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에서 : " 댁들은 이유
가 있어서 오리를 죽였나 ? "
조용한 남자, 그가 인적이 드문 호숫가에서 사제 총으로 사격 연습을 한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오리 사냥꾼(들)이 총소리를 듣고 그에게 다가온다. 깃털처럼 가볍고 하얀 조약돌보다 반짝거리는 조립식 플라스틱 권총.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고 묻자 조용한 남자는 심드렁하게 대통령을 암살할 생각이오, 라며 조용하게 대답한다. 오리 사냥꾼이 의아한 듯 묻는다. " 왜요 ? " 조용한 남자'가 말한다. " 댁들은 이유가 있어서 오리를 죽였나 ? " 주고받는 눈빛. 낌새가 이상하다 싶더니, 아니나 달라. 조용한 남자는 아무 이유없이 질문을 던진 오리 사냥꾼들을 죽인다. << 특전U보트 >> 에서 " 아날로그 - 사일런뜨 - 배틀 - 악숀 - 쓰릴러 " 를 선보여서 재능을 인정받은
볼프강 페터젠 감독이 만든 << 사선에서 / 1993 >> 라는 영화에서 꽤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이다. 존 말코비치, 특유의 뚱한 눈빛'이 압권인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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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 IN THE LINE OF FIRE / 1993 >> 인데 " 탄도 彈道 범위 안에서 " 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 사선 射線 " 을 의미이니 < 블레이드 러너 > 가 < 다이하드 > 하는 상황이다. 저잣거리 입말로 표현하자면 "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서 " 다. 신파와 통속을 좋아하는 한국인 취향으로 간을 맞추자면 " 눈보리가 휘날리는 흥남 부두 같은 곳 " 이 바로 < line of fire > 이다. 무엇보다도 타이틀 네이밍'이 절묘한 구석이 있다. < 사선 > 은 < 사선 射線 : 쏜 탄알이나 화살이 지나가는 선 > 으로 해석되지만 동시에 < 사선 死線 : 죽을 고비 > 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스릴러 영화에 딱 맞는 제목이다. 오리지날 제목을 그대로 살린다고 " 라인 오브 파이어 " 라고 했다가는 " 헬 오브 지옥 " 이 될 뻔했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 제목이 자꾸 < 사선 斜線 : 한 평면 또는 직선에 수직이 아닌 선 > 으로 읽히면서 그 옛날, 내가 군생활을 했던 부대의 야외 사격장'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사격장이라는 곳이 대부분 외진 산을 깎아 만들었기에 경사가 심한 곳이었으니, 야외 사격장은 사선 射線이면서, 사선 斜線이면서, 사선 死線이었다. 문제는 군내 모든 얼차려'는 이곳에서 벌어졌다는 점이다. 영내 : 부대 내 건물 와 떨어진 야외였으니 감시의 사각지대'였다는 점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얼차레는 일단 이단옆차기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상처 노출이 쉽게 되는 얼굴과 팔 다리를 제외하다 보니 주로 가슴이 표적이었다. 군홧발이 가슴을 향해 날아오면, 히마리없는 발차기'에도 예의상 뒤로 나뒹굴었다가 용수철처럼 되돌아와야 했다.
우리 모두 오뚜기'가 됩시다. 오 ! 이 퍼포먼스야말로 밥풀때기 상사를 하늘 같이 섬겨야 하는 부하 된 도리였다. 한참 매타작을 하고 나면 다음은 대가리 박기'라는 얼차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평지가 아닌 사선에서, 높은 경사면에 다리를 올리고 낮은 경사면을 향해 머리를 박는다는 것은 상상 그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체중이 온통 아래로 실리다 보니 머리통에 쏠리는 고통은 평지보다 3,4배 정도 가중되었다. 목이 부러지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부들부들 떨다가 피식 무릎을 꿇으면 팟, 군화로 무장한 군발의 우아한 로우킥이 가슴을 향해 날아온다. 최고참이 질펀하게 다구리를 놓고 그 자리를 떠나면, 얼차레를 받던 바로 아래 기수가 머리를 털며 일어난다. 호랑이 떠난 자리에는 늑대가 대빵인 것이다.
그러니까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어서 더 심한 2차 다구리를 놓는 것이다. 1차 피해자가 떠나면 2차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2차 피해자가 떠나면 3차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방식. 호랑이가 떠난 왕좌는 늑대가, 개가, 고양이가, 너구리가 그 자리를 차지해서 오리 사냥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선에서 벌어지는 참극이었다. 결국 끝까지 남는 병사는 가장 계급이 낮은 두 부류였다. 당시 나는 계급 서열이 가장 낮은 신병이었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 바로 위 기수'가 내게 물었다. " 오늘 왜 집합(얼차레)이 걸렸는지 아나 ? " 이 질문에 답은 뻔했다. " 저희 기수가 군기가 빠져서 그렇습니다 ! " 하지만 바로 위 기수는 이렇게 말했다. " 이유가 있어서 집합을 걸지는 않아. 이유가 없으면 이유를 만들어서 집합을 걸지.
