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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밀리언 달러 베이비 : 풀슬립 일반판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외 출연 / 다일리컴퍼니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주먹이 운다
어떤 감독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영화를 만들고, 어떤 감독은 자신이 꿈꾸는 방식대로 영화를 만들며(펠리니), 또 어떤 감독은 자신이 말하는 방식대로 영화를 만든다(스콜세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걷는 방식대로 영화를 만든다.
- 누벨 옵세르바퇴르 중
한옥 양식의 고택(古宅)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기대보다 방 " 크기 " 가 작다는 점이다. 재작년, 아름다운 한옥의 대명사인 오죽헌'을 구경하다가 사랑방은 물론이고 안방도 크기가 작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 생각해 보면 : 임금의 처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기껏해야 현대의 중형 아파트 안방 만한 크기'이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대궐은커녕 소궐이다. 그런데 옛날 살림 규모를 감안하면 작은 집이 아니다. 지금이야 살림이 늘어나서 그렇지 옛날에는 살림이 무척 간소했다. 침대도 없고, 티븨도 없고, 냉장고, 쇼파 따위도 없었으니깐 말이다. 살림의 규모로 따지자면 작은 것은 아닌 것이다. 한옥은 살림이 간소해야 아름답다.
한옥에 온갖 살림살이를 꾸역꾸역 우겨넣으면 그것만큼 지저분해 보이는 집도 없다. 반면 양옥은 한옥보다 공간이 넓다. 그래서 살림을 가득 채워야 그럴듯해 보인다. 거실에는 쇼파가 있어야 하고, 양탄자도 있어야 하고, 식탁도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서 구색을 갖춰야 빈궁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한옥과 양옥의 차이이며 동양과 서양의 차이이기도 하다. 한옥은 최소주의(미니멀리즘)과 어울리고, 양옥은 그 반대 성향과 어울린다. 박정희의 산업화 정책 가운데 하나는 초가집을 없애고 서양식 주거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아파트였다. 주거 환경이 바뀌자 살림의 규모도 바뀌기 시작했다. 침대와 커튼도 있어야 하고, 식탁도 있어야 근사해 보이고, 쇼파도 있으면 금상첨화'였다.
다시 말해서 침대, 커튼, 식탁, 쇼파 따위는 사용자의 니즈(needs)에 따른 구매욕이 아니라 공간이 물물을 욕망하는 것이다. 당연히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는 < 돈 > 이 필요했다. 근대인에서 현대인으로 탈피한 한국인은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살림살이를 하나둘 장만하는 기쁨이야말로 즐거운 노릇. 하지만 이제는 집집마다 과도한 살림으로 몸살을 앓는다. 불필요한 살림은 넘쳐나고, 넘쳐나는 만큼 집의 내부는 점점 쪼그라든다. 사정 후 시든 뭣 같은 ! 장롱 속에는 입는 옷보다 입지 않은 옷이 더 많고, 대형 김치 냉장고 속에는 김치가 대형 냉장고 용량만큼 채워졌다가 여름이 되면 버려지기 일쑤'다. 과잉은 결핍만큼이나 불편을 준다. 아니, 과잉이 결핍보다 더 많은 불편을 초래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과도한 설명보다는 차라리 과감한 생략이 낫고, 과도한 감정보다는 절제된 연기가 더 감동적이다. 그리고 서사가 과잉에 빠지면 통속이 된다. 인도 영화의 특이점이 < 춤과 노래 > 라면 한국 영화의 특이점은 < 눈물 > 이 많다는 데 있다. 툭하면 운다. 여자만 흘리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조폭 코미디 영화도 마지막 무기는 눈물이다. 양아치 새끼들이 우니 난감하다. 한국 영화가 얼마나 눈물이라는 코드를 좋아하는가 하면 << 주먹이 운다 >> 는 영화도 있다. 아, 이 눈물의 과잉. 도대체....... 주먹은 어떻게 웁니까 ? 성대모사, 한 번 들어봅시다. 이런 영화들을 볼 때마다 살림살이로 가득 찬 좁은 집이 생각난다. < 눈물 > 은 타인으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표현 방식이다.
하지만 이 표현 방식은 세련된 상호 의례 작용이 아니다. 눈물은 대화로 상대를 설득하지 못할 때 사용하는 최후의 보루'다. 한국 영화가 눈물이 많다는 사실은 예술적 승화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에서 배워야 한다. 그는 영화를 만들 때 과잉보다는 절제를 선택한다. 집이 좁다면 차라리 살림을 최소화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그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쏟아냈지만 항상 적절한 수준의 제작비에 머물렀다. 그는 마이클 치미노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처럼 성공에 도취되어서 자기 분수를 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제작 규모를 무제한으로 키우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는 항상 적당한 규모의 예산 안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 정점이 바로 << 밀리언 달러 베이비 >> 다. 이 영화는 단순하고 명료해서 강렬하다. 조명도 간결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감독은 많은 조명을 원하지 않았기에 최소한의 조명으로 그림을 그렸고 배우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프랭키가 매기의 병실에 가서 그녀를 안락사시키는 장면은 이 영화가 왜 걸작인지는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감정을 최소화했다. 눈물은 없다. 조용한 참회와 침묵과 짧은 작별 그리고 신속한 결행이 전부였지만, 이 간결한 동선은 이 장면을 통속에서 구원했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신파가 아니라 신뢰를 보여주고 싶었다. 망설임 없는 빠른 결단은 늙은 프랭키'가 매기에게 보내는 변함 없는 신뢰다. 요즘 영화들은 집 안에 너무 많은 살림으로 인테리어를 꾸민다.
쇼파도 있고, 식탁도 있고, 장식장도 있고, 런닝머신도 있지만 정작 공간이 없다. 답답하고 산만할 뿐이다. 마찬가지다. 그 영화에 웃음도 있고, 감동도 있고, 교훈도 있고, 반전도 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영화들은 무수히 많다. 좋은 인테리어는 공간(空間)을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공간을 단순히 채우는 것은 좋은 장식이 아니다. 間 : 사이, 틈, 틈새, 결핍을 비어 있는 상태(空)로 최대한 살리는 것이 좋은 실내 장식이다. 영화도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