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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ㅣ 문학동네 시집 43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못 이야기
흉터는 신기한 힘이 있지 과거가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거든
_ 모두 다 예쁜 말들
어릴 때 사람들이 인형이나 로보트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어린 나는 망치를 들고 놀았다.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고사리손으로 나무조각에 잔못을 박던 기억. 하루 이틀이면 그려려니 했을 텐데 날마다 가게 구석에서 나무에 못을 박고 있으니 어머니는 걱정이 크셨다. " 커서 뭐가 되려고 ! " 가게를 오고가는 사람들도 망치질 하는 꼬마를 보며 궁금한 표정을 짓곤 했다(혹은 묻곤 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궁금할 것이다. 왜..... 그러셨어요, 네에 ? 사람들은 모른다. 못이 반듯하게 나무를 파고 들어갈 때 느끼게 되는 감동. 아버지는 아들이 못질을 할 때 손을 다칠까 봐서 푸석푸석한 나무와 목통(木桶)에서 잔못을 골라 내게 주셨다. 나는 그 나무토막이 못투성이가 될 때까지 못질을 했다. 사람들은 못질하는 꼬마의 행동을 목적 없는 유희'라고 생각했지만 내게는 분명하며 은밀한 목적이 있었다. 못투성이가 된 나무를 물이 담긴 세숫대야에 넣자 못투성이 나무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와아 ~ 철의 무게가 나무의 부력을 이긴 것이다.
비가 오는 밤이면 종종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연출한 << 길, La Strada, 1954 >> 이라는 영화를 본다, 그 옛날 습관적으로 << 아비정전 >> 을 보았듯이. 문득 깨닫게 된다. 이 영화는 여자 마음에 못질을 한 남자와 못이 박힌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그 옛날 물 속으로 가라앉은 못투성이 나무를 기억하며 회한에 젖는다. 못투성이가 된 마음은 얼마나 무거울까 ?
변두리 다방에 가서 앉는다. 종업원 아가씨는
두 잔의 커피를 가지고 와서 옆에 앉는다. 그 무렵부터
여자는 옷을 벗기 시작한다. 내게는 쉽게 벗는 것
처럼 보인다. 벗은 몸에는 여러 개의 못들이 박혀
있다. 들여다보면 못의 머리에는 남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반쯤 덜 박힌 못이
있다. 때로는 속옷이 걸려서 찢어진다고
그런다.
ㅡ 시집 <<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 , '못 이야기' 전문
변두리 다방에서 티켓을 파는 종업원 아가씨도 한때는 중력을 거슬러 오르는 생생한 부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를 읽다가 경찰의 성매매 단속을 피해 통영 앞바다가 보이는 모텔 6층에서 뛰어내려 죽은 여자를 생각했다. 세상은 불공평하지. 부자가 된다는 것은 부력을 가지고 가난뱅이가 된다는 것은 중력을 얻는다는 사실. 울컥 내려앉은 마음으로, 통영으로 내려갔다. 계획에 없는 여행이었다. 그녀가 뛰어내린 모텔 6층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부력을 잃은 여자를 생각했다. 17살에 딸을 낳고 24살에 죽은, 못투성이가 되어 가라앉은 한 여자. 그날 내 노트에 남긴 메모.
그녀에게
형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부끄럽지는 않았아요 어차피 내 生은 벌거벗겨진 몸이었으니까요 또래 친구들이 화사한 옷을 몸에 걸치고 사내를 만나러 갈 때 나는 낯선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야 했어요 내 새까만 거웃이 가난의 얼룩처럼 보여서 서러워서, 사내 앞에서 거웃을 가리던 때도 있었지요 16살에 집을 나왔어요 거리에서 생강처럼 작고 독한 남자를 만나 17살에 딸을 낳았지요 너무 어린 나이에 씨앗 품어 도사리 같던, 내 딸 그래요 형사 아저씨 돌이켜보면 내 生은 늦겨울 묵정밭에 핀 하얀 무꽃처럼 근근히 버티는, 삶이었어요 늙은 아비는, 허리를 다쳐 바닥에 눕고 딸아이는 저렇게, 해맑게 피어나고 나는 점점 웃음을 잃었습니다 통영 앞바다 새파란 남해가, 참 아름답네요 다, 내려놓겠습니다.
나는, 영화 << 길 >> 에서 짐승처럼 목 놓아 우는 짐파노를 이해한다. 깊은 밤 雨中. 내 못질 때문에 가라앉은 사람을 생각하며 목 놓아 운 적이 있다 ■
덧대기 ㅣ 정인의 뜨거운 안녕,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