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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어 영화
필립 루이에 지음 / 정주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가격은 상담 후 결정
애연가'라면 담뱃갑 속 담배라고 해도 각각 맛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중 맛있는 담배는 담뱃갑 속에 남은 마지막 담배 한 개비'이고, 마지막 남은 한 개비'보다 더 맛있는 담배는 남들은 다 떨어졌는데 나에게만 남은 한 개비'다. 희소성이 맛을 좌우한다.
애서가'도 같은 맥락이 적용된다. 매력적인 책은 절판된 책이고, 절판된 책보다 더 매력적인 책은 시중에는 절판되었으나 내 책장에는 꽂힌 책'이다. 나는 절판된 책이 중고 시장에서 겁도 없이 치솟을 때 겁나게 희열을 느끼고는 했다. 그래, 이 맛이야 ~ 프랑스 영화잡지 << 포지티브 >> 에서 비평가로 활동했던 필립 루이에가 쓴 << 고어 영화 : 피의 미학 >> 도 그런 경우'였다. 절판된 이 책은 허술한 내용과 허접한 만듦새'에도 웃돈을 주고 사야 되는 책이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내용은 부실해서 이내 실망하게 된다. 역자 서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내가 이 책을 번역한다는 소리에 나를 아는 이들은 모두 의아해했었다.
전쟁영화도 제대로 못 볼 만큼 폭력적인 것에 민감한 나이고 보면 그럴 만도 하다 ” 라거나 “ 원서 중에 삽입된 사진들을 일일이 종이로 가려놓고 작업을 했다 ” 고 고백했을 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 무슨 남자가 스틸 사진 하나 제대로 볼 배짱이 없나. 역자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윤, 현, 옥. 윤현욱이 아니라 < - 옥 > 이라는 여성형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야 무릎 탁, 치고 아, 했다(불현듯 아픈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강경욱 대장항문과 치질 전문 병원을 찾았다가 알고 보니 강경옥 대장항문과 치질 전문 의사였을 때 내가 느꼈던 패닉 상태. 한끗 차이가 주는 수모의 무대. 미모의 여성 의사가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지. 당신의 항문을 보여주세요).
역자마저 구역질이 나서 눈살을 찌뿌리며 번역했다는 책, 번역자의 보람 따윈 개나 주고 번역료나 주세요.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 네크로필리아(시체애호증 환자)가 아니라면 책 속 사진 이미지'를 눈 뜨고 볼 여성은 별로 없으리라. 나는 책 속에 소개된 영화를 보기 위해서 사방팔방 흩어진 시네필들에게 연락했지만 헛수고였다. 영화는 물론이고 감독 이름도 생소하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구할 방도가 없었다. 이들 영화를 다시 보게 된 때는 바야흐로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였다. 유투브를 통해서 악명 높은 영화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거래되고 있었던 것이다.
포르노 영화를 즐겨 보지만 포르노 영화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마니아는 없듯이, 신체를 두 동강 내고 창자를 적출하는 영화가 좋다고 고백하는 마니아도 없다. 그러다 보니 알음알음 접선이 이루어진다. 고어 영화를 본다는 이유로 변태라는 지적을 받거나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억울한 측면이 있다. 고어 영화에서 두 동강 난 신체를 보며 낄낄거리는 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두 동간 난 신체 마술을 보며 낄낄거리는 크리스마스 전야의 마술 쇼 시청자도 이상하긴 마찬가지가 아닐까 ? 모 소설가의 말투를 빌리자면 고어 영화의 팔 할은 쓰레기'다. 인정한다. 하지만 영화의 팔 할도 쓰레기에 속한다. 그 사실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개똥 같은 영화를 욕하면서 보는 맛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매운 짬뽕을 찾는 심리와 같다. 도전하고 싶은 마음. 다음날, 캡사이신이 너의 괄약근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리라는 사실을 잘알고 있지만 참고 견디고 싶은 독한 오기. " 자신이 먹는 것이 짬뽕이 아니라 몰입이라는 사실도, 짬뽕 한 그릇으로 배를 부르게 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을 타이르는 중이라는 사실 " 1) 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 이 글을 읽고 나서 위에 언급된 세 명의 감독이 연출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말리고 싶다. 변태 같은 영화를 보는 게 취미라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개똥과 개떡 같은 영화는 < 피 > 하는 게 상책이다.
특히, 허셀 고든 루이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욕하면서 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할리우드 배우 엘렌 페이지가 십대 임산부로 나오는 영화 << 주노 >> 에는 양아버지와 주노가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 영화가 더 훌륭한가 아니면 허셀 고든 루이스 감독 영화가 더 훌륭한가를 놓고 설왕설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대뜸 소리쳤다. " 멍충아, 그래도 허셀 고든 루이스보다는 다리오 아르젠토'가 낫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개떡 같은 영화를 찾는 데에는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 같은 희소성 때문인 것 같다. 쓸데없는 고집과 지적 허세로 뭉친 과시욕이 만든 참사. 끝으로 이 책을 구하고 싶어 안달이 난 당신을 위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없는 책입니다. 역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듣보잡인 출판사의 편집 레이아웃도 얼마나 형편이 없던지요. 괜히, 웃돈 주고 책 사서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허허. 저는 이 책에 대한 별점으로 별 하나를 주겠습니다. 굳이... 장점을 찾자면 고어 영화 장르를 학술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을 뽑겠습니다. 끝으로...... 그래도, 거, 뭐냐. 명색이 고어 영화 마니아라면 웃돈을 주더라도 이 책 정도는 하나 소장하고 계셔야죠. 명색이 마니아인데. 허허. 염장이라뇨. 허허. 아니 무슨 염장을 지른다고. 에이, 이런 형편없는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무슨 자랑입니까...... "
후신 : 이 책에 대한 구입 문의는 비밀 댓글로, 가격은 상담 후 결정
1) 이병률 시 < 여전히 남아있는 야생의 습관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