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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 상 ㅣ 스티븐 킹 걸작선 2
스티븐 킹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평점 :
신은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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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고백하련다. 한때 나는 싸구려 공포 영화 열혈 오타꾸'였다. 보석상을 터는 강도처럼 동네 비디오 가게마다 침입해서 공포 영화 비디오 테이프를 쓸어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내 꿈은 공포 영화'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지구 정복'은 잘 빠진 주류 하드-바디'들이 책임질 몫이었으니, 나 같은 비주류 오타꾸는 병뚜껑 모으기 정복, 껌종이 모으기 정복' 같은, 주류가 꺼려하는 잡동사니'를 수집하는 넝마주이'였다. 지구 평화는 독수리 O형제'에게 맡기고, 공포 영화는 H'에게 맡겨라. 영화 좀 본다 하는 놈들은 해외 영화 잡지 < Cahiers du Cinema > 나 < Sight & Sound > 를 거들먹거리며 시네필 특유의 " 좆부심 " 을 뽐냈지만 나는 예술 영화에 대해 그닥 관심이 없었다.
아아, 그 시절'을 회상하며 나는 쓴다. 오래되고 낡은 브이. 에이치. 에스' 테이프 속에서 웨스 크레이븐'과 로이드 카우프만'의 영화'를 발견하는 기쁨'은 위대한 불꽃'이었노라 말이다. 나는 주말이면 하이에나처럼 B급 영화를 찾아 헤맸지만 열정만큼은 A급이었다. 특급 사랑'이었다. 정성일'을 교주로 추앙하는 시네필들이 예술 영화를 통해 사랑와 혁명을 배울 때, 나는 싸구려 공포 영화를 보며 " 집 나가면 개고생 " 이라는 심오한 교훈을 얻었다. " 오지 탐험가'보다는 차라리 히키코모리가 낫겠어...... "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걸어둔다. (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274129 )
당시 나는 문학 작품에 관심이 없었다. 범우사 문고판 세계문학전집 읽기 이후로, 스무 살 이후로, 더 이상은 문학 작품을 읽지 않았다. 문학 읽기는 기쁨이 아니라 고해'였다. 스티븐 킹 소설을 읽어야 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내가 좋아했던 공포 영화가 " 대부분 스티븐 킹 소설을 각색한 영화 " 였다는 데 있었다. 킹은 대체 누구냐 ? 한번 속는 셈치고 킹 소설을 읽어볼까. 때마침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기획한 " 스티븐 킹 걸작선 세트 " 가 출간되었기에 바로 구입했다. 내가 처음 읽은 킹 소설은 << 샤이닝 >> 이었다. 동시에 본격적으로 문학을 다시 영접했던 계기도 << 샤이닝 >> 때문이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 샤이닝 " 이 워낙 강렬했던 탓이었을까 ?
소설 " 샤이닝 " 은 생각보다 심심했다. 나는 이 작품이 재미있다는 데 동의했으나 작품성이 뛰어난 소설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스티븐 킹은 그냥 그렇고 그런, 재미난 소설가'였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비유를 들자면 그때 나는 성경험이 전혀 없는 모태솔로녀'였다. 고기도 먹는 놈이 맛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 장르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순문학에 대한 접근법과 장르 문학에 대한 접근법은 달랐다. 당시 나는 부끄럽고 두려워서 모텔 침대 시트를 바짝 끌어올린, 성경험이 전무한 스무 살 시골 처녀 같았다. 거칠게 다가오는 저 짐승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킹에 대한 진가는 늦게 발동이 걸렸다. 장르 소설을 자주 접하다 보니 재미를 느꼈다.
부끄럽고 두려워서 침대 시트를 바짝 끌어올렸던 나는 이제 능숙한 " milf " 로 변했다. " 난 이제 매력적인 아줌마가 되었어. 이제는 불알 달린 사내새끼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는 요물이 되었지. " 스티븐 킹 신작 << 닥터 슬립 >> 을 읽고 나자 문득 << 샤이닝 >> 이 궁금해졌다. 알콜중독자가 된 삼십대 중년 남자, 대니 토랜스의 유년 시절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오래 전에 읽기는 했으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나면 항상 뒷장 속지에 날짜를 적는 버릇이 있었는데 확인하니 2004년 1월 2일'이다. 읽은 지 십 년이나 지났구나 ! 발췌독'을 할 생각으로 첫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만 정독하고 말았다. 괄약근을 풀었다 조였다 하는 기술은 타, 타타타탁월했다.
서로 연결될 것 같지 않던 각각의 알레고리는 교묘하게 하나로 통일되어 주제를 강화했다. 집요할 정도로 계산적인 배치'였다. 독자는 스티븐 킹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다. ( 어이구, 잘하는 짓이다 ! ) 스티븐 킹이 다루는 문학 세계는 < 본성 > 이 < 이성 > 을 압도하는 세계'다. 사회화된 이성은 본성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극한 상황이 연출되면 이성은 이성을 잃고 고성을 지른다. 그 텅 빈 공간을 거친 본성이 채운다. 소설 << 샤이닝 >> 은 유리 같은 이성'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존재인가를 증명한다. 유리는 깨지는 순간 날카로운 무기'가 되듯, 사회화를 학습한 이성적 사고 또한 분열되는 순간 광기로 변한다. 통제는 불가능하다. 좋은 아빠( 잭 토런스 )는 화가 나면 괴물이 된다.
자기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오버룩 호텔(overlook hotel) 은 고스란히 잭 토런스를 투영한 유물적 공간이며 잭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겨울이 되면 세계와 단절되어 고립되는 오버룩 호텔은 잭 토런스가 처한 상황과 일치한다. 알콜중독과 가정 폭력 그리고 실업이 겹치면서 잭 토런스는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된다. 겉으로 보기에 아내는 남편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내는 남편이 술을 몰래 마시는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들은 서로 불신한다. 사용 연령 기간이 지나버린 알전구 필라멘트 같다. 남자는 이 균열을 감지한다. 그리고는 이내 폭발한다. 임계점은 한계를 넘었다. 母子를 위기에서 구했던 또 다른 샤이닝 능력자 잭 할로런 노인은 어린 대니에게 말한다.
대니. 세상은 상관하지 않아. 너랑 나를 미워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해 주지도 않아. 세상에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단다. 착한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홀로 남겨 두고 떠나기도 하지. 어떤 때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
- 샤이닝 2권, ( 344쪽 )
이 노인네도 참 주책이다. 다섯 살배기 대니를 두고 이토록 심오한 이야기를 늘어놓다니....... 하지만 그게 진실이다. 신은 인간의 운명을 지켜볼 뿐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신은 (인간의) 행복을 보며 미소 짓지만, (인간의) 불행에 대해 울지는 않는다. 권선징악은 없다. 착한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지만, 나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도 한다. 누굴 탓할 일은 아니다. 인생이란 그런 거니깐 말이다. 소설 << 샤이닝 >> 은 " 운명 " 에 대해 말한다. 비극은 비극으로 끝난다. 잭 토랜스의 유년 시절은 불행했다. 할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고, 아버지도 알콜중독자였고, 잭은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잭의 아들 대니도 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밝는다. 꼬마 대니'도 어른이 되지만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또한 알콜중독자였으니 말이다.
사르트르는 이런 말을 했다. "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평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 토런스 일가'를 두고 하는 말 같다. 결론은 이렇다. << 샤이닝 >> 은 걸작이다. 이거... 특급 칭찬이야.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