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3시간 정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상품권 두 장'이 있어서 시내 나온 김에 서점에서 옷을 사고 옷가게에서 책을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뒤틀린 심사'가 나를 찾아왔다. 똑 ! 똑 ! " 곰곰생각하는발 씨입니까 ? 저는 뒤틀린심사'라고 합니다. 보아 하니,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고, 애인도 없는 주제'에 무슨 얼어죽을 옷 쇼핑입니까 ! " 뒤틀린심사 씨'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옷 살 돈으로 책을 사기로 하고는 서점으로 가서 책을 골랐다. 이때 뒤틀린 심사'가 또 찾아왔다. 똑 ! 똑 ! " 지금 당신 책장에는 읽지 않은 책이 200권이나 됩니다. 좋소,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지지난번 책 잔뜩 사고 나서 술 퍼마시다가 책 두고 온 기억 안 납니까 ? 오늘도 그 짓'을 반복할 거요 ? "
맞는 말이었다. 꼴뚜기처럼 탱탱한 다리로 집을 나와 ( 술에 취해 )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며 집에 들어갈 때마다 거리에 두고 온 책이 한두 권이 아니었다. 지지난번에는 책을 담은 봉투를 통째로 놓고 온 적도 있었다. 결국 애초에 계획에도 없던 영화를 보기로 했다. 선택은 없었다. 조건에 맞아야 했다. 약속 시간 전에 상영이 끝나는 영화를 찾기 위해 상영 목록을 훑었다. 조건을 충족시키는 영화가 몇 있었으나 두 편은 매진이 된 상태였고, 다행히 나머지 한 편은 좌석 점유율이 높지 않았다. 그 영화가 바로 << 명량 >> 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2000만을 향해 달리는 영화에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텅 빈 상영관 안을 보니 우후죽순처럼 흥행 돌풍을 이어가던 명량 울돌목도 이젠 끝물이 되어 잔잔한 물결이 된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삐딱한 자세로 감상했다. 영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웠다. 툭 까놓고 말해서, 최민식은 훌륭한 배우이지만 아무리 훌륭한 배우라고 해도 몸에 맞지 않는 감투를 쓰면 어색한 연기를 펼칠 수밖에 없다. 딱 잘라 말해서, 이 영화에서 최민식은 성웅 이순신을 완벽하게 재현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배우 최민식'을 도드라지게 드러내지도 못했다. 갈팡질팡하다가 끝난 느낌이었다. 그뿐인가 ? 서사는 영글지도 못하고 떨어진 " 도사리 " 같았다. 얼개가 엉성하다 보니,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카메라는 시도 때도 없이 " 영웅 숏 ( 로우 앵글 ) " 만 남발했다. 카메라는 별다른 고민 없이 무조건 최민식에게 접근했다.
마치 사생팬처럼 말이다. 1700만 관객 대부분은 영화 속 명장면으로 이순신 장군이 " 의리 " 를 말하면서 " 충 " 을 논하는 장면을 < 백미' > 로 뽑던데, 내 눈에는 < 흰쌀 > 로 만든 죽이 너무 맑아서 군침이 돌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인상 깊지 못한 장면이었다. 오히려 최민식이 " 의리 " 를 논할 때 김보성'이 입만 열었다 하면 내뱉는 " 으리 " 가 떠올라서 웃겼다. 김훈의 문장을 훔치자면 " 의리가 곧 으리'다. 의리에 살고 으리에 죽고, 으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 둘은 같은 말 " 이었다. 웅장한 사극에서 따끈따끈한 최신 유행어'를 듣고 있자니 쪽대본으로 실시간 편집되어서 올라오는 일일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티븨 일일드라마가 무쳐서 바로 먹는 겉절이' 맛으로 본다면 그것이 쪽대본의 강점이다. 시청자 반응을 실시간으로 드라마에 반영한다는 점이 대한민국 쪽대본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무기이지만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묵직한 된장 같은 맛을 내야 한다. 최신 유행어가 생중계되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더군다나 코미디 장르가 아니라 사극이 아니었던가 ! 조선 진영도 웃기지만 일본 진영도 웃기기는 마찬가지'였다. 악당이 매력 있어야 영화가 성공한다는 점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 후까시 " 를 넣으면 좆된다. 구르지마'를 연기한 유승룡에게는 " 우마미うま味 감칠 맛 " 가 없다. 김한민 감독의 전작 << 활 >> 에서 선보인 몽골 장군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캐릭터여서 신선한 맛이 떨어졌다.
아드레날린이 박연 폭포처럼 쏟아지는 폭력 만화 속 악당 같다. 웃을 때 48폰트 굵은 고딕체로 크크크크크, 웃는 ! 도대체 조진웅과 류승룡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성웅 이순신을 띄우기 위한 얕디얕은 꼼수처럼 보인다. 전반부는 그렇게 흘렀다. 전반부를 감상한 100자평을 날리자면 : 감동하기는커녕 수많은 영웅숏과 왜군의 " 크크크 " 에 " ㅋㅋㅋ " 웃었다. 후반부는 그나마 전반부보다는 볼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경기 양상이 나아졌다고 해서 전술이 제대로 먹힌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전투 장면에서 정작 빛나는 " 전술 " 은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무렵 들려오는 그 유명한 대사 " 후세 사람이 우리가 고생한 거 알랑가 몰라 ? " " 모르면 호로 새끼지 ! " 는
영화 << 디워 >> 엔딩 타이틀에서 흘러나오던 아리랑'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영화 << 명량 >> 은 상업 영화로서는 성공했지만 얼개 면에서는 완벽하게 실패한 작품이다.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면서 영화 << 명량 >> 을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라는 얘기가 나왔다. 오, 오오. 우리는 흥분했다. 언제부터인가 < 스펙타클 = 리얼 >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이 연출한 << 거미의 성, 1958 >> 은 웅장한 전투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오히려 이 영화는 동양화를 보는 듯한 화면 구성이 돋보인다. 감독은 화면을 가득 채우는 대신 잔뜩 비운 채 아슬아슬한 스펙타클을 선보인다. 카메라는 쉽게 피사체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차라리 멀리서 지켜보는 쪽을 택한다.
그 어떤 영화보다도 리얼하고 스펙타클했다. 자기가 모시던 영주를 살해하고 새로운 영주가 된 와시즈( 미후네 도시로 ) 의 최후는 지금 보아도 소름이 돋는 명장면'이다. 시종일관 피사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카메라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도망치는 미후네 얼굴을 집요하게 접근하는데, 이 장면에서 미후네 도시로'라는 배우가 보여준 공포 연기는 압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은 특수효과로 만든 게 아니라 실제로 궁사들이 미후네를 향해 활을 쏜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배우 동선이 약간 틀어지거나 활을 쏘던 궁사가 과녁을 잘못 맞췄다면 미후네 얼굴에 화살이 박힐 상황이었다. 그러니깐 미후네 도시로는 이 장면에서 연기를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두려움에 벌벌 떨었던 것이다.
그 생생한 얼굴이 고스란히 그 장면에 잡힌다. 영화 << 명량 >> 은 실감나는 스펙타클 장면이 1시간 동안 진행되지만 리얼'하지는 않다. 볼거리로 화면을 가득 채웠으나 정작 필요한 것은 여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