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사는 여자

 


                                               심순애1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눈이 멀어서  가난한 약혼자인 이수일을 버린 비정한 여자. 일베들이 보기에 심순애는 근대 이후 최초의 김치녀'이자 건축학개론판 첫사랑 쌍년'인 셈이다. 순애는 고민에 빠진다. " 사랑을 쫓자니 돈이 없고,  돈을 쫓자니 사랑이 우는구나. 수일 씨이~  몸은 떠나지만 마음만은 그대 곁에....... " 

순애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불타는 염통 대신 차가운 돈'을 선택한다. 벼락 같은 비수가 이수일의 염통을 관통한다. 원통할 뿐이다.  이어지는 이수일의 그 유명한 대사.  " 이런 신파 ~  놓아라,  순애 !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았더냐 ? " 이수일은 복수를 다짐한다.  " 순애, 보자보자 하니 날 보자기로 보는군. "  그는 스뎅 < 가위손 > 이 되어 돌아온다. 제2 금융권'인 산와머니(고리대금업자) 대표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아아. 한국 서사에서 돈 때문에 조강지남을 버리고 결혼한 여자의 일생이란 뻔한 결말, 잘되는 꼴을 본 적 있던가.  그녀는 수일 씨'를 잊지 못해 자살을 시도하고 결국 수일 씨는 순애를 용서한다는,  뭐얌. 이런 신파 ~   모두 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펼치는 < 이런 신파 > 에 눈물을 쏟을 때,  

심순애의 한복 치마저고리와 이수일의 양복 바짓가랑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었으니 자신을 평화학 연구자라고 소개하는 정희진'이다. 그는 << 여성의 몸, 그리고 명칭 >> 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성은 구남성, 신남성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여성은 구식 여성, 신여성으로 구분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몸을 근대와 진보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남성은 양복을 여성은 한복을 입는다거나, 은행 같은 사무실에서 사복을 입는데 반해 여성은 유니폼을 입는 것도 같은 경우다. 여성이 남성 공동체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남성 공동체의 번영과 몰락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다. 마치, 민족의 전통을 외치는 사람은 남성이지만 전통을 지키기 위해 제사 음식을 준비하거나 김치를 담아야 하는 사람은 여성인 것처럼.

 


복장 문화의 변천사로 보자면 한복 입은 심순애는 구식 여성'이고 이수일은 신문물을 접한 개화파2(신식 남성)다. 여기서 심순애가 순하지만 맹한 구석이 있는, 돈에 눈이 먼 어리석은 여성 캐릭터'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복 입은 심순애는 계몽(개간, 개량)의 대상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전근대를 상징하는 한복 치마저고리 입은 심순애는 미개한 땅인 처녀림이면서 처녀지인 셈이다. 평생을 삽질하는 데 인생을 바친 불도저 이명박 달인'이 환장할 만한 불모지다. 나무를 베고, 다리를 놓고 건물을 올려야 쓸모 있는 땅이 된다. 이 땅을 개간하는 주체는 남성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불도저(bulldozer)를 운전하는 것은 오로지 수컷3 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악극 끄트머리에 가서 스뎅 가위손 이수일 선생은 결국 병든 심순애를 받아들인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수일이 심순애를 받아들이기로 한 동인(動因)이다. 이수일은 심순애'가 자살을 기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남산 위에 철갑을 두른 소나무 같던 마음이 버들나무처럼 야들야들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수일은 김중배의 알반지에 눈이 멀어서 자신을 버린 심순애를 용서한 것일까 ?  내가 보기에는 심순애의 자살 행위는 상징적 허물 벗기'다. 허물을 벗는다는 점에서 심순애의 자살 몸짓은 개화(改化) 혹은 재생(再生)에 가깝다. 그녀는  혹독한 자기 징벌을 실천함으로써 더러운 몸( = 다이아몬드에 눈이 멀었던 그 옛날 심순애)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고자 한다는 메시지를 이수일에게 보낸다. 우리 순애가 이렇게 달라졌어요, 수일 씨이 ~  그 옛날의 순애가 아니랍니다.

순애의 자살 시도'는 포식동물이 너무 빠르거나 강해서 도망이나 싸움에서 승산이 없을 때 죽은 체하는 기능적 방어 기제'처럼 보인다. 포식동물은 대부분 꿈틀거리며 반항하는 먹잇감보다는 죽은 먹잇감에 대해서는 감시가 소홀해지기 마련인데,  죽은 척하며 도망칠 기회를 노리는 먹잇감은 운이 좋으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심순애의 자살 시도는 이수일이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란 위기감이 만든 일종의 기절인 셈이다. 상대방에게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죽으라 하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것이다. 이수일과 심순애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 신파 - 서사 > 로 보지 않고 팜므파탈이 지랄을 하는 < 악녀 - 서사 > 로 보자면 심순애는 항상 돈을 보고 짝을 선택하는 여성이다.

처음에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에 끌렸으나 김중배가 쫄딱 망하고 이수일이 신흥 부자로 새롭게 등장하자 심순애는 다시 이수일과 연결된다. 심순애의 자살 시도를 < 죽기 아니면 까무리치기 - 죽음 모방 > 으로 보자면 가능한 해석이다. << 신소설에 나타난 육체 인식과 형상화 방식 구조 >> 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영아가 쓴 << 육체의 탄생 >> 은 개화기 시대의 신소설'을 중심으로 < 근대의 몸 > 에 대해 분석한 책이다. 그녀는 신소설에 나타난 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성적 위협을 받거나 자살을 시도한다고 지적한다.