대가리 박아, 개새끼들아 ! "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 이유없이 맞아야 할 때 느끼게 되는, 바짝 쪼그라드는 낭심이 내 전립선을 건드렸다. 사격장'이라는 사선에서는 늘 그 느낌이 들었다. 반성은 없었다. 나 또한 대가리에 밥풀때기'가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이유를 만들어서 집합을 걸고는 했다. 내 하이킥과 로우킥이 우아하게 어린 병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이유는 없다. 이유는 만드는 것이다. 한가로운 주말 오후, 영화 << 사선에서 >> 를 보다가 존 말코비치가 인적이 드문 호숫가에서 오리 사냥꾼에게 한 말'을 듣다가 느닷없이 옛 생각이 났다. 이이이이유가 있어서... 지지지지지지집합이 걸리지는느느느느느느느느... 않아... 이유유유유유유유율 만들면 되니까까까까까가가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먼저 원인과 이유를 찾는 데 골몰한다. 서사'를 기승전결로 매조지하려는 본능은 스토리텔러'인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습관이다. 그렇기에 " A 원인은 B 때문이다 " 라거나 " C의 이유는 D 라는 데 있다 " 라고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서사'는 많은 수가 원인과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다양한 우연과 필연적 요소가 복잡하게 섞이다 보니 딱 꼬집어서 이것이 원인이다, 라고 하기에는 무리인 측면이 있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유가 불분명할 때에는 이유(원인)를 일부러 만들어낸다. 왜 ? 그래야 그 짓으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 비만 > 과 관련된 코칭 사업'이다. 비만 현상'은 간단하다. 많이 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만을 단순하게 많이 먹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말하면 돈벌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말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멘토, 힐링, 코칭 전문가는 당신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때에만 유지되는 직위'다. 그래서 비만과 관련된 멘토, 힐링, 코칭 전문가들은 온갖 잡다한 이유(원인)을 만들어내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저녁 6시 이후에 밥을 먹기 때문에 체중이 늘고, 기름진 음식을 먹기 때문에 체중이 늘고, 과일 당도를 무시하다가 체중이 늘고, 트랜스 지방이 쌓이면 몸이 트랜스 지방을 원하게 되어 체중이 늘고, 과도한 음주 문화 때문에 체중이 늘고, 낮은 회식 자리 때문에 체중이 늘고, 좌식 문화가 체중을 늘린다며 전문가다운 진단과 처방을 내린다. 내가 아, 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아아, 하시면 됩니다. 아셨죠 ?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먹은 만큼 찐다. 그러니 음식량을 줄이면 된다. 어떤 결과에 있어서 너무나 자명한 사실은 원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당위 當爲 일 뿐이다. 하지만 전문가는 이 원인을 수백 개로 늘려놓는다. 그래야 돈벌이가 가능하니까. 2015년 재보궐 선거에서 성완종 악재'에도 새누리가 대승을 거두고 새천년'이 전패를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 언론은 민심의 냉혹한 심판이라며 원인과 이유를 찾느라 온갖 것들을 내놓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원인과 이유는 없다. 언론은 그럴싸한 원인과 이유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굳이 원인을 찾는다면 대한민국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데 있다. 내가 보기엔 30도 정도 기울어진 운동장 같다. 아랫동네 팀원들은 노동자, 여성, 비정규직, 노인, 지방대 출신'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 염통이 아무리 쫄깃쫄깃하다 해도 체력 소모는 윗동네 팀원의 2,3배'다. 조금만 뛰어도 턱, 턱 숨이 막힌다. 이러한 환경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두고 전략 부재'라거나 체력 부족을 원인으로 뽑는 것은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대한민국은 사선 射線이면서, 사선 斜線이면서, 사선 死線인 곳이다. 이 탄도 彈道 는 술에 취한 운전자가 160킬로로 달리는 자동차이기도 하고, 사전 통보 없이 날아오는 해고(fire) 통지서이기도 하다. 동시에 사선에서 공을 차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그곳에서 대가리를 박기도 한다. 낭심이 쪼그라들며 피가 쏠리지만 견딜 수밖에 ! 호랑이가 없으면 늑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늑대가 없으면 너구리가 차지하고, 결국에는 고슴도치인 나도 참고 견디면 그 자리를 차지하리라. 그런 믿음으로 견딘다.
고슴도치가 너구리를, 늑대를, 호랑이를 비난하지 않는 것처럼, 오리는 오리 사냥꾼에게 투표를 한다. 내 머리를 털고 일어나면 토끼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대한민국은 분풀이 사회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대한민국이 차지한 불명예 1위는 총 46개이며 2위는 열 개 남짓이다. 이 정도면 OECD 회원국의 이디오피아'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몇몇 리스트만 소개하면서 끝내기로 하자. 대한민국이 왜 기울어진 운동장인가는 이 리스트를 읽다 보면 깨닫게 된다. 자살률 1위, 산업재해 사망률 1위, 가계부채 1위, 남녀 임금격차 1위, 노인 빈곤률 1위, 청소년 흡연율 1위, 저출산율 1위, 가장 낮은 최저 임금 1위, 저임금 노동자 비율 1위, 인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 1위, 어린이 교통 사망률 1위, 학업 시간이 가장 높은 국가 1위, 낮은 환경 평가 1위, 낮은 어린이 행복지수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