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象 :
백설공주 외전(外傳)
거울은 신기한 힘을 가졌다. 상(象)은 동일하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자신감이 넘쳤을 때 거울을 보게 되면 잘생긴 얼굴처럼 보이지만 우울할 때 거울을 보게 되면 못생긴 얼굴처럼 보인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즉, 象은 같지만 對象은 같지 않다. A ≠ a 다. 이 차이는 마음이 대상에게 투사된 예'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거울을 통해 보는 대상'은 시각 이미지라기보다는 지각 이미지(게슈탈트)에 가깝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인지상정이다보니 거울 속 대상이 잘생겨 보이면 " 나 - 답다 " 고 느껴지고, 반대로 못생겨 보이면 " 나 - 답지 않다 " 고 느껴진다.
전자는 거울 속 대상을 < 낯익은 것, canny > 으로 후자는 < 낯설은 것, uncanny > 으로 인식하게 된다. 나 - 답지 않다는 것은 " 내 안의 너 " 를 인식하게 된다는 소리이다. 농담 반 진담 반 섞어서 말하자면 " 거울 속 타자는 항상 못생겼다 " 거울 속 나는 자아이면서 동시에 타자이다. 그것은 시인 이상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현실 속 < 오른손잡이인 나 > 와 거울 속 < 왼손잡이인 나 > 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과 일치한다. 판타지를 다큐로 각색하자면 : 동화 << 백설공주 >> 에서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 거울 - 이미지 " 는 왕비의 불안이 만든 환시幻視요, 환청幻聽일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노화가 진행되는 육체를 보며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면 < 황홀한 남근 > 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왕비가 거울을 보며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_ 고 묻는 순간, 이미 그녀는 자신감이 결여된 상태가 아니었을까 ? 왜냐하면 자기 모습에 자신감이 있다면 굳이 자기와 타인을 비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꾸밈 > 은 자신을 향한 애정이면서 동시에 타자에 대한 의식'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자신을 치장할 필요가 없다.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못생겨 보일 때는 아름다운 대상을 본 이후라는 사실을 말이다. 동창회 모임에서 몰라보게 예뻐진 동창을 보고 났을 때가 그런 경우'다. 왕비가 거울에게 묻는 순간도 이와 같다.
왕비는 백설공주가 자신보다 예쁘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녀가 거울을 통해 보게 되는 백설공주 象은 거울 기계가 스스로 내린 판단 결과가 아니라 왕비의 마음이 투사된 결과'다. 거울은 평범한다. 왕비가 가지고 있는 거울이나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거울이나 똑같다. 그것은 말하지도 않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을 비추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 낸 환시요, 환청일 뿐이다. 그렇기에 왕비가 거울을 통해 본 실제 상은 자신이지만 왕비는 자신을 타자(백설공주)로 인식한다. 성형 중독에 빠진 사람의 심리는 왕비의 심리와 동일하다. 성형 중독에 빠진 사람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 얼굴에서 결핍을 본다. 이마는 손예진처럼 되었으면, 코는 심은하처럼 되었으면, 입술은..... 즉, 성형 중독에 빠진 사람은 거울에서 자기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닮고 싶은 타자를 열망하게 되는 것이다. 왕비는 성형 중독에 빠진 사람의 원형이다.
▶ 백설공주에서 왕비가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타자로 잘못 인식한다면, 오비디우스의 << 변신 이야기 >> 에서 나르키소스는 물 속에 있는 남자를 디오니소스로 인식한다. 왕비의 오류와 나르키소스의 오류는 동일하다.
거울에서 타자를 본다는 것은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던가 ? 나는 이 욕망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변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욕망에 가깝기 때문이다. 포유동물은 결핍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보려는 경향이 있다. 거울은 두 개의 상을 반사한다. 하나는 자신이며 다른 하나는 타자이다. 나는 타자이다(Je est un aut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