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아토포스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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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 앞에서 굶주림을 논하기


옛날에는 동전을 닦았다면 요즘은 책을 닦는다. 말 그대로 책 겉표지를 닦고 있다. 6월에 이사 예정이어서 시간 날 때마다 미리 조금씩 조금씩 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강력 세제에 물을 타 마른 수건으로 묻힌 다음 표지를 닦았는데 부작용이 발생했다. 그러니까, 음, 그거시, 뭐냐, 흠흠, 그러니까, 음, 그거시, 뭐냐, 거시기, 흠흠 ...... 책'에서 피가 나는 것이 아닌가 ? 한겨레 출판사에서 출간된 홍세화의 << 빨간신호등 >> 이란 책을 온힘을 다해 박박 닦고 있는 데 갑자기 빨간 피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얼룩이려니 생각하고 더욱 힘차게 닦았는데 오히려 더 번지는 것이었다. 책이, 상처입은 것일까. 알고 보니 강력 세제의 세척력이 강해서 빨갛게 인쇄된 글자가 녹아서 번진 것이었다.

 

실수를 반면교사 삼아서 여러 세정액으로 실험한 결과(빨래비누,샴푸,린스,클렌징폼,비누 따위), 책을 닦는 데 가장 적합한 세제'는 빨래비누'였다. 특히 거품이 많아서 책을 닦는 맛이 탁월했다. 머리를 감을 때 거품이 많아야 머리를 감는 느낌이 나듯이 말이다. 그렇다, 나는 타고난 남자 아저씨'였던 것이다. 따로 준비한 마른 걸레로 거품을 제거하고 나면 하얗게 오른 표지가 뙇 ! 시바, 이 맛에 책을 닦는다. 책만 닦지는 않는다. 책을 닦고 나면 책을 펼쳐 내용을 훑는다. 이런 표현이 외설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 내 독서 행위와 섹스 행위'는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하드커버인 경우는 포장지가 양장본을 감싸는 경우가 많은데 읽기 전에 항상 벗겨서 안을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포장지를 벗겨내는 행위는 마치 브래지어의 훅을 딸 때 느끼게 되는 손맛과 비슷하다. 출렁거리는 속살을 보게 되면 아, 하게 된다. 그 다음은 속을 보기 위해 책을 펼친다. 독서는 몰입이 주는 쾌감에 속한다. 정신이 산만한 사람이 독서를 따분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몰입의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속을 샅샅이 훑을 때 느끼게 되는 쾌감은 짜릿하다. 섹스도 몰입이 주는 쾌감에 속한다. 속을 샅샅이 핥을 때 느끼게 되는 쾌감은 말 안 해도 다들 아시리라. 모르면 당신은 뽀로로요, 텔레토비'다 (너무 많이 알면 빨갱이다).  행복한 독서와 즐거운 섹스의 공통점은 속을 제대로 파악할 때 비로소 아, 아아아아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자리가 책의 에로스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는 아니니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책의 씻김굿 작업 틈틈이, 그 전에 시간이 부족해서 발췌독을 했던 진은영의 << 문학의 아토포스 >> 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발췌독에 따른 오독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독후(讀後)한 감(感)은 괜한 군걱정이라는,  씁쓸한 느낌'이었다. 물론 이 책이 교양 수준이 높은 고급 독자를 겨냥했다는 것을 감안한다 해도 쓸데없는 지식인의 과도한 자의식이 깨알처럼 박혀 있어서 읽는 내내 불편했다. 기형도의 시어'를 빌리자면 < 깨 > 란 내부의 빈곤을 숨기기 위해서 뿌리는 저렴한 음식 데코레이션이 아닐까 ? 유시민도 << 글쓰기 특강 >> 에서 잠시 이 책을 언급한 모양이다( 나는 읽지 않았다. 지나가는 바람이 귀뜸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글쓴이 자신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지만 독자는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을 너무 많이 썼다(249쪽) "

 

 

자기 생각은 없고 온통 바깥 세계에서 빌려온 사유로 내부 세계를 진단한다. 12월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낯선 외국인 이름이 쏟아져내릴 때는, 아 ! ......  아찔한 맛도 선사한다. 이 장탄식은 내 무식이 탄로났을 때 느끼게 되는 좌절감 비스무리한 탄식이었다. 랑시에르의 사유 없이는 당대를 분석할 수 없는 것일까, 리오타르 없이는 숭고한 대상을 언급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알파벳으로 구성된 단어의 조합 없이는 단 한 문장도 완성시킬 수 없는 것일까 - 궁금하다. 이 책 제목인 << 문학의 아토포스 >> 에서 " 아토포스 " 를 대체할 마땅한 표현이 없기에 인용했다고 쳐도, 굳이 " 시대착오 " 라고 하면 될 것을 " 아나크로니즘 "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자세는 지적 허세'로 보인다. 내부의 빈곤을 감추기 위해서 깨를 뿌리지는 마시라. 맛으로 승부합시다(소제목만 나열하기로 한다 : 5장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모럴, 6장 문학의 아토포스, 7장 시, 숭고, 아레테, 8장 니체와 문학적 코뮤니즘, 9장 문학의 아나크로니즘) !

 

이 책은 마치 서양식 만찬을 즐기면서 한국의 결식 아동에 대해 심오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처럼 보인다. 캐비어 좌파의 만찬이라고나 할까 ?  수사는 화려한데 메시지는 없다. 구호는 거창한데 진심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당대를 이야기하면서 막상 끌어다 쓴 글감은 현해탄과 태평양 너머의 재료뿐이다. 그는 낮은 눈높이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뜬구름 위에서 뒷짐 지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설상가상, 신형철은 이 책에 대한 발문을 썼는데 " 이미 거의 아름답다고 해야 할 정도로 명징한 논증을 구사하고 있 " 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기사, 그가 써온 평론치고 달달하지 않은 글이 있었던가 ? 목수가 도끼를 든 장인이라면 문학평론가는 화살을 든 장인이다. 신형철이라는 스타 평론가의 연장통이라 할 만한 화살통 안에는 온통 달달한 큐피드의 화살뿐이다.

