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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ㅣ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매미와 함께 피어싱'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깊고 어두운 구석이 있었다. 청순가련한 여자이기보다는 스모키 화장과 피어싱이 잘 어울리는 팜므파탈에 가까웠다. 매력 있는 여자였다. 손창섭의 단편 << 인간 동물원 초(抄) >> 를 읽어보라고 한 이도 그녀'였다. 어느 날. 그녀는 툭, 지나가는 말을 내게 던졌다. " 매미는 5년 동안 땅속에 살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 고작 열흘 남짓 살다 죽잖아요 ? 매미는 땅속에 있을 때가 행복했을까요 ? 아니면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가 행복했을까요 ? "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또래끼리 사소한 논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 짧고 굵게 : 빛나는 태양 아래서 죽느냐 > 아니면 < 길고 가늘게 : 어둠 속에서 사느냐 > 가운데 어느 삶이 더 가치있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곰곰 생각하다가 땅속에서 산다고 해서 불행한 삶은 아닐 거라고 두리뭉실하게 말했다. 성의 없는 답변이었다. 성의가 없었다, 라기 보다는 대답이 궁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과학 에세이 모음집 << 힘내라, 브론토사우르스 >> 에 삽입된 " 밝게 빛나는 커다란 땅반딧불 애벌레 " 라는 긴 제목을 단 에세이를 읽다가 문득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진 그 질문이 생각났다.
인간 존재의 여러 측면 중에서, 성장과 발생이라는 생명 주기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을 찬미하지만, 서양인들은 일반적으로 아이들을 덜 발달한 불완전한 성인으로 간주한다. 성인보다 작고 연약하고 무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인이 되는 것이 최종 목표고, 어린 시절은 위를 향한 경로일 뿐이다. ( 360쪽 )
그 짦음은 성충에게만 따라다니는 속성일 뿐 그보다 훨씬 오래 사는 애벌레 역시 전체 생명 주기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17년을 사는 매미는 어떤가 ? 매미의 애벌레가 영광스러운 며칠을 끈기 있게 기다리며 오랜 기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은 아니다. 애벌레는 지하에서 활동적인 삶을 영위한다. 물론 그중에는 긴 수면기도있지만, 여러 차례 허물을 벗으며 왕성하게 성장하는 기간도 포함된다. (366쪽)
17년 매미'는 말 그대로 17년 동안 땅속에서 굼벵이로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 매미 성충으로써 열흘 남짓 살다가 죽는다. 무엇보다도 곤충류에 속하는 매미가 개나 고양이 같은 포유류'보다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런데 17년 매미에 대한 놀라움'은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곤충이 17년이나 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상에서 열흘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17년이라는 " 지난한 세월 " 에 놀라고, 10일이라는 " 허무한 세월 " 에도 놀라게 된다. 전자는 굼벵이에 방점을 찍은 것이고, 후자는 매미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라면 어느 쪽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
아마도 그녀는 굼벵이'보다는 매미'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젊었을 때에는 불꽃처럼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生을 동경하게 되는 법이니까 ! 어느 날, 그녀는 날카로운 " 무엇 " 으로 온몸을 자해했다. 살은 부풀어올랐고, 핏방울이 맺혔다. 음각으로 판 상처는 공교롭게도 양각으로 이루어진 흉터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무수한 상처를 보며 안도했다. 그 상처는 죽음에 대한 욕망보다는 생에 대한 의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그녀에게 논리정연한 대답을 했을 것이다. 굼벵이의 최종 목표는 매미'가 아니라고, 굼벵이는 매미에 비해 덜 발달한 존재가 아니라고, 날개는 진화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고.
날개를 가진다는 것이 진화의 최종 목표라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조류보다 덜 진화한 존재'가 된다.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 반드시 날개가 필요하지는 않다. " 매미는 날개를 얻기 위해, 독수리도 아니면서, 17년 동안 땅속에서 " 독수공방 " 했을까 ? 17년 매미는 개나 고양이보다 오래 사는 곤충이다. 그러므로 열흘 살다가 죽는다, 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매미는 17년을 살았다. 매미가 완전체'라면 굼벵이도 완전체'다. 스모키 화장과 피어싱이 잘 어울리는 그녀는 어느덧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었다. 나는 그녀가 쓴 우울한 문장을 매우 좋아했다. 좋은 작가'가 되리라 믿는다.
" 힘내라, 팜므파탈이여 ! " 검은 터널은 끝에 가서야 환해지는 법이다.