, 웃었다. 부모가 바다에게 바라는 것은 딱히 없었다. 자유로운 바다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를 강원도 좌파 아저씨라고 부르곤 했다. 보궐 선거 때 진보 정당을 찍기 위해 잠시 서울에 내려가야 한다고 했을 때는 그는 진보의 승리를 기원하며 나에게 차비까지 주었다. 우린 종종 식당 문을 닫고 식당에서 술을 마셨다. 그때 강원도 좌파 아저씨가 내게 인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아무개 딸이 도시 나가서 병을 얻어 돌아왔다는 것이다. 아무개는 딸이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좋아라 했는데, 이만저만 슬픈 일이 아니었다고.
그 딸이 죽었단다. 병원 치료 받고 집으로 오는 길, 딸은 택시기사인 아버지가 운전하는 택시 뒷자리에서 숨을 거뒀다고 했다. 아버지는 딸이 덥다 해서 차창을 열고 춥다 해서 차창을 닫았다고. 그게 딸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고. 좌파 아저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슬픈 사연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이야기가 삼성 반도체 공장에 다니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황상기·황유미 부녀 이야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이야기는 << 또 하나의 약속 >> 이라는 영화를 통해 알려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영화는 실망스러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크라운드펀딩에 참가한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영화보다는 김수박의 만화 << 사람 냄새 >> 가 깊은 울림을 주었다.
만화에는 황유미 씨의 손글씨가 삽입되어 있는데 그 글씨체를 보는 순간 마음이 생강처럼 아렸다. 손목에 주저흔을 남긴 사람의 흉터를 보는 기분이었다. 죽은 사람이 쓴 글씨체는 항상 흉터로 다가온다. 황상기·황유미 씨 부녀가 삼성 반도체에게 요구했던 것은 소박했다.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산재 처리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국가로부터 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삼성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들이 툭, 내놓은 것은 500만 원이 전부였다. < 이건희 성매매 사건 > 보도 후,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를 돕고 있는 이종란 노무사는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죽어가는 딸 앞에서 삼성이 "이걸로 끝내자"고 딸의 병원비로 내민 500만 원... 치료비가 없어 그걸 뿌리치지 못해 눈물 흘린 유미 아빠 황상기씨는 9년 동안 삼성과 세상을 향해 삼성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이 처한 실상과 산재 사망을 알려왔다. 삼성이 온갖 수작으로 은폐하려 했지만 76명의 죽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삼성은 반성은 커녕 세상을 조롱하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회사의 비호하에 아무렇지도 않게 벌인 불법 성매매 (의혹) 뉴스를 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성매매 (의혹) 여성에게 건넨 500만원...유미와 유미아빠에게 삼성이 건넨 500만원은 조롱의 돈이다.
한사람의 목숨과 한순간의 쾌락이 동일한 값으로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서 삼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단체 교섭할 권리, 임금 협상할 권리 등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노조 경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삼성은 탈법을 넘어 초법적 기업인 셈이다. 사람 위에 헌법 있고, 헌법 위에 삼성이 군림하고 있다. 사람들은 삼성이 망하면 이 나라가 망한다고 걱정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업 하나가 망한다고 나라 전체가 망한다면 그런 나라는 차라리 망하는 게 낫다고 말하곤 했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삼성이 망해야 대한민국이 산다. 삼성은 반드시 망해야 한다. 노키아가 망했다고 핀란드가 망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열대야에 잠을 설쳤다. 잠시 후, 쏴아 ~ 비가 쏟아졌다. 열대야에 내리는 비는 더위를 식혀 주니 시인 두보가 말했던 호우(好雨)2 못지 않다. 아, 바다 보고 싶다. 내가 500원짜리 비비빅을 고를 때 항상 2000원짜리 프리미엄 아이스크림을 골랐던 아이. 가난한 내 주머니 사정은 고려하지도 않고, 그렇게 눈치도 없이 ■
1) 속초에 머물 때 제일 먼저 산 물건은 자전거였다. 속초는 자전거 하나면 어디든 갈 수 있다.
2) 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호우지시절 당춘내발생 수풍잠입야 윤물세무성 ; 단비는 시절을 알아차려 봄을 맞아 모든 걸 펴 나게 하네. 바람 따라 살그머니 밤에 들어와 만물을 적시되 가늘어 소리 없구나.)<두보杜甫 춘야희우春夜喜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