 

정작 평론가가 갖추어야 할 날카롭고 정직한 화살촉은 없다. 이 발문은 마치 진은영이 본문에서 신형철의 평론 << 아름답고 정치적인 코뮌 >> 을 언급한 것에 대한 화답처럼 보인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동업자 정신이 한국 문학을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한 꼴이 아닐까 ? 시를 읽지 않거나 문학 평론을 읽지 않는 시대를 한탄하기에 앞서 독자와 소통하려는 진지한 자세에 대한 언급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 진은영과 신형철의 글을 읽다 보면 담담하고 소박하지만 강직하며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가진 이명원의 글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명원은 << 마음은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 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학의 자율적인 체계를 지닌 예술이라는 통념에 대해서는 줄기차게 강조하는 평론가들이, 제도화된 영역에서의 문학평론가라는 것이 분명한 직업이며, 그에 걸맞는 치열한 직업윤리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편의적으로 눈을 감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함량 미달의 작품들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친소관계나 이해관계, 혹은 경영상의 이유 때문에 대단한 작품인 양 뻥튀기 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일반 독자들이 읽어보아도 한갓 연애담이나 성 경험 고백서에 불과할 작품들을 초월적이니 비의적이니, 혹은 존재론적 고뇌니 하는 거창한 수사로 포장하는 미학적 사기가 횡행화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들이 이 집단적인 거간꾼의 자세에서 탈피해야 한다

 

- 마음은 소금밭인데, 113쪽


<< 문학의 아토포스 >> 을 읽다가  책을 덮고,  <<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 를 발췌독으로 다시 훑는다. 느끼하지 않아서 좋다. 칼칼한 김칫국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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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5-05-0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식 만찬을 즐기면서 한국의 결식 아동에 대해 심오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 아 진짜 이 책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이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문학의 아토포스˝는 2014년에 나온 책 중 최악의 리스트에 올라갈 만한 책이라고 봅니다. 저는 무슨 평론화된 조경란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5-01 12:05   좋아요 0 | URL
제가 쓴 문장이지만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책 읽고 나서 딱, 드는 생각이 저거 였습니다.
서양식 만찬을 즐기면서 독거 노인이나 결식 아동 가정에게 김장을 보낼 계획을 하는것 같은 그런 느낌...

stella.K 2015-05-01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곰발님은 안 좋은 책에 대한 리뷰도 외설과 예술을 오가며 잘 쓰시는 것 같아요.ㅋ
저는 안 좋아하는 책은 아예 리뷰를 불허하거나 하게되면 직설적으로 까던가 그러는데...ㅠ
저는 이 책 별로 끌리지 않았는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 표지가 맘에 안 들더군요.
표지가 확실히 그 책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좌우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피 흘리는 책은 또 첨 보겠습니다. 그런데 세제가 문제였군요.
그런데 곰발님은 책을 정말 사랑하시는가 봅니다. 전 아무리 좋아해도 세제로 닦을 생각은
못하거든요. 전 말로만 책 좋아하지 가만 보면 방치하는 거나 다름이 없어요.
방치는 무관심 보다 더 안 좋은 거 같아요.ㅠ

곰곰생각하는발 2015-05-01 13:08   좋아요 0 | URL
오죽했으면 닦겠습니까. 이사할 때마다 폭우가쏟아져서
아주 책이 뗏국물이 철철 흘렀습니다.
이사할 때가 되니 시간 날 때마다 먼지 좀 털어낼 겸 해서
닦고 있습니다. 포장이사는 그냥 포장만 하지 먼지까지 털지는 않지 않습니까....

빨래비누물에 마른 걸래로 묻혀서 함 닦아 베숑..보세요.
의외로 짜릿합니다.
ㅋㅋㅋ

비로그인 2015-05-0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닦기를 이렇게 에로틱하게 표현하신것에 꽂혔습니다!! 저도 중고책 표지를 자주 닦는데 이젠 닦을때마다 곰발님 글이 생각나겠네요 ㅋㅋ 평가하신 책은 읽어보질 못해서 패스 ... 전 소양이 부족해서 곰발님 글을 읽으면 항상 주변얘기나 특정표현에만 집중하게 되네요...근데 그게 더 재밌어요...
눈높이가 낮은(다른) 사람에게도 재밌게 읽히는 글을 써주시는게 너무 좋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5-01 17:28   좋아요 0 | URL
제가 한 < 닦기 > 합니다. 제가 워너비 님보다 지적 수준이 더 낮을 겁니다. ㅎㅎㅎㅎ
제 아이큐가 98인가 그렇습니다.
또래애들이 두 자리 아이큐라고 더럽게 놀리고는 했는데 말이죠.. ㅋㅋ

닦는 게 취미라서 그러는데 뭘로 닦으십니까 ?

비로그인 2015-05-01 20:48   좋아요 0 | URL
가전기구 닦으려고 한박스 사놓은 유한그린텍의 <마법의 항균 청소박사>요.ㅎㅎ
마치 책 제목같은데 그냥 물티슈같은겁니다. 이걸 조금 말려서 닦으면 책이 많이 안젖고 시커먼 때가 잘지워지더라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5-02 07: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고급 정보로군요. 당장 닦아보도록 하겠스비다.

dddddd 2019-11-0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책도 안봤는데 리뷰 글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당

WifeOf센프라우드 2023-04-27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큐가 98이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