해피엔딩을 맞기 위해 신소설의 여자 주인공들이 가장 자주 쓰는 방법은 자살 시도이다. 그들은 성적 위협에 처했을 때 자살을 기도해서 위기를 모면한다........ 성적 위협의 순간에 여자 주인공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 무수한 고난을 잘 극복해 낸 데 대한 보상으로 가정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되찾아 행복하게 살게 된다. ( 273, 육체의 탄생) 

 

자신의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이수일에게 구원받는다는 점에서 " 심순애 - 몸 " 은 갱생, 개화, 개량, 개간된 신체'에 해당된다. 이런 신파의 대명사인 << 장한몽(이수일과심순애) >> 이 국내에 번안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 드라마는 여전히 신소설의 이런 신파'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여전히 계몽되어야 할 몸'이다. 사랑 혹은 복수는 반드시 변화 과정을 통과해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 영화 << 미녀는 괴로워 >> 에서 주인공 여성은 전신 성형을 통해 날씬한 미녀로 다시 태어난다. 그녀는 낡은 신체를 버리고 새로운 신체를 얻기 위해 수술대 위에 죽기 아니면 까무리치기로 눕는다. 심순애가 강물에 빠져 죽었다 살아난 것4과 같은 심인(心因)이다. 

제니와 심순애는 잠시 까무라쳤다가 눈을 뜬다. 쉽게 말해서 이런 식의 캐릭터 여성들은 죽기 아니면 까무리치기라는 점에서 죽어야 사는 여성들이다. 여성들이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위해 자살이라는 극단적 죽음 모방을 통해 남성에게 용서를 구하고 구원을 받는다면, 남성들은 해피엔딩을 얻기 위해 이처럼 위험한 도박을 하지는 않는다. 사내새끼의 허물은 굳이 벗을 필요까지는 없다. 사내새끼의 허물은 "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는 실수 " 이기 때문에 굳이 갱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 앗, 나의 실수 ! "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면 된다. 이처럼 똑같은 잘못을 해도 그 잘못에 대한 반성 레베루는 남성과 여성이 전혀 다르다. 남성은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을 수 있지만 여성은 말로는 빚을 갚을 수 없다.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니미... 이런 신파 ~ 한국 여성은 죽어야 산다 ■ 

 

 



 

  1. 주인공 이수일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아버지의 친구인 심택의 집에서 자라나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심순애와 혼인을 약속한다. 어느 정월 보름날, 심순애는 김소사의 집으로 윷놀이를 갔다가, 거기에서 대부호의 아들인 김중배를 만난다. 심순애에게 매혹된 김중배는 다이아몬드와 물질 공세로 심순애를 유혹하였고, 심순애의 마음은 점점 이수일로부터 멀어져간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수일은 달빛 어린 대동강가 부벽루에서 심순애를 달래보고 꾸짖어도 보았으나, 한 번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여자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울분과 타락 끝에 고리대금업자 김정연의 서기가 된 이수일은 김정연의 죽음과 함께 많은 유산을 받게 된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 심순애는 대동강에 투신자살하려다가 이수일의 친구인 백낙관에게 구출된다. 결국, 두 사람은 백낙관의 끈질긴 설득으로 다시 결합하여 새 출발을 하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한몽 [長恨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장한몽은『매일신보』에 연재된 신문소설로서 전편[上]이 1913년 5월 13일부터 10월 1일까지, 속편[中·下]이 1915년 5월 25일부터 12월 26일까지 연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한몽 [長恨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bull : 황소
  4. 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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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5-11-29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석까지... 논문입니까? ㅋㅋ 논문 잘 읽었어요. 연구 조금 더 보태서 학위 받으셔야겠소. ㅎㅎㅎ 여성학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을 듯해요. 서민씨랑 두 분은 잘 해내실 듯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11-30 13:53   좋아요 0 | URL
주석이 있어야 뭔가... ㅎㅎㅎㅎ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ㅎㅎㅎㅎㅎㅎ.

cyrus 2015-11-29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크레치아는 로마 황제의 아들 섹스투스에게 능욕당하고 복수를 결심하고 자살했어요. 루크레치아의 남편이 이 사실을 알고, 반란을 일으켜서 공화정을 세우게 되죠. 그녀의 억울한 희생이 로마의 역사를 바꿨어요. 나중에 중세의 역사가들은 그녀를 여걸로 평가합니다. 그녀의 고귀한 희생이 강조되다보니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성적 폭력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밀려나고 말았어요. 남성 역사가들은 섹스투스의 강간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는 실수’로 여겼을 거예요. 억울한 여성은 죽어야 사는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11-30 13:57   좋아요 0 | URL
오, 섹스투스 하시길래 지어낸 농담이구나 했는데 섹스투스가 원래 있는 인물이군요.
종종 한국 현대사도 보면 자살에 따른 파장이 어마어마했죠.
군사정권이 무너진 이유도 몇몇의 자살 파장이 큰 영향을 미쳤다 생각되더군요...

표맥(漂麥) 2015-11-29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사랑 쌍년`에서 빵! 터졌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11-30 13:58   좋아요 0 | URL
건축학 개론에 보면 왜 나오는 대사 아닙니까... ㅎㅎ